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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르담 드 파리>는 빅토르 위고가 1831년에 쓴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로 소설 속 인물과 갈등 구조를 그대로 담아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빅토르 위고가 1831년에 쓴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로 소설 속 인물과 갈등 구조를 그대로 담아냈다. ⓒ 엔디피케이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못난이 한 명이 있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놀림감으로 삼았다. 네 주제에 감히 누구를! 어릴 적 많이 듣던 이야기 구조. 아마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비슷한 동화나 설화가 있을 것이다.

뭐 과거를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현실에서도 많이 있는 스토리 아닐까. 초딩이나 중딩, 때로는 고딩 시절에 잘 나가는 퀸카 여학생을 맘에 품고 혼자 낑낑(?)거렸던 경험이 다들 한 번쯤은 있으리라. 이 흔한 소재로 소설이나 영화를 만든다면 어떨까. 쉽지 않겠지. 내공이 약하면 전개와 결말이 빤히 보여 식상한 하품이 쏟아질 것이다. 유치하면 신파로, 심각하면 애정 집착극으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훌륭한 작품은 - 그것이 문학 또는 영화나 공연이든 - 신선한 소재와 매력적인 이야기 그리고 살아 있는 캐릭터의 조화로 빚어진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시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작품은 뻔한 소재를 내밀하게 파고든 시대정신의 결과물이라고 확신한다. 아집 같은 내 호언은 <노틀담의 꼽추>가 입증했다.

'사랑'을 전 인류적 공통분모로 승화시킨 빅토르 위고

 치명적 매력을 가진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겉만 보면 분명 사랑싸움 이야기다.
치명적 매력을 가진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겉만 보면 분명 사랑싸움 이야기다. ⓒ 엔디피케이
지난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봤다. 결론은 명불허전. 막이 내렸어도 며칠 동안 내 입가에 되뇌는 꼽추 콰지모도의 서정적인 음악은 사랑의 비애를 반추하게 했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나 권력이 아닌 결국 사랑이라는 메시지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가 1831년에 쓴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이 뮤지컬은 소설 속 인물과 갈등 구조를 그대로 담아냈다. 당시의 낭만주의 성향이 대중공연인 뮤지컬에도 진하게 반영되었는데 감미로운 노래와 프랑스적인 예술 감각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수작이다.

스토리는 평이하지 않지만 공연은 이를 쉽게 풀어냈기에 이해하기 쉽다. 심각한 남녀관계의 대명사인 삼각관계를 넘어 사각관계가 주된 갈등구조이지만 그 속에는 당시 프랑스 계급사회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어 가볍게 넘길 작품은 아니다.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16세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두고 노트르담 대성당 주교 프롤로, 파리시의 근위대장 페뷔스, 꼽추 콰지모도가 각축(?)을 벌인다. 겉만 보면 분명 사랑싸움 이야기다.

나는 설익기 쉬운 '사랑'을 전 인류적인 공통분모로 승화시킨 빅토르 위고의 문학성에 감탄했다. 종교권력을 대표하는 프롤로, 지배계층을 상징하는 페뷔스, 프랑스 민중계층의 대변자 콰지모도와 집시들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 직전 계급사회의 모순과 삼부회의 갈등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의 상징이리라.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은 자유이며, 남과 나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에 있다는 진리가 뭉클하게 전달된다.

그래서 에스메랄다를 소유하려는 프롤로와 페뷔스의 욕망은 여자를 소유하려는 수컷의 본능으로 한정시킬 수 없었다. 인간 갈등의 시초는 자유를 구속하고 억제하려는 시도와 권력욕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현대에도 감동을 주는 것은 왜일까. 이미 인간 역사에서 계급 사회는 고대 유물로 취급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빅토르 위고가 품었던 문제의식이 현재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매우 불길하지만.

시대를 꿰뚫는 고전에 비친 우리는?

 <노트르담 드 파리>는 치명적이다. 시대를 꿰뚫는 광채 나는 고전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치명적이다. 시대를 꿰뚫는 광채 나는 고전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 엔디피케이

한국 사회에서 '계급' 운운하면 좌파나 친북이라는 명찰이 붙는다. 나는 우리가 그리고 인류가 완연히 계급 사회에서 벗어났는지 의심스럽다. 고대의 노예 제도는 사라졌지만 현대의 대다수 대중은 일종의 임금(월급) 노예가 아닐까. 월급 때문에 원하지 않는 직장과 일을 해야 되는 처연한 현실을 보면 과연 우리가 자유인일까. 먼 훗날 인류 역사가 우리 시대를 평가할 때 또 다른 형태의 노예가 있었다고 할지 모른다. 자유인으로 착각한 노예였다고.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척박한 질주는 신빈곤층을 양산했고 대물림되는 학력세습과 강남 8학군 진지화는 신종 계급 질서의 재편을 마친 상태다. 중학교도 국제중학교에 가야 그나마 신계급의 막차에 탈 기회가 있는 세상인데 뭘 더 바랄까. 이게 바로 계급 사회 아닌가? 고대의 노예는 신분 구조의 모순을 알기에 저항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오인된 자유인은 해고와 월급 삭감에만 반응할 것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치명적이다. 시대를 꿰뚫는 광채 나는 고전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작품이다.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중후한 시대정신이 오래된 작품을 고전이라 부르게 만든다. 그래서 고전은 중요하며 '원 소스 멀티 유징'의 진가도 고전에서 비롯될 수 있다.

하지만 우울하다. 왜 뮤지컬을 보며 지른 감탄과 박수가 현실에서는 들리지 않는가. 관객들은 에스메랄다를 죽게 만든 불편부당한 권력과 사회구조에 분노했을 텐데 왜 우리 사회의 모순에는 반발하지 못할까. 시대와 나라가 달라도 그것은 화장만 다르게 한 쌍둥이 모순인데 화장이 너무 짙어 현혹된 걸까.

덧붙이는 글 | 공연 안내 www.ndpk.co.kr



#노트르담 드 파리#뮤지컬#공연#빅토르 위고#콰지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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