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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효산고 촛불 졸업식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듯 졸업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졸업식은 행사가 아닌 감동과 꿈을 주는 축제의 장이어야한다.
순천효산고 촛불 졸업식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듯 졸업은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졸업식은 행사가 아닌 감동과 꿈을 주는 축제의 장이어야한다. ⓒ 안준철

지난 11일 오전 10시 순천효산고등학교 효산관. 불이 꺼지자 갑자기 사위가 깜깜해졌다. 방금 전 내게 눈인사를 해온 제자 아이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짧은 이별(?)에 불과할 테지만, 잠시 후면 졸업식을 마치고 정든 교정을 떠나야 하는 제자로서는 긴 이별을 예감케 하는 일이기도 했으리라.

하긴 그렇다. 졸업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학생을 본 것이 어느 적 이야긴가. 그러니 이별 운운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공연한 수작으로 여겨질 법도 하다. 사실 숙연해야할 졸업식장에서 아이들은 무시로 떠들어대고 어른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졸업식장의 풍속도가 돼버린 지 이미 오래다. 

시상식 학교장상(좌)과 이사장상(우)을 수여받고 있다.
시상식학교장상(좌)과 이사장상(우)을 수여받고 있다. ⓒ 안준철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감동이 사라진 학교에서 지루한 형식과 소음으로 남아 있을 뿐인 졸업식을 폐기처분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마음이 한없이 우울해지지만 때로는 이런 어둡고 슬픈 생각이 희망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밤이 깊어져야 아침이 오듯이 하나의 촛불이 켜지기 위해서는 잠시 어둠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불이 꺼지고 음악이 흐르자 소란스럽던 장내가 일순 고요해졌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불 하나가 살아나고, 그 불빛들이 점점 번져나갔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담임선생님들에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졸업생들에게 촛불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사회자의 개회 멘트와 함께 드디어 아이들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아름다운 촛불 졸업식이 시작된 것이다.  

축하공연 선배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후배들이 정성껏 준비한 공연마당.
축하공연선배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후배들이 정성껏 준비한 공연마당. ⓒ 안준철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듯 졸업은 하나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졸업생 여러분들이 3년의 과정을 마치고 정든 교정을 떠나는 날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슬프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가슴 설레는 일이기도 합니다.

촛불은 자기희생의 상징입니다. 자기희생은 값진 것이지만 괴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여러분을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아픈 세월을 감내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제 몸을 태우면서도 너울너울 춤을 추는 촛불처럼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보내고 싶을 것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되듯 졸업은 하나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오늘 졸업식이 무미건조한 행사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출발 앞에서 숙연하게 마음을 다지는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해봅니다.”

 2학년 여학생들의 졸업축하 퍼포먼스
2학년 여학생들의 졸업축하 퍼포먼스 ⓒ 안준철

그렇다. 그것은 오랫동안 하나의 소망이었다. 그저 소망일뿐이었다. 대안학교도 아닌 일반학교에서 과연 촛불 졸업식이 가능할까? 어르신들의 차지였던 졸업식장의 무대를 학생들의 공연무대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학생들이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고 꿈꾸는 숙연하면서도 신명나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우려 속에서도 마음에 소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준비해준 선생님들 덕분에 촛불 졸업식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졸업장 수여와 각종 시상, 그리고 축사와 격려사가 차례대로 진행되는 동안에도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로 떠들어대던 예전 아이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촛불을 들고 후배들이 준비한 공연을 감상하고 있던 한 아이의 옆모습을 사진기에 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오늘 어때? 졸업식 마음에 들어?”
“그럼요. 이렇게 멋진 졸업식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순천효산고 촛불졸업식  아이들은 촛불을 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순천효산고 촛불졸업식 아이들은 촛불을 들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안준철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무대로 눈길을 돌리는 아이를 따라 나도 무대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2학년 여학생들의 축하공연이 막 끝나고 자막에는 ‘영상편지’라는 글자가 보였다. 학부모가 자녀에게 띄우는 영상 편지였다. 후배들의 신나는 축하공연에 잠시 떠들썩했던 장내가 다시금 조용해지더니 음악과 함께 사회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을 세상에 내 보내준 부모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고귀한 생명을 주시고,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마음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공기가 많은 곳에서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우리는 고마운 부모님의 존재를 잊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일찍 부모님을 여윈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부모님이 남기신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 또한 기뻐할 일일 것입니다. 오늘 졸업식을 맞이하여 준비한 영상편지를 통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졸업축하 퍼포먼스  촛불졸업식은 <아름다운 학교만들기>의 일환으로 학교 행사로서가 아닌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하나의 교육과정으로서 기획되었다.
졸업축하 퍼포먼스 촛불졸업식은 <아름다운 학교만들기>의 일환으로 학교 행사로서가 아닌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하나의 교육과정으로서 기획되었다. ⓒ 안준철

영상편지에 이어 송사와 답사. 교복 물려주기, 추억 만들기 퍼포먼스 등이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문득 무대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 어른들에게 눈길이 갔다. 예년 같았으면 무대 위 높은 자리에 앉아계실 분들이었다. 어린 학생들에게 자리를 내주고도 즐겁기만 한 듯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드디어 졸업식 행사가 끝나고 학생들은 담임선생님과의 아쉬운 석별의 시간을 가졌다.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까마득해 보이는 내 학창시절처럼 눈물을 흘리는 아이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환한 이별의 순간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그런 아름다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졸업식 이모저모  무대에서 학생들의 공연과 퍼포먼스, 그리고 교복물려주기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 아래에서는 어른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관람하고 있다.
졸업식 이모저모 무대에서 학생들의 공연과 퍼포먼스, 그리고 교복물려주기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 아래에서는 어른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관람하고 있다. ⓒ 안준철

사진기를 챙기고 있는데 1학년 때 내게 영어를 배운 한 아이가 내게로 다가왔다.

“선생님 저하고 사진 한 장 찍어요.”
“그럴까? 그런데 오늘 어땠어? 좋았어?”
“그럼요. 너무 좋았어요. 우리 학교 정말 짱이에요!”

제 27회 순천효산고 졸업장 수여식  관광경영과 3-1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빛나는 졸업장을 전해 받고 있다.
제 27회 순천효산고 졸업장 수여식 관광경영과 3-1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빛나는 졸업장을 전해 받고 있다. ⓒ 안준철


#순천효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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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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