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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새해가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연장될 뿐이야"

컨테이너 안에서 휴대용 버너로 분주히 아침 겸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윤종희 조합원이 웃었다. 오석순 조합원은 "꿀꿀하죠, 뭐. 아무 기분 없어"라고 쓴 입을 다셨다. '새해'라는 말이 나오자 떠들썩하던 컨테이너 안이 일순 잠잠해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합원들은 이내 시끌시끌했다. 다른 투쟁사업장의 연대 일정시간이 다가오자 작은 컨테이너 안에서 옹기종기 모여 급히 나눠먹는 식사의 조금 부족한 맛에 "달다", "후추를 넣어달라" 등의 요구가 양념으로 곁들여진다.

출근투쟁을 마치고 금천구 가산동 컨테이너 안에서 늦은 식사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출근투쟁을 마치고 금천구 가산동 컨테이너 안에서 늦은 식사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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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 속에 삶은 살아지지만, 그래도 우리가 새해를 굳이 기념하고자 애쓰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그런 소박한 기대 말이다. 그러나 태양은 어디나 똑같이 비치지만 삶은 그렇게 공평하지가 않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구정을 앞둔 지난 23일,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을 만났다.

4년째 거리에서 맞는 새해

2005년 8월에 시작했던 투쟁이 어느덧 1251일차. 벌써 4번째 새해를 거리에서 맞이한다. 명절연휴가 다가와도 아무 감동이 없을지언정, 지나온 시간 어느 하루 치열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새로이 마음을 벼려야 할 새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투쟁 1249일차인 1월 23일 오전, 출근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조합원들.
 투쟁 1249일차인 1월 23일 오전, 출근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조합원들.
ⓒ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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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기계처럼 일하고 한 달에 64만1850원을 받고도 그 돈이 많은지, 적은지도 모르고 소처럼 묵묵히 일했던 그들이었다. 아파도 쉬지 못하고, 떠든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동료도 있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면 그게 해고였다.

그들이 가서 그렇게 일했던 곳은 기륭전자였지만, 서류상 속한 회사는 낯선 파견업체였다. 좀 더 나은 상황에서 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노조를 만들자 사측은 뭉텅이 해고로 답했다. 그렇게 맞서기 시작한 날들이 어느새 1000일을 훌쩍 넘기게 됐다. 여기서 해결하지 못하면 어디에 가서 일하나 마찬가지라는 생각, 그들은 '다시 일하기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도 그들은 거리에 서야 했다. 그들을 만난 23일 오전은 한파주의보가 발령된 날이었다.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라고 했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한 듯했다.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이 너무 아파 살 한 점 보이지 않도록 옷깃을 여며 매었지만, 몸을 제대로 펴고 서 있는 것도 힘든 추위였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계속되는 출근투쟁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기륭전자 신사옥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기륭전자 신사옥
ⓒ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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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에 자리 잡은 기륭전자 신사옥은 새로 지은 건물답게 깔끔하고 단정했다. 당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건물 앞에 오전 7시 50분경 하얀색 다마스 승합차가 섰다. 곧 이어 차 안에서는 '정규직화 쟁취 노조탄압 중단 위장도급 철회'라고 적힌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차 문을 열고 나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두꺼운 외투 바깥으로 걸친 새빨갛던 조끼는 시간에 닳아 색이 빠지고 나긋나긋하게 낡아 있었다.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들은 오늘처럼 거리에 서 있었다. 매일 아침 7시 50분이면 그들은 신사옥 앞에서 '출근투쟁'을 한다.

'불법파견 판정났다 직접고용 정규직화 실시하라', '현대판 노예제도 비정규직 철폐하자' 등의 손피켓을 들고 출근투쟁을 벌이며 서 있는 조합원들 뒤로 기륭전자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건물 앞에 선 여린 몸의 조합원들은 살을 에는 추위에도 의연하기만 했다.

한 시간 가량의 출근투쟁이 끝나자 그들은 다시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컨테이너로 돌아와 몸을 녹였다. 기존에 있던 기륭전자 사옥 터는 벌써 건물이 다 헐려 흙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조합원들의 컨테이너는 여전했다. 94일 단식을 마친 김소연 분회장은 여전히 씩씩하다. 건강은 어떤지 물으니 "보시다시피 아주 좋아요"라고 말한다. 단식보다는 보식이 더 중요할텐데, 병원에도 가지 않고 죽만 먹으면서 몸을 추스르고 있단다.

"아~ 정말 부럽다"

가족들은 그들의 투쟁에 으레 '익숙함'으로 응원을 대신하는 듯했다. "가족들이요? 신경 안써요. 뭔 할 말이 있겠어요. 말없이 바라보죠"라던 김소연 분회장의 말을 이미영 조합원이 "잔소리도 이제 지쳤겠죠"라고 받는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또 잠시 조용해진 분위기에 유흥희 조합원은 "투쟁 시작하는 데 가서 물어보면 명절이니까 할 말 많을 것"이라며, "이런 질문도 5년째 되니 할 말이 없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는다. 지금 그대로의 상황을 인정해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족들이 그들을 품어주는 방법일 것이다.

