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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 일입니다. 교직 3년차에 일급정교사 연수를 받다가 강사님 한 분을 난처하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수업 주제는 '동기부여'였습니다. 수업 시간 내내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동기부여가 없는 수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수업을 막 끝내려는 순간, 제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강사님, 오늘 수업 실패하셨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가 동기부여인데 강사님 저희들에게 동기부여 하시고 수업하셨습니까?" 

 

사실에 근거한 말이긴 하지만, 제 딴에는 웃어보자고 한 수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괜한 말을 했다싶을 만큼 강사님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금세 붉어졌습니다. 그 정도의 농은 여유 있게 받아넘길 줄 알고 지레짐작한 것이 화근이었지요.  


동기부여는 하나의 여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풍선이 점점 커지는 것은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여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파야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공부가 고파지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동기부여라고 말입니다.           


영어심화연수  전남교육연수원 국제교육부 건물. 이곳에서 32명의 전남지역 영어교사들이 함께 공부하고 잠을 잔다.
영어심화연수 전남교육연수원 국제교육부 건물. 이곳에서 32명의 전남지역 영어교사들이 함께 공부하고 잠을 잔다. ⓒ 안준철

이곳 전남교육연수원에는 원어민 교사 중에 도나(Donna)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계십니다. 그녀를 보면 함께 캠핑을 자주 다녔던 고교시절 친구들이 생각나곤 합니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이런 노래를 흥얼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도나도나도나도나, 도나도나도나도, 도나도나도나도나, 도나도나도나도…'

 

그녀의 수업이 기다려지는 것은 이런 아련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수업을 받다보면 자꾸만 공부에 배가 고파지는 것이 더 큰 이유입니다. 좀 더 많은 것을 담았다가 학교에 가면 아이들에게 양질의 음식을 먹이고 싶은 그런 간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지난 11(수)일에는 도나의 행복학(The science of Happiness)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이나 교수법도 물론 훌륭했지만 강의시간 내내 제가 행복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행복학 수업을 받고 마음이 더 행복해졌으니 학습목표를 100%로 달성한 셈이지요. 저는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면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수업을 받고나니 마음이 더 행복해진 것 같아요."

 

저는 가끔 학교에서 아이들과 사랑에 관한 얘기를 나누곤합니다. 한 인간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보다는 돈을 더 중히 여기는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서슴없이 말해줍니다. 이런 촌스러운 선생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아이들에게 변화가 생기는 것은 결국 사랑 때문입니다. 만만치 않은 일들을 어쭙잖은 사랑으로 극복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교사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행복을 행복으로 가르치듯 사랑은 사랑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날 도나는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쪽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오늘 행복에 관해서 공부한 것 외에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비결을 한 가지씩만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2%가 부족하다 싶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막 질문을 던지려고 했는데 도나가 먼저 말을 꺼낸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그날 수업의 백미였습니다. 우리 몫으로 남겨놓은 2%의 여백 말입니다. 다음은 그날 제가 쪽지에 적어낸 내용입니다.

 

'Love your self, and then, others.(자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남을 사랑하라.)' 

'Face trouble things, not trying to avoid them.(어려운 일을 피하려 들지 말고 맞서라.)


 

영어심화연수 담임인 원어민 Phil의 생일을 맞아 근처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6개월 동안 함께 공부할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클레스메이트들이다. (위사진) 
밤이 깊어도 아직은 잠자리에 들수가 없다. 할 공부를 다 해놓고 자야 내일이 편하다. 아, 그리고 우리의 행복바이러스 도나도나도나도나...(아래사진)
영어심화연수담임인 원어민 Phil의 생일을 맞아 근처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6개월 동안 함께 공부할 소중한 인연으로 만난 클레스메이트들이다. (위사진) 밤이 깊어도 아직은 잠자리에 들수가 없다. 할 공부를 다 해놓고 자야 내일이 편하다. 아, 그리고 우리의 행복바이러스 도나도나도나도나...(아래사진) ⓒ 안준철

사랑에 관한 잠언을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 두 가지가 저에게는 가장 힘이 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런 심리가 작동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한 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피하고 싶은 마음부터 들 때가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이곳 연수원에 와서는 그런 약한 마음보다는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서고 있습니다.


제가 영어교사라는 직업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른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모국어로 시상을 떠올리고 시창작에 매달려온 저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연수를 신청할까 말까하고 망설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보니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한 잎 한 잎 피어 있는 꽃잎을 찬찬히 뜯어보았습니다. 꽃잎 속에서 개미다리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수술이 보였습니다. '아, 겨울을 견딘 꽃이구나!' 싶었습니다. 긴 겨울 동안 춥고 척박한 땅에서 어렵사리 영양분을 끌어올려 꽃을 피워낸 꽃들이 그렇게 장하고 예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의 꽃을 피운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꽃을 피운다는 말 속에는 어려움을 견딘다는 뜻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명에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숭고한 노력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매일 한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 7명의 동료교사들은 (저를 포함해서 8명)들은 저를 캡틴(Captain)이라고 부릅니다. 학교 아이들 식으로 말하면 반장인 셈이지요. 만약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반장이 되어야한다면 저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유혹으로 다가온 것은 '행복바이러스'란 말이었습니다. 그것이라면 조금은 자신이 있겠다 싶었는데 고맙게도 마침 저를 추천하신 분이 계서서 반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12일(목)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클래스메이트들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날은 저녁을 먹고 밤 10시까지 각자의 방에서 개인 공부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은 연수원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프로그램에 접속하여 듣기연습(Listening Practice)하고, 한 시간은 영어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루를 마감하려는데 느닷없이 어떤 슬픔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것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한 편의 시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기로, 시를 잠시 떠나 있기로, 6개월 동안은 영어만 생각하기로 제 자신과 약속을 하고 이곳에 왔기 때문입니다. 아, 어떻게 할 것인가? 잠시 망설임 끝에 시 같기도 하고 편지같기도 한 몇 줄의 글을 적어 동료 선생님들에게 보내게 된 것입니다. 


Hi, my class!

I'm thinking about something.

What is something?

It's a valuable and precious thing.

It can be a person, or a tree.

Or a person who are looking at a tree.

Or a string which links between person's eye and tree's soul.

It makes me happy with half of sadness.

Please write back to me if you imagine that. 


-From you poor captain.

 


안녕하세요?

나는 지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람의 눈과 나무의 영혼을 잇고 있는 줄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슬픈 감정이 반쯤 깃든 행복으로 나를 이끕니다.

만약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나시거든 답장해주세요.

-부족한 캡틴으로부터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편지에 말씀 드리도록 하지요.   

덧붙이는 글 | 전남지역 영어교사 32명이 참여하는 영어심화연수는 3월 2일부터 8월 21일까지 6개월간(해외연수 1개월 포함) 전남교육연수원국제교육부연수관에서 진행됩니다. 


#영어심화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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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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