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불교계, 용산참사 눈감고 대통령 초청 법회 개최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검찰의 편파수사와 보수언론의 편파보도, 시민들의 무관심이 맞물리면서 점차 이슈에서 사라지고 있다. 유가족들은 보상은커녕 장례식도 마치지 못해 그 고통이 날로 가중되고 있다.

시민사회와 종교계 일각에서 여전히 용산참사 추모대회를 여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년 촛불정국 때 수십만의 인원을 동원한 불교계가 용산참사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불교계는 3월 18일 서울 그랜드힐튼에서 열린 '경제난 극복과 국민화합'을 주제로 열린 대법회(한국불교종단협의회 주관)에 이명박 대통령을 초청해 양자 간의 갈등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이에 대해 '2차 오체투지 순례'를 앞두고 지난 3월 2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수경 스님(화계사)은 법회를 비판하면서 "용산 참사를 대하는 불교계의 어른들이나 중진들의 시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불교계 상층에 대해 불신을 표명했다.

이명박 정권과 극심한 갈등을 겪었던 불교계가 1년 만에 안면을 바꾼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만약 이 대통령이 불교신자였다면 작년 촛불정국 때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까? 아마 불교계 주류는 촛불집회에 대해 용산참사처럼 침묵하거나 잘해야 성명 하나 내는 것으로 마감했을 것이다.

결국 한국불교가 지난 해 이명박 정권에 맞선 것은 중앙관료들이나 지자체장들의 불교에 대한 편파발언이나 경거망동한 행동도 있었지만 국가권력의 핵심에 소망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세력이 중추를 이룬 것에 대한 불만표시였던 것이다. 

불교계의 모순된 행동은 한국불교 자체가 권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된 것이다. 사실 오랫동안 한국불교는 친일과 친독재로 얼룩졌고 권력과 공생해왔다. 2005년 2월 혜봉 스님이 발간한 <친일승려 108인-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에 따르면 해방 후 불교계 핵심을 이룬 인사들의 친일 행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친일 승려들은 비행기 등 군수품과 위문금 헌납운동, 징병제, 학도병 모집, 창씨개명에 적극 호응했으며, 친일 종단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설립했다.

이들은 해방 후에 '친일승려'로 지목돼 승권정지 등의 중징계를 받았지만 반탁세력과 연계해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왜곡하거나 은폐해 애국자로 둔갑했다. 조선불교 조계종을 만들고 스스로 총무원장이 된 이종욱을 비롯한 차상명·최범술·허영호 등은 건국훈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고 서울 동작동과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불교계의 친일과 친독재 유산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만해 한용운에 대한 불교계의 시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족시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는 일제에 투항을 거부해 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지만 해방 전에는 친일인사들에 의해, 해방 후에는 결혼 등의 이유로 경원시 당했다.

일제, 사찰령같은 악법 통해 한국불교 장악

불교계는 특히 만해가 승려생활을 시작하고 불교유신론(1910년)과 님의 침묵(1925년)을 지은 백담사에 과거 잘못에 대한 일언반구의 반성도 없는 독재자 전두환을 보내 2년 이상을 머물게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사된 것은 그를 밀어낸 노태우 정권과 불교계 상층간의 결탁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부 승려들은 원로를 모시듯 면회하는 모습을 보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만해의 독립운동과 불교에 기여한 것을 감안하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근대 한국불교는 권력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총독부가 불교를 자신들의 관할에 두려고 제정한 사찰령도 불교계 대부분이 찬성한 것이고 오늘날 한국불교의 다수를 차지하는 조계종의 탄생도 이승만 정권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한 것은 1911년으로 사찰의 이전, 합병, 폐지와 같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사찰의 주요 재산을 처분할 때, 또한 사찰의 중요 법규를 정할 때 조선총독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사찰을 통상의 목적 이외에 사용할 때 지방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사찰령의 내용은 정부가 불교 사찰의 관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겠다는 내용임에도 불교계가 수용한 것은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정권으로부터 무시당한 쓰라린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인들은 사찰령의 내용이 공식적으로 국가가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리해 준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불교가 사찰령을 받아들였던 결정적 이유 중에 하나는 1895년 일본 불교계의 건의로 승려의 한성출입이 허용되는 등 자신들의 오랜 숙원이 해결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일본 불교(조동종)와 통합을 통해 한국불교의 힘을 확장시키려는 세력도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오히려 조선이 망하는 것이 한국불교에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선시대는 불교에 가히 굴욕의 시대나 다름없었다. 승려들은 천민과 같은 대접을 받았고 사찰들은 유생들의 꽃놀이(등산)를 위한 베이스캠프와 같은 구실을 했다. 예를 들어 남명 조식 선생의 지리산 등정기인 유두류록(遊頭流錄, 두류는 지리산의 별칭이다)을 보면 여러 선비들이 기생과 노비 등을 데리고 지리산 일대 사찰에 머물며 승려들의 시중을 받으며 머물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승려들의 한양출입이 금지되어 일부 승려들은 도성근처 사찰에서 옷을 갈아입고 출입하기도 했다. 결국 서산대사 같은 이들은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인 유정과 처영 등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 싸우면서 처우개선을 얻어내기도 했지만 이전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은 없었다. 

