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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 자신의 마지막 방송에서 "회사결정에 따라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그동안의 제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쉽지만 희망을 품을 내일이 언젠가 올 것임을 믿습니다. 할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라고 시청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뒤 자리를 나서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 자신의 마지막 방송에서 "회사결정에 따라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그동안의 제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쉽지만 희망을 품을 내일이 언젠가 올 것임을 믿습니다. 할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라고 시청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뒤 자리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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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민 앵커는 지난 13일 "할 말은 많아도…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다"고 말하며 13개월 만에 <뉴스데스크> 앵커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의 '히트상품'으로, MBC가 홈페이지에 따로 묶어 서비스하기까지 했던 '클로징 멘트'도 끊겼다.

그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교체설'에 시달려왔다. MBC 경영진은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그의 교체 배경에 '뭔가 있다'는 의혹의 눈길이 정치권력과 MBC를 번갈아 노려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보도본부 차장 평기자들의 제작 거부도 7일째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들의 목적은 '신경민 지키기'가 아니다. 내부에서도 신 앵커의 <뉴스데스크> 진행을 두고 논쟁이 있었고, 그에 대한 후배들의 '호불호' 역시 비교적 분명하다. 하지만 "신경민을 이런 식으로 쫓아내리면 안 된다"는 인식에는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앵커 신경민'의 간단치 않은 기자 이력을 짚어보면 그가 "할 말은 많지만…"이라고 말을 흐린 이유를 알 수 있다.

'글 쓰는 가문'의 둘째 아들... '기자' 신경민의 첫 출발부터 순탄치 않아

신경민은 1953년 전라북도 전주의 한 '글 쓰는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는 <촛불>, <슬픈 목가> 등의 서정시로 유명했던 신석정 시인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신현근씨는 <전북일보> 기자였다. 아버지 신씨는 편집국장과 주필을 거쳐 <전북도민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특히 <전북도민신문>이 어려웠던 시기, 도민 추천으로 사장이 돼 제호를 <전북도민일보>로 바꾸고 정상화의 길을 닦았다. 신경민의 '꼬장꼬장'한 성격, 다소 현학적인 코멘트 등을 이런 '집안의 내력'과 연결시켜 말하는 이도 있다.

그는 전주고등학교를 나왔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는 입학 동기로 만나 대학은 물론 직장까지 함께 다녔다. 1971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엄기영 MBC 사장은 그의 2년 학과 선배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30여 년 질긴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 때는 두 사람이 같은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MBC의 한 고참기자는 "만일 신경민의 교체가 항간에 떠돌듯 '엄 사장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행된 것이라면 그 역시 무척 괴로울 것이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본인이 직접 내린 결정이었다면 두 사람의 인연에 큰 생채기를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

MBC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엄기영과 신경민은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 소통이 되는 사이였으나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를 보는 시각차 때문에 조금씩 사이가 멀어졌다"고 말한다.

기자 신경민은 첫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1980년 여러 언론사에 응시했는데 대량 해직 사태 등 언론계가 어수선해 그해 <동아일보> 합격은 취소됐고, MBC도 해를 넘기고서야 채용을 했다. 원래대로라면 80사번을 받아야 했으나 81사번으로 입사하게 된 이유다.

'강한 근성'에 따른 시련은 전두환 대통령 집권 초기이자 그의 입사 초기부터 시작됐다. 그가 지난 1월 <씨네21>의 김혜리 기자와 나눈 인터뷰 중 밝힌 내용을 보자.

"남대문 대한화재 지하상가에 불이 났는데 현장검증을 보러갔더니 경찰들이 기자들을 가로막아 싸움이 났어요. '청와대 지시'라기에 '청와대 좋아하네. 나쁜 놈들'이라고 대꾸했는데 키가 커서인지 경호실 차장이 나를 지목해 끌고 갔어요. 오후에 청와대 경호실로 오라고 해서 갔는데 그때 국가원수 모독죄라는 것을 처음 들었죠. '청와대 좋아하네'라는 말이 문제가 된 거죠. 결국 입사 1년도 못 돼 당한 내근조치가 5년을 갔어요. 그러잖아도 호남 출신인데 골치 아픈 놈으로 찍힌 거죠."