작년 한 해, 함께 싸웠던 많은 사업장들이 현장으로 복귀했다. 그 과정에 있어 석연치 못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이랜드, 코스콤, 그리고 최근까지 굴뚝농성을 벌였던 울산미포조선(용인기업)이 사측과 타결을 통해 다시 일하게 됐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잘됐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윤종희 조합원은 "그냥 부러운 게 아니라 '아~ 정말 부럽다'야"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반 사람들은 믿을 수도 없는 긴 시간, 정말이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서 싸웠다. 최장 94일 단식을 비롯해, 수많은 단식을 했고, 삭발을 하기도 했다. 기륭전자에 수주를 주고 있는 미국 시리우스 본사에 원정투쟁도 가고, 높은 철탑에 위태로이 몸을 부리기도 여러 번. "죽는 거 빼고 다 해봤다"는 말은 허튼 말이 아니었다. 김소연 분회장은 "죽는 거 빼고 다 해봤다고 하지만, 뭐 거의 죽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정규직법 개정안,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뜻"

지난 여름 94일 단식 했던 김소연 기륭전자분회 분회장
 지난 여름 94일 단식 했던 김소연 기륭전자분회 분회장
ⓒ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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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분회장은 최근 노동부에서 입안을 준비하고 있는 '비정규직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개정안은 현재 비정규직 보호법에 의해 2년으로 제한된 비정규직 근로자 사용제한 기한을 4년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 분회장은 "이제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뜻"이라며, "정상적인 고용형태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비정규직이라도 좋으니 일하게 해달라'는 노동자들도 있지만, 지금 같은 경제 위기에 구조조정이라도 들어가면 해고 0순위에 놓이는 것이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렇기에 비정규직 '보호'라는 이름 아래 '해고의 자유'를 보장하는 개정안에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김 분회장은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비정규직을 고용하면 안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며 "단순히 기륭 문제뿐 아니라 우리가 기륭말고 다른 회사를 가도 비정규직이 될테고, 그것 때문에 싸우고 있는 건데 반복돼서는 안된다"고 했다.

하루하루 최장기 투쟁기록을 갈아치우며 오랜 시간 싸워 온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본인들의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여성 비정규직의 상징'이 되었고, 원하든 원치 않았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라는 커다란 짐을 얹고 있었다. 김 분회장은 "올해는 우리뿐 아니라 경제위기와 공항국면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질 것"이라며 "우리의 문제만이 부각되긴 어렵고 그것도 적절하다고 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 어려움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묻고 투쟁할 때"

이어 "많은 분들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미리 포기하거나, 싸운다고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가질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더 어려워지기만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가 어려우니까 우리가 뭘 양보 해야지가 아니라 이 어려움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그 책임을 분명하게 묻고 투쟁할 때"라고 생각한다며, "기륭문제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의지를 다졌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던 기륭전자 구 사옥은 헐렸지만, 그 앞에는 여전히 조합원들이 새해를 보낼 컨테이너가 있다.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던 기륭전자 구 사옥은 헐렸지만, 그 앞에는 여전히 조합원들이 새해를 보낼 컨테이너가 있다.
ⓒ 장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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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륭전자 측과의 교섭은 전혀 이뤄지고 있는 상태다. 사측은 "교섭도 타협도 없다. 법적으로 하겠다"며 계속 고소와 고발을 걸고 있다. 작년 한 해, 수많은 뉴스를 만들어내며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됐던 기륭전자에 쏟아지던 관심이 사그러진 요즘, 다소 섭섭할 수 있을텐데도 조합원들은 여전히 씩씩하다.

시민들의 일상적 결합은 줄었지만, 지지하는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테다. 기륭전자가 신사옥으로 옮기고 출근투쟁을 하던 초반만 해도 주변의 아파트로부터 민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항의하는 이들은 없었다고 한다. '어려움은 알지만 시끄럽다'던 주민들은 그래도 "힘내라"고 조합원들을 다독인다고 했다.

설 연휴 기간에도 이들은 집 대신 컨테이너를 돌아가면서 지킨다. 희망과 기대가 어울리는 새해지만, 이들에겐 달력의 검은 숫자와 다를 게 없는 일상이고 하루하루다. 묵은 해를 보냈지만, 또 다른 투쟁이 기다리고 있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새해라고 꼭 희망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절망을 똑바로 마주볼 때, 새 희망도 만들 수 있을테다. 새로이 맞이한 한 해, 올해는 기륭전자 조합원들의 현장복귀 뉴스가 기쁨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태그:#기륭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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