조선 5백년의 경험이 불교에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작용했기 때문에 한국불교가 일제에 협력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에 의거 전국의 사찰을 일본식 교구본사제도를 도입해 31개 본사를 지정하고 그 외 사찰은 말사로 간주했다. 총독부는 교구·말사제도를 시행하면서 총무원 같은 중앙집행기구를 두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교구본사를 관리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다.

조선불교 사찰령 시행규칙 제2조에 따르면 교구본사 주지는 조선총독에게, 말사주지들은 지방장관들의 인가를 받도록 했다. 이러한 사찰령의 유산은 해방 후까지 이어져 각 정권이 한국불교를 통제하는 데 악용되고 오랫동안 종단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제의 한국불교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강화되던 시기 한용운은 사찰령이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불교의 자치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경허·만공·용성스님 등 11명의 선승들도 1921년 '조선불교 선학원'을 창설해 조선불교의 법맥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해방 후 한국불교의 중추가 되었지만 이 당시 일제와 불교계 주류는 이를 탄압하거나 무시했다.

한국불교를 장악한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불교를 이식하기 위해 1926년 전국사찰에 주지의 비구계 자격을 삭제하도록 종용했고 1929년에는 사찰령을 개정해 결혼한 승려(대처승)도 본·말사의 주지를 할 수 있게 했다. 일제의 비호를 받은 대처승들은 교구본사는 물론 말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찰을 장악해 들어갔다.

종단 개혁, 이승만·박정희 정권 등 권력개입으로 이루어져

8·15 해방이 되면서 친일청산이 사회과제로 등장하면서 불교계도 1945년 8월 '조선불교청년동맹단'을 조직하고 9월에는 '조선불교혁신준비대회',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면서 친일종단 개혁에 나섰다. 일단의 노력으로 사찰령·31본말사법 폐지결의·교헌 등을 제정하고 중앙 총무원, 각도 교무원 설치, 13교구제 실시를 의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계도 좌·우로 분열되고 미군정도 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불교계가 건의한 사찰령폐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서울시내 여러 사찰을 접수해 미군정 시설로 사용하고 일부는 기독교에 넘겨줘 교회로 사용하게 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에서 비구 승려들의 정화운동은 계속되었으나 기득권을 가진 대처승 주지들의 저항과 비협조로 정화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 와중에 1954년 5월 당시 집권자였던 이승만은 불교와 관련해 8차에 대한 유시를 내렸는데 핵심내용은 모든 사찰의 주지를 비구들이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유시는 정화운동 측에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으나 정화가 자율적인 해결이 아니라 권력에 의존한 것이어서 한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의 유시 또한 순수성이 의심되기도 한다. 1954년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해 사사오입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 규정을 폐지하고 야당의 영향력이 큰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을 폐지하고 직선제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에 성공했다. 일부에서는 기독교 장로였던 이승만이 정권연장을 위해 대처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당시 최대 종교이면서 반대세력의 거점인 불교조직을 약화시키기 위해 불교계 정화를 지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만의 유시에 의해 시작된 1954년 비구·대처 분쟁은 1955년 문교부가 비구측이 설립한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을 인정함으로써 일단은 정화운동측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50년대 정화운동은 권력개입과 단식, 할복, 법원난입 등의 폭력적인 형태를 동반해 불교 전체의 위상이 추락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독재자 이승만이 물러나자 대처측이 반격에 나서 해인사 등 대형사찰을 접수했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일시적으로 분쟁이 멈추는 듯 했으나 사회단체 등록과정에서 다시 갈등이 첨예화됐다.