'찍힌' 신경민의 앞날은 울퉁불퉁했다. 밀려나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뉴스데스크>와 악연은 15년 전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뉴스센터를 나서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뉴스센터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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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와의 '악연'(?)은 15년 전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정치부 소속으로 주말 <뉴스데스크>를 맡았던 1993년~94년 당시에도 그는 간혹 오프닝멘트, 클로징 멘트, 중간 코멘트 등을 통해 당시 YS정권을 비판했다. '황태자' 김현철씨가 정치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다는 뉘앙스의 멘트를 줄곧 날렸고, 쌀 개방을 포함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된 것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지적했다.

당시에도 그는 1년 5개월여 만에 허망하게 <뉴스데스크>에서 물러났다. 2009년 4월 교체보다 훨씬 잔인하게 '잘렸다'. 그의 후임 진행자가 덜컥 결정되어 버린 것이다. 신경민 자신도 "그때 참 많은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정동영·엄기영이 시청자들의 인기를 끄는 동안에도 그는 내부에서 여러 번 밀려나곤 했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첫째는 사주에 새겨진 타협 못하는 천성이고, 다음으로 고향 탓도 꽤 있었죠. 회사도 사람 모인 사회니까 계파가 있는데 '우리 편에 서면 오랜 방황을 일거에 해결해주겠다'는 식의 유혹도 있었어요. 제가 가진 유일한 힘인 '후배들의 지지'를 사고 싶어하는 쪽에서 출입처 배치나 특파원 카드를 갖고 흔들었던 적이 몇 번 있죠. 그런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가 다시 내근조치를 당하기도 했고요."

그가 자평한 '타협 못 하는 천성'과 '후배들의 지지', '일언지하에 거절'은 다른 동료 후배들의 공통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그가 다시 외부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 진행한 MBC 라디오 <뉴스의 광장>이었다. 이때도 그는 '클로징 멘트'로 출근족들의 인기를 끌었다. 이 프로그램은 <손석희의 시선집중> 바로 다음 프로그램으로 오전 8시부터 시작되는데, 꽤 많은 기자들이 출연하기 때문에 빠른 호흡으로 진행된다. 신경민은 시간에 쫓기면서도 클로징 멘트를 날렸다. 가끔 클래식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도 했다. 이때 역시 그의 클로징 멘트 핵심은 '약자에 대한 배려', '힘에 대한 견제'였다.

경찰이, 강화 총기 탈취사건으로 사망한 병사의 가족보다 먼저 언론에 사망자 신원을 공개한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7년 12월 7일 아침이었다.

"부모는 그 사이 차 안 라디오 뉴스에서 보름 전 휴가 때 봤던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둡고 불안한 차 안에서 20살 아들의 이름과 사망 소식을 듣는다면 그때 심정과 절망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이 때문에 부모에게 사고가 날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성숙한 관행이 자리 잡고 충분한 배려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시 그의 클로징 멘트를 두고 정치권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았다. 특히 한나라당쪽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2007년 11월 30일에는 당시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MBC가 편파적이라면서 "특히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 중 <신경민의 뉴스광장>은 지나칠 정도로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며 "신경민은 전주고 48회로 정동영 후보와 동기"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경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재 선진화 방향을 주도했다'며 국무회의 때 화를 낸 데 대해 "결론 내려놓고 얘기하며 진행하는 방식, 화를 먼저 내는 방식, 조금이라도 상식을 아는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서 "철부지 꼬마들이 노는 골목이나 주먹 휘두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지적했다. 신경민은 2007년 대선 당시 정동영 후보의 교육정책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지난 2008년 3월 24일 <뉴스데스크> 앵커로 발탁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한 번도 기자로서 공정성 객관성 의무 책무에 대해서 져버렸다 생각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게 고려됐다면 한국적 현실이겠지만, 개의치 않는다. 해왔던 대로 진실하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자, 앵커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클로징 멘트' 논란에 대해선 이렇게 정리한다.

"공자·맹자·부처님·예수님 말씀 되도록 피해요. 저널리스트로서 추상적 단어는 좋아하지 않아요. 저널리즘은 구체적 이야기를 해야죠. 뭐가 잘못됐는지 꼭 집어줘야 하고. 대안이 있다면 그것도 논해야죠. 모두가 착해지자, 모두 같이 나누자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신문이나 방송을 보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조여온다'는 느낌을 받았던지 그 역시 <뉴스데스크> 앵커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정확히 몇 달 뒤를 내다보고 있었다.

