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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오래된 사진이 모두 빛 바래 사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이 안타까워 스캔 작업으로 복원했다.
ⓒ 윤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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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생존하셨을 때 두 분이 함께 찍은 딱 한 장의 사진입니다.
부모님 생존하셨을 때 두 분이 함께 찍은 딱 한 장의 사진입니다. ⓒ 윤도균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앞으로 4년 후면 나도 고희를 바라보건만, 늦게 철이 든 탓인지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을 때마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간다. 그렇게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만나길 갈망하다 보면, 가끔 꿈에서 부모님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꿈에서 만난 부모님과는 살가운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처럼 일상적인 대화만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그새 잠에서 깬다. 비몽사몽간에 다시 눈을 감고 꿈속에서 뵌 부모님 모습을 상상해 보지만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면 마음 한 켠이 텅빈 것처럼 허전하고 안타깝다. 사진이라도 한 장 있으면 좀 덜 서운하고 덜 그리우련만, 문갑 속에 깊이 처박아둔 몇 권의 빛 바랜 사진첩을 뒤져봐도 부모님 사진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난 '내가 이러고도 부모님을 그리워할 자격이 있는 놈일까'라고 자책한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나였건만, 왜 부모님 모습은 단 한 컷도 카메라에 담지 않았는지….

지난 설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날, 그렇게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며 문갑 속 흑백앨범을 보다 문득 '대부분 사진들이 30~40여년 지나 이대로 뒀다간 얼마 안 돼 그나마 보관하고 있는 사진들도 모두 폐기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이 사진들만이라도 스캔작업으로 복원해 우리 가족 인터넷 카페에 올려놔야 겠다고 생각하곤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작업을 하던 중 형이 부모님 사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형수에게 전화를 했다.

"형수님, 혹시 형님 댁에 부모님 흑백사진이나 가족들 오래된 사진들이 남아 있는 것 있어요?"
"아마 몇 십 장은 있을 거예요."
"형수님 바쁘시지만 그 옛날 흑백 사진들 좀 챙겨 두셨다가 이번 설 명절 때 제가 달라면 주세요. 제가 부모님 사진과 가족들 빛 바랜 오래된 사진들을 스캔작업으로 복원한 뒤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사진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아버지의 독사진은 딱 이 사진 한 장 뿐이다. 비록 사진은 빛바래고 볼품이 없지만 우리 자식들에겐 그 어떤 작품 사진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버지 사진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아버지의 독사진은 딱 이 사진 한 장 뿐이다. 비록 사진은 빛바래고 볼품이 없지만 우리 자식들에겐 그 어떤 작품 사진 못지않게 중요하다. ⓒ 윤도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설날 아침. 부모님과 조상님들에 대한 추도예배를 끝내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떡국을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엔 한창 재롱을 부리는 손자들에게 세배도 받았다. 이후 고향 땅 선산에 잠들어계신 부모님과 조상님들을 만나뵈러 가족납골묘로 떠났다. 가족납골묘로 떠나기 전, 형수님께 사진을 넘겨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빛이 바랜 부모님과 가족사진을 일일이 스캔해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을 진행하며, '왜 진작 포토샵을 배우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랬으면 부모님의 빛 바랜 사진을 좀 더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사진 복원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 우리 가족 인터넷 카페에 포토앨범으로 편집해 올려놓았다. 이렇게 올려 놓으면, 그동안 나 못지 않게 늘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우리 형제·자매들과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는 조카들도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 사진 복원 기념으로 하늘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께 편지를 써본다.

아버지·어머니!

우리 가정은 두 분께서 돌아가신 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첫째는 자식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우리 가족이 피난 나와 살던 제2고향마을(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우리집 밭 한편에 묘를 모셨습니다.

그 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아버지 곁에 합장이 아닌 분묘로 모셨습니다. 그러다 우리가 살던 고향마을 전체가 통일동산 조성계획으로 개발 대상이 되어 부득이 아버지 어머니의 묘소를 다시 아버지의 본 고향이신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용산동 선영 양지바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엔 우리가족 납골묘(48기용)도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향 종중산 이 골짝 저 골짝에 산재되어 매장으로 모셨던 조상님들의 묘를 모두 개장 후 화장한 뒤 우리가족 납골 묘에 합동 안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6대조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어머니, 큰형님, 작은형님을 포함, 13분의 납골이 한 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고희 때 방문하신 가족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은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 고희 때 방문하신 가족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은 것 같다. ⓒ 윤도균

우리 가족납골묘를 조성하는 현장을 지켜보시던 고향 어르신들 그리고 인근 주민들은 우리 형제들이 추진하는 납골 묘 조성 과정을 일일이 지켜보시면서 어떤 분은 격려를, 어떤 분은 '조상 묘는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뜻으로 우리 가문 합장납골묘(48기용)를 조성했습니다. 그 후 돌아가신 두 분 형님들도 부모님 곁에 모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동안 고향 선산 이 골짝 저 골짝 곳곳에 산재돼 있던 조상님들의 묘소 관리가 사실상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매년 (설명절, 추석, 한식 춘향제, 벌초, 기일) 때면 늘 온 가족이 납골 묘를 찾아 부모님과 조상님들께 성묘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어머니.

오늘 두 분의 생존하셨을 때 찍은 빛 바랜 사진들을 다시 복원해 먼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가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젠 하늘나라에 두 분 더욱 다정다감하신 모습으로 고이 잠드소…. 아버지 어머니의 자식 됨을 거듭 거듭 기쁘게 행복하게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어머니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현재 모두 13분의 납골이 안장된 우리가족 납골묘이다.
현재 모두 13분의 납골이 안장된 우리가족 납골묘이다. ⓒ 윤도균


#부모님 #우리가족 납골묘 #고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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