비구와 대처측은 각각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등록신청서를 제출했으나 군사정권은 하나로 통합할 것을 요구했고 그 과정에서 강제적으로 비구·대처 양측이 참여하는 불교재건위를 구성하도록 했다. 결국 양측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1962년 4월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종단이 발족하고 25교구 본사제 실시와 '불교재산관리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정부에 의해 타율적으로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분열은 필연적이었다. 내부 주도권 싸움으로 1967년 대처측 일파의 분종선언으로 이어지고 결국 1970년 4월 대처 측이 전국대의원대회를 열고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하면서 한국불교의 주류는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갈라진 한국불교는 1962년 박 정권이 불교재산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제정한 '불교재산관리법(이하 불재법)'에 의해 규제와 감독을 받았다. 불재법은 일제의 사찰령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종단의 인사 및 종통분쟁에서 재산분쟁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한 비민주적인 법이었다.

불재법에는 불교단체의 종류 및 문화공보부 등록, 주지 또는 대표자 등록, 단체의 대표권 및 재산관리권 등을 규제하고 사찰 경내 공사를 할 경우 정부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또한 불교단체가 불재법을 위반하거나 분규로 인해 이 법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정될 때는 당시 문화공보부장관이 재산관리인을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있는 권한도 포함했다. 불재법은 1987년 11월 '전통사찰보전법'으로 바뀌기까지 불교계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정권시기 또 하나의 특징은 호국불교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서산대사(휴정)와 사명대사(유정)가 역할 모델이 되었고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불교계는 박 정권의 뜻에 따라 살생을 금하는 젊은 승려들로 하여금 징병에 응하게 했다. 박 정권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승려의 징집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북대치와 월남전 등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면서 호국불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집권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980년 10월 27일 정권에 비협조적인 불교계 인사들을 척결하기 위해 "조계종 내에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가 난무해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조처를 가한다"면서 스님들을 강제 연행했다. 이 일로 18명의 스님이 구속됐고, 32명의 스님이 승적을 박탈당했으며 그 중 일부는 서빙고 보안사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80년대 불교계 진보세력 등장으로 정화운동 활발

10·27 법난은 현재까지 불교계의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아있으며 1988년 '국무총리 사과성명'이나 89년 국방부의 '불교계 수사경위 설명회',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의 '조계종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 권고'등이 진행됐으나 정확한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불교계 내부에서는 근대이후 처음으로 사회민주화·자주화운동이 시작됐다. 젊은 스님들과 진보적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불교민주화운동은 1985년 '민중불교연합(이하 민불련)' 창립으로 이어졌고 1987년 6월 대항쟁 당시 불교계를 대표해 큰 역할을 담당했다. 민불련은 또한 사회민주화는 물론 종단 민주화를 추구하는 독자적 승가조직 탄생에도 기여했다.

1986년 6월 조계종 내 개혁스님들은 '불교정토구현승가회(이하 승가회,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전신)'를 창립했고 그 열기는 같은 해 9월 7일 '해인사 승려대회'로 이어졌다. 승려대회는 반정부투쟁으로 발전해 불교재산법 등 불교관계악법 철폐, 10·27법난 진상 규명 등 불교계의 오랜 불만이 폭발하는 집회가 되었다. 민불련·승가회 등이 투쟁한 결과로 1987년 10월 불교재산관리법(불재법)이 폐지되고 대체입법으로 '전통사찰보존법(이하 전사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러나 전사법도 주지 취임시 자치단체장에게 신고토록 규정해 불교계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1997년 이 조항이 삭제되었다.

불교민주화세력의 노력으로 불교계의 숙원이 해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계종단은 여전히 정치권력과 유착, 종권다툼으로 폭력이 난무하는 등 고질적인 병폐를 보여주었다. 특히 1994년 상무대 이전 사업 223억 원 유용의혹과 동화사 80억 시주금 문제로 조계종의 권력예속화와 부패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던 청우건설 대표 조기현이 국방부 상무대 이전 공사비로 받은 돈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80억 원을 대구 동화사 대불 공사비로 시주하고 당시 총무원장이던 서의현이 그 돈을 1992년 민정당 대선후보 김영삼에게 건네준 것으로 1994년 1월 국방부 특검단의 수사결과로 드러났다. 조계종단은 이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무대 비리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서의현 총무원장은 3선을 시도하면서 경찰력을 지원받는 등 김영상 정권의 비호를 받았으나 국민여론의 악화와 개혁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서의현 체제를 무너트린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이하 범종추)는 1994년 4월 개혁종단을 출범시키고 종헌·종법 개정, 포교와 교육 강화, 사회적 실천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1994년 출범한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이 계속되고 공금횡령사건이 일어나면서 1998년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을 반대하는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했다. 이후 총무원 집행부와 반대 측 간의 대규모 폭력사태가 벌어졌지만 김대중 정부의 경찰력 투입으로 1개월 만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결국 송월주 총무원장이 3선을 포기하고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으나 종단 내 각 계파들의 이해와 요구가 맞물리면서 상황이 악화되고 총무원장 선거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했다. 1999년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30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했고 현재는 31대 법장스님을 거쳐 32대로 지관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사패산 터널 반대 철회 등 정권과의 무원칙한 타협으로 비난 자초

