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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고도(古都)

 

.. 책방과 도자기상들이 드문드문 눈에 뜨이는 문화 도시이며, 성(城)과 문묘(文廟)가 곳곳에 있어 고도(古都)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  《최하림 쓰고 엮음-자유인의 초상(김수영 평전)》(문학세계사,1981) 36쪽

 

 ‘도자기상(陶瓷器商)’은 ‘질그릇집’이나 ‘질그릇 가게’로 손봅니다. ‘면모(面貌)’는 ‘모습’으로 다듬어 줍니다. ‘성(城)과 문묘(文廟)’를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적어 넣는데, ‘성과 공자무덤’으로 적어도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 고도(古都) : 옛 도읍

 │   - 경주는 신라의 고도이다

 │

 ├ 고도(古都)의 면모를 갖추고

 │→ 옛 도읍 모습을 갖추고

 │→ 옛 서울 모습을 갖추고

 └ …

 

 묶음표에 넣은 한자말 ‘고도(古都)’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국어사전을 뒤적이고서야 알게 됩니다. 그동안 이래저래 들으면서 ‘얼추 이런 뜻이겠거니’ 했다가 처음으로 뒤적였는데, 이렇게 찾아보니 비로소 환하게 뜻을 알 수 있네요. 그렇군요. 옛 도읍, 그러니까 옛날 서울을 가리키는 말이었네요.

 

 ┌ 옛서울 (o)

 ├ 고도 (x)

 └ 古都 (x)

 

 ‘옛 서울’을 한자로 옮기니 ‘古都’, ‘옛 古 + 서울 都’입니다. 새 낱말은 이렇게 짓는구나 싶으면서, “옛 서울이니까 ‘옛서울’로 적으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글쎄, 참말 ‘옛서울’로 적기는 힘들까요. 어려울까요. 안 되는 일일까요.

 

 ┌ 경주는 신라의 고도이다

 │

 │→ 경주는 신라 옛서울이다

 │→ 경주는 신라 때 서울이다

 │→ 경주는 신라 때 서울이던 곳이다

 └ …

 

 오늘날 우리한테는 땅이름 ‘서울’이 있기도 합니다만, 서울은 말 그대로 ‘서울’이고, 땅이름 서울도 말 그대로 ‘서울’입니다. 땅이름과 도읍을 가리키는 낱말이 헷갈릴까 싶어 ‘고도’라는 한자말을 따로 지어서 쓰지 않느냐 싶은데, 구태여 이렇게 할 까닭 없이, 두 가지 ‘서울’을 모두 사랑스레 껴안으면서 알뜰살뜰 잘 여미어 주면 한결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ㄴ. 체비지(替費地)

 

..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약 1000여 평 남짓한 이 땅은 서울시 체비지(替費地)입니다 ..  《전태일기념사업회 엮음-전태일 통신》(후마니타스,2006) 131쪽

 

 “약(約) 1000여(餘) 평 남짓한”은 “거의 1000평쯤 되는”이나 “얼추 1000평 남짓인”으로 손봅니다.

 

 ┌ 체비지(替費地) :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의 시행자가 그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   확보하기 위하여 환지(換地) 계획에서 제외하여 유보한 땅

 │

 ├ 서울시 체비지(替費地)입니다

 │→ 서울시에서 나중에 개발하려고 남겨 둔 땅입니다

 │→ 서울시가 묵혀 놓고 있는 땅입니다

 └ …

 

 ‘체비지’라는 말 뒤에 묶음표를 치고 한자를 넣습니다. 묶음표에 들어간 한자를 보며 ‘체비지’가 어떤 곳을 가리키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쯤 될까 생각해 봅니다. 한글로만 적어도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한자를 붙여 주어도 알아차리기 힘들고, 아예 한자로만 적는다 한들 알아차리기란 도무지 어려운 노릇입니다. 한자를 넣을 일이 아니라 뜻풀이를 넣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풀이도 그리 수월하지 않습니다. 부동산에서 쓰는 낱말인지 경제학에서 쓰는 낱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와 같은 낱말을 ‘전문 낱말’로 삼아서 쓰는 분들은 얼마나 잘 헤아리거나 알차리실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꼭 이런 낱말만을 지어서 ‘전문 낱말’로 삼아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 남긴 땅

 ├ 묵히는 땅

 ├ 그냥 두는 땅

 ├ 재워 놓는 땅

 ├ 빈땅 / 비워 놓은 땅

 └ …

 

 사람들한테 아직 낯선 낱말이기 때문에 묶음표를 치고 뜻풀이를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한테는 낯설기만 할 뿐, 살갗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낱말이 있습니다. ‘체비지’는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여느 사람들한테는 낯설기만 할 낱말, 삶으로 스며들지 못할 낱말이 아니랴 싶습니다. 그예 ‘전문 낱말’이니 이대로 두어야만 한다고 하지 말고, ‘전문으로 배우는 사람한테까지’ 한결 손쉽고 살갑게 느껴지고 다가갈 수 있게끔 새로우며 알맞춤한 낱말을 하나 엮으면 한결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끼리끼리 주고받는 말이 아닌, 너나없이 주고받는 말로. 저희끼리 쑥덕쑥덕하는 말이 아닌, 다 함께 어깨동무할 수 있는 말로. 몇몇 지식 권력자가 구름을 타고다니며 쓰는 말이 아닌, 우리들 누구나 이 땅에서 발디디며 즐겁고 신나게 쓸 수 있는 말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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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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