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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간강사 3년차가 감히 푸념과 넋두리를 끄집어 내놓으려니 부끄럽다. 박사학위를 받은 지 십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암울한 비정규직 그늘을 묵묵히 수행하듯 걷고 있는 선배님들 앞에 우선 죄송하다. 그러나 침묵으로 일관해 온 사이 상아탑 내부의 고학력 비정규직 암운은 더욱 짙어만졌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학 당국은 그렇다 치자. 그동안 부끄러워서, 아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애써 외면했던 시간강사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반목과 갈등을 애써 피해 온 사이 고뇌와 주눅만 깊이 패이지 않았던가. 참여관찰자 입장에서 그들 주변의 애환을 미시적으로 풀어 나가고자 한다. 수많은 침묵자들의 관심과 결속을 위해.... 기자 말

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 캠퍼스가 또 다시 새내기들로 북적인다. 겨우내 냉기 가득하기만 했던 강의실이 신입생들의 오리엔테이션 열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내일 모레면 개강인데 교수 연구실마다엔 '부재중'이란 문패가 수두룩하다. "아직 외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국내 세미나 참석중"이라는 학과 조교들의 핑계는 틀에 박힌 듯 기계적이다.

"10여년의 보따리 강사(연구실 없는 시간강사들의 빈궁한 처지를 빗대어 부르는 말)가 오늘날 큰 밑천이 됐다"며 늘 여유로운 모습을 지어 보이던 교수님은 올해가 대학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안식년의 해라며 지난 연말 일찌감치 자취를 감추셨다. 물론 연구실도 텅 빈 채 휴가중이다.

한껏 부푼 새내기들의 설렘과 텅빈 교수 연구실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교차되고 있는 이 순간, 차가운 대학 교정의 뒷켠에 쪼그려 앉아 불안과 초조감에 휩싸여 있는 이들이 있으니 고학력 비정규직 시간강사들이다. 학기 초마다 폐강을 걱정하며 느는 빚 걱정에 고민 가득한 시간강사들에겐 성큼 다가선 캠퍼스 봄의 문턱이 멀기만 하다.

공무원 또는 대기업 취직과 거리가 먼 교양과목들은 갈수록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어렵게 교양과목을 한 학기 동안 배정받았다 하더라도 학교에서 정한 수강인원(50-60명)이 차지 않으면 그 과목은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폐강, 즉 사라지고 만다.

필자도 지난해 그런 황당한 경험을 당했다. 그러니 지방대에서 어렵게 박사학위를, 그것도 신설학과 1호 박사를 받았지만, 서울 또는 외국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님들이 죄다 차지하고 있는 '철밥통'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처지다.

박사과정을 마치자마자 "등고자비(登高自卑, 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를 강조하시던 그 교수님의 말씀이 귓가에 아직도 쟁쟁거린다. 이제 시간강사 3년차. 웬만한 기업이나 관공서에선 직급은 그렇다 치고 호봉과 급여 차이가 날 법한 연차다.

그러나 시간강사 신분은 3년차나 10년차나 호봉은 늘 제로다. 비정규직에다 계약직, 그마저 모자라 학생들의 선택이 없으면 시간강사직을 맡으나 마나다. 받는 임금도 학교에 따라 천차만별이거니와 과목 당 월 50만원 이상을 받았다는 소릴 아직 주변에서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현재 지방 국립대에서 받는 강의료는 고작 40만원 선이다.

연중 공사중, 유명인사 교수 위촉, '명박' 수여... 시간강사엔 "돈이 없다?"

시간강사를 노예로... 2007년 9월 7일부터 시간강사의 교원법적지위 회복을 위한 고등교육법개정안 상정을 위해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원들이 국회 앞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시간강사를 노예로...2007년 9월 7일부터 시간강사의 교원법적지위 회복을 위한 고등교육법개정안 상정을 위해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원들이 국회 앞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명옥

대학 시간강사들의 교원지위 부여나 강의료 현실화, 강사처우개선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대학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우리 대학은 돈이 없다." "법적으로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 대학은 국공립·사립을 불문하고 어디에서나 '공사중'이다. 지칠 줄 모르고 건축공사는 진행중이다. 그런데도 항상 돈이 없다고 한다. 매년 학생 등록금은 물가 상승률을 웃도는 비율로 인상하면서 늘 재정은 열악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치에 뜻을 둔 총장들은 사회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을 겸임교수나 외래, 초빙교수로 임명하곤 한다. 박사학위가 없는 지자체장, 또는 잘 나가는 기업 회장들에겐 아예 명예박사를 수여하여 그들의 명예와 노후문제까지 해결해 주곤 한다.