이처럼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의 역사를 보면 거의 모든 시기 정권의 간섭이나 연계, 결탁에 의해 종단권력이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가 정치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일제 강점기 제정된 사찰령의 유산이 그대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은 사찰령·불교재산관리법을 통해 불교를 통제하고 종교 자치권을 박탈했다. 1987년 제정된 전통사찰보존법 역시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정권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법집행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사소한 분쟁에도 무리하게 공권력을 동원해 정권에 줄을 선 정치승이나 기득권 세력을 비호했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자의적인 법집행과 공권력 투입은 한국불교로 하여금 정치권력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가 이명박 정권에 반기를 든 것은 청와대를 비롯한 국가나 자치단체의 불교차별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작년 8월 27일 수십만이 참여한 범불교도 대회는 촛불정국과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기독교 정권(?)으로 하여금 불교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다수의 촛불수배자들이 서울 종로 조계사로 피신해 네 달 가까이 농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권의 집요한 공작과 장기간 농성에 따른 조계종 총무원의 부담가중으로 수배자들은 자진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대부분 경찰에 검거되었다. 

작년 한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범불교대회를 열면서 정권의 관심을 끌고 결국 총리의 사과까지 받아낸 불교계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난 3월 18일 장로 대통령을 모시고 대법회를 개최했다. 역시 과거의 본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또 이에 앞서 2월 13일에는 조계종 공식행사에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각종 사업을 홍보하는 유인물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 때 배부된 홍보물은 '4대강 살리기'(국토해양부), '미디어발전법안이 필요한 이유'(문화체육관광부), '미디어 빅뱅, 지금 우리가 준비할 때입니다'(방송통신위원회), '녹색성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꿉니다'(국무총리실) 등으로 4대강 정비사업과 미디어법안에 관련된 것들이다.  홍보물 배부로 불교시민사회단체 및 환경단체가 강하게 반발하자 조계종측은 2월 26일 공식적으로 배부한 것이 아니라 직원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중국예술을 대표하는 변검처럼 불교계의 갑작스러운 안면바꾸기는 근래에도 있었다. 지난 북한산국립공원내 사패산 터널 공사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불교계가 시민·환경단체와 합의없이 일방적으로 투쟁을 접기도 했다. 사패산터널공사는 2001년 시작되었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공사백지화를 약속했으나 당선 후 이를 번복하고 공사를 계속해 불교계와 환경단체가 이를 반대했다.

특히 본사주지 스님과 중앙종회의원, 여러 강원의 학인스님들까지 나서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쳤지만 2003년 12월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노무현 대통령의 방문을 받고 정부 시책에 협력할 뜻을 밝힌 것을 계기로 불교계는 반대운동을 전격 마감하고 말았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시민·환경운동단체들은 '노무현 대통령은 국립공원을 파괴한 대통령으로 역사와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구시대적 관료집단과 기업, 그리고 대통령의 사과라는 명분을 어물쩍 챙기며 국립공원을 팔아버린 조계종을 규탄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결국 2년여에 걸친 치열한 반대투쟁은 단체 간의 합의도 없이 노대통령과 조계종 종정간의 만남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손쉽게 해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 농성에 적극 참여했던 한 스님은 "조계종 종정이 정부안을 수용하면 그 뜻을 따를 것"이라고 밝힌 뒤 반대운동에 동참했던 환경운동가를 비난하기도 했다.

조계종의 돌변에 대해 당시 시민·환경단체는 황당해 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지만 정치권과 관련한 한국불교의 역사적 상황을 알았다면 투쟁 전에 불교계와의 연대를 재고하거나 변신했더라도 원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사패산 터널반대운동의 경험과 올해 들어 정치권과 관련해 불교계 주류가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은 아직도 한국불교가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계의 속사정을 모르고 성급하게 연대를 함께 한 시민사회도 반성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가 그동안 정권으로부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정권과 맞섰다면 이명박 정권의 종교편향은 애초부터 봉쇄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고 김수환 추기경을 중심으로 권력에 맞섰던 천주교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계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불교#이명박#촛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