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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천신만고 1

.. 그러나 낯설고 물선 만리 타국에 와서 독립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 힘겨운 일이었다. 교민들은 거의가 가난해 모금 같은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학원 건물이 완성되어 9월 1일 태극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  《송건호-한국현대인물사론》(한길사,1984) 186쪽

'만리(萬里) 타국(他國)'이란 '머나먼 남 나라', 말 그대로 '낯설고 물선' 나라입니다. "벌인다는 것은"은 "벌이기란"으로 다듬고, '실(實)로'는 '참으로'로 다듬으며, "모금 같은 것은"은 "모금 같은 일은"이나 "모금 따위는"으로 다듬습니다. '완성(完成)되어'는 '다 지어져'나 '마무리되어'로 손질합니다.

 ┌ 천신만고(千辛萬苦) : 천 가지 매운 것과 만 가지 쓴 것이라는 뜻으로,
 │    온갖 어려운 고비를 다 겪으며 심하게 고생함을 이르는 말
 │   -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오다 / 천신만고로 전선을 벗어나 /
 │     천신만고하여 정상을 정복하다 / 천신만고해서 붙들어 놓으니
 │
 ├ 천신만고 끝에
 │→ 힘겹게
 │→ 모진 어려움을 딛고
 │→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 갖은 힘겨움을 물리치고
 │→ 진땀을 흘린 끝에
 │→ 피땀을 흘린 끝에
 └ …

'천신만고'를 한글로 적어 놓을 때, 무엇을 뜻하거나 가리키는지 찬찬히 읽어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와 같은 말은 우리들한테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들은 '천신만고'가 아니면 "온갖 어려운 고비를 다 겪으며 몹시 애먹음"을 이야기할 수 없을는지 궁금합니다.

'가까스로'로는, '어렵사리'로는, '겨우겨우'로는 우리 생각과 느낌을 실어내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진땀 빼고'나 '피땀 흘려'로는 어딘가 모자라다고 여기는지 궁금합니다. '힘겹게'나 '힘들게' 같은 낱말로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 천신만고로 전선을 벗어나 → 가까스로 싸움터를 벗어나
 ├ 천신만고하여 정상을 정복하다 → 어렵사리 봉우리에 오르다
 └ 천신만고해서 붙들어 놓으니 → 겨우겨우 붙들어 놓으니

찾으려고 해야 찾을 수 있는 길입니다. 쓰려고 해야 쓰이는 말입니다. 찾으려 하지 않는 사람한테 길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쓰려고 하지 않는 겨레붙이한테 토박이말이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저 헌신짝 대접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까스로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났지만, 우리 말과 글은 일제강점기 때 그대로입니다. 우리들은 어렵사리 우리 말과 글을 되찾았다고 합니다만, 오히려 오늘날 우리네 말과 글은 지난날보다 더 어지럽고 엉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들한테는 우리 권리와 기둥이 있어서, 우리 깜냥껏 우리 말을 하고 우리 글을 쓴다고 하지만, 가만히 살피면 아무런 줏대도 생각도 없는 우리들이 아니랴 싶습니다. 겨우겨우 일으켜세울 만한 말이요 글인데, 우리 스스로 일으켜세울 마음이 없고 생각이 없고 뜻이 없습니다.

ㄴ. 천신만고 2

..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유엔의 도움으로 다행히 카쿠마의 난민촌에 정착할 수 있었다 ..  《벤슨 뎅,알폰시온 뎅,벤자민 아작/조유진 옮김-잃어버린 소년들》(현암사,2008) 350쪽

"유엔의 도움으로"는 "유엔이 도와서"로 손보고, '정착(定着)할'은 '머물'이나 '뿌리내릴'이나 '자리잡을'로 손봅니다.

 ┌ 천신만고 끝에
 │
 │→ 온갖 괴로움 끝에
 │→ 온갖 힘든 일을 겪어낸 끝에
 │→ 힘들고 고달픔을 이겨낸 끝에
 │→ 가까스로 (겨우겨우 / 어렵사리 / 힘겹게)
 └ …

어려움을 많이 겪고서 이룬다면, '어려움을 겪고' 이룬 일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슬기롭게 이겨내며 이룬다면, '어려움을 이기고' 이룬 일입니다. 숱한 어려움을 딛고 올라서며 이룬다면, '어려움을 딛고' 이룬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자리에 따라서 알맞게 낱말을 고르면 됩니다. '겪고'라 할 때와 '치르고'라 할 때와 '딛고'라 할 때와 '이기고'라 할 때와 '물리치고'라 할 때와 '견디고'라 할 때는 모두 다릅니다. 그렇지만 '천신만고' 한 마디로만 적으면 어떤 느낌이고 어떤 생각인지 두루뭉술해지고 말아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신만고라는 말은 그 모든 뜻을 아우르고 있다"고.

글쎄, 참말 그 '천신만고'는 토박이말로 이렇게 저렇게 펼치는 느낌과 생각을 고루 담고 있는 말일까요. 이렇게 펼치는 느낌과 저렇게 펼치는 생각을 잠재우는 '천신만고'는 아닐까요. 우리 생각이 널리 퍼져나가도록 돕지 못하는 '천신만고'는 아닌지요. 우리 느낌이 깊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천신만고'는 아닌가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가다듬는 길을 밀어버리는 '천신만고'는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글을 못 쓰도록 뭉개 버리는 '천신만고'는 아닌지 궁금합니다.

 ┌ 아주 힘겹게 지낸 끝에 유엔 도움을 받아
 ├ 고된 가시밭길 끝에 유엔이 도와
 ├ 쓰라린 피눈물 끝에 유엔이 도와주어
 ├ 거의 죽을 뻔한 끝에 유엔이 손길을 내밀어
 └ …

힘들더라도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면서 우리 삶과 생각과 삶터를 가꾸도록 돕는 말을 우리 손으로 찾고 나눌 노릇이라고 봅니다. 더디더라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꾹꾹 걸으면서 우리 넋과 이웃과 자연을 일구도록 돕는 글을 우리 힘으로 살피고 함께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섣불리 뇌까리는 말이 아니 되도록 애쓰고, 어설피 꺼내는 글이 아니 되도록 힘쓸 노릇이라고 봅니다. 이냥저냥 쓰는 말과 글이 아니라, 이렇게도 애쓰고 저렇게도 힘쓰며 추스를 말과 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고사성어#상말#우리말#한글#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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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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