그러나 성실하게 등록금을 납부하면서 어렵게 학위과정을 마친 박사들에겐 교육은 위촉 하되, 교권은 부여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교원 지위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발생하는 극심한 차별은 정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힘 없는 시간강사들이 결사체를 구성하여 끊임없이 교원 지위를 부여해 달라고 수십년 동안 외쳐왔지만 국회와 정부, 대학 당국은 아직도 묵묵부답이다. 현재 대학교육의 절반 가까이를 대학 시간강사들이 담당하고 있지만 이들의 처우는 비명을 지를 정도의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 당국이 아니다.

또한 교과부나 그 어느 기관에서도 정확하게 현재의 대학강사 수를 말하지 않고 있다. 그저 추정치만을 내놓곤 한다. 말 그대로 이 대학 저 대학을 오가며 보따리 강사를 하는 이가 1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고, 중복된 숫자를 뺀 순수 전업강사는 5만명 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재정문제를 터놓도 논할 수 있는 근거 데이터이기 때문에 이 핑계 저 핑계로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다.

본분 망각하고 있는 대학들의 아비투스(habitus)가 문제

그들은 지금 무엇을... 시간강사 위촉기간을 단축하고 권한을 대학본부로 귀속시키려는 것에 반발, 한국비정규직노조 전남대학교 분회가 2004년 6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파업을 선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규봉 조선대 분회장, 조성식 전남대 분회장.
그들은 지금 무엇을...시간강사 위촉기간을 단축하고 권한을 대학본부로 귀속시키려는 것에 반발, 한국비정규직노조 전남대학교 분회가 2004년 6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파업을 선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규봉 조선대 분회장, 조성식 전남대 분회장. ⓒ 오마이뉴스 안현주

시간강사들에게 교원 지위를 되돌려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강사의 형태로 교수진을 무한정 고용해, 교육과 연구 양쪽 모두에서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대학들의 아비투스(habitus, 습속)가 문제다.

대학의 교양과목 중 7할 이상을 시간강사들이 담당하고 있다는 지적이 국감 때마다 제기돼 왔다. 시간강사로 전체 교양과목의 절반 가까이를 채우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교원확보로 교육과 연구를 위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대학'이라며 입학철마다 각 대학 홍보담당자들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시간강사들을 두 번 울리는 꼴이거니와 학생들에겐 명백한 허위 과장광고에 해당된다. 모 대학생이 한 인터넷 언론에 기고한 '대한민국 대학들의 죄목'에 관한 글이 인상 깊다.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아마 당국과 대학들이 보았다면 뜨끔했을 내용들이다.

그는 대학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목 중 교원도 아닌 시간강사로 교수진 절반을 채우면서 '최고의 교수진'이라는 과장 광고를 행한 죄가 크다는 것을 첫째로 지적했다. 둘째는 '최고의 교수진'을 약속하고서는 교원 지위가 없어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간강사를 대거 고용함으로써 학생과의 계약을 어긴 죄를 꼽았다.

셋째는 시간강사에게 교수실 등 필요한 지원을 해 주지 않아 학생들의 충분한 공부를 원천적으로 막은 죄, 넷째는 어떤 수업은 교원에게, 또 어떤 수업은 교원이 아닌 시간강사에게 맡겨 학생들이 평등하게 수업을 누리지 못하도록 한 죄, 다섯째는 시간강사를 고용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반사회적인 일을 저지르면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을 그 볼모로 삼은 죄가 해당된다는 것이다.

충분히 공감한다. 학생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주장대로 죄목은 충분하지만 처벌은 없다. 그 어떤 시도조차 없이 그들은 그저 상아탑의 음습한 그늘에 갇혀 있을 뿐이다. 결국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야 할 문제다. 결속해야 한다. 박사? 그깟 자존심 때문에 가족들을 모조리 굶길 순 없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간강사#보따리 강사#비정규직#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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