"(앵커를)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교체 명분은 시청률이 되겠지만 시청률은 늘 그만했으니 구실일 테고요. 여건이 그리되면 할 수 없죠. 저 역시 주야장천 앵커하려는 열망도 없어요. 늦게 시작했으니 누구처럼 10년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미국이 아니니 댄 래더나 월터 크롱카이트처럼 칠십 넘어 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다만 하는 동안 하루하루 열심히 할 뿐이죠."

MBC '최고참 사원' 신경민... 동료들 "소신 있고 기개 있는 기자"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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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이로 쉰일곱. 그는 MBC 최고참 사원이다. 동안이어서 그렇지 정년을 고작 몇 년 앞두고 있어 대부분의 사원들이 모두 그의 후배다. 한 후배기자는 "신경민 선배는 때로는 어렵고 고집도 세고 딱딱하단 느낌이지만, 그가 기자의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켜낸 선배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MBC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가깝게 지냈던 한 지인은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소신 있고 기개 있는 기자였고, 그것이 그를 이 자리에까지 오게 했다"면서 "내부에서 힘든 순간을 많이 보낸 사람이지만, 그걸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오히려 수련의 방식으로 삼는 듯했다"고 말했다.

다른 지인은 그가 탁월한 '자기 관리자'라고 평가했다.

"그 양반, 워싱턴 특파원도 지냈고 미국 연수도 다녀왔고, 또 고참이 되면서 남는 시간도 있었을 텐데 골프를 전혀 안 칩니다. 담배도, 술도 안 하고 비싼 술집에도 안 갑니다. 스스로에게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기자, 후배들이 배울 게 많은 기잡니다. 자기의 원칙을 세우고, 끝까지 '언론인'으로 남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또 한 마디 덧붙였다.

"외국에서는 머리카락 하얗게 될 때까지 앵커 하는 사람 많지요? 모든 권력은 그런 사람들 불편하게 생각하기 마련이고.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편향이네 뭐네 이러지는 않아요. 우리도 박정희·전두환 시절에 대부분 앵커가 단명했지요. 이래서 교체 저래서 교체… 엄기영 사장이 13년 넘게 <뉴스데스크> 앵커했는데 그게 뭘 의미하겠어요? 엄 사장이라고 불편해  하는 사람 없었겠어요? 그런데 그가 10년 넘게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성숙해진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단면이었지요. 그런데 1년 만에 이런 상황이 된 거지. 신경민은 머리 하얗게 될 때까지 뉴스 앵커 할 만한 몇 안 되는 사람이고 어떤 권력이든 불편하게 생각할 사람이죠."

신경민은 진보적인 사람일까? "오히려 보수 쪽에 가까운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다수다. "여러 사정과 상황이 있었겠지만, 그는 노동조합 활동도 열심히 하지 못했고 '중심'에 서지도 않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더 어이없는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와 20년 넘게 MBC에서 일한 한 후배 역시 "신경민은 이렇게 보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후배는 신경민을 보수 성향인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에 비유했다.

"이상돈 교수 있지요? 굳이 성향을 따지자면 신경민씨는 이 교수랑 비슷해. '원칙이 분명한 보수'라고. 그가 클로징에 담았던 힘에 대한 경제,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은 진보의 '가치'를 존중한 것이고. 이건 오히려 대한민국 보수가 배워야 할 덕목 아닌가? … 원칙주의자를 진보주의자인 양 착시해서 이렇게 쫓아버리면 안 되는 거라고..."

'꼬장꼬장'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원칙주의를 지켜온 기자 신경민. 30여 년간 MBC에서 지켜온 그의 원칙은 지난 13개월간 오후 6시~저녁 8시의 '고독'을 거쳐 밤 9시 40분께 20여 초짜리 '클로징 멘트'로 농축되어 세상에 나갔다. 하지만 "오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상대로 그는 '타의'에 의해 앵커 자리에서 내려왔다.

글 쓰는 집안 둘째 아들로 태어나 MBC에서 온갖 풍랑을 겪어 온 그의 꺾이지 않는 원칙과 철학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시청자들과 만날까? 약자에 대한 배려, 힘에 대한 견제라는 그 원칙이 다시 '오프닝'되는 날은 언제일까?

모처럼만의 휴가에 들어간 그는 아직까지는 "입을 열 때가 아니"라며 침묵하고 있다.


태그:#신경민,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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