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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 <아자젤의 음모> 겉표지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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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외경인 <에녹서>에는 타락한 천사 아자젤이 소개된다. 아자젤은 사람들에게 온갖 나쁜 짓을 가르친다. 남자들에겐 전쟁하는 법과 무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여자들에게는 화장하는 법과 낙태하는 것을 알려준다.

아자젤과 함께 인간도 타락한다. 남자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서로 죽이고, 여자들은 남자를 유혹한다. 그 결과로 생겨난 생명체는 낙태를 통해서 없애버린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자젤은 반항적인 데몬이고 추방당한 영혼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었다면, 아자젤은 악을 던져준 셈이다.

러시아 작가 보리스 아쿠닌의 소설 <아자젤의 음모>에서는 아자젤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이거나 강물에 빠뜨려 죽이면서 '아자젤!'을 외친다.

때는 1876년의 늦은 봄, 사건의 시작은 기이한 자살로부터 시작한다. 모스크바의 한 대학생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공원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서 자살한다. 이 자살은 이상한 점 투성이다. 권총의 실린더에는 총알이 한발만 들어있었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이 젊은이는 권총을 쏘기 전에 실린더를 돌렸다고 한다.

공원에서 권총 자살하는 젊은이

그러니까 '러시안 룰렛'처럼 한발만 들어있던 총알이 우연의 일치로 발사된 것이다. 이 대학생은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다. 인생을 즐기면서 대학생활을 할 수도 있는 젊은이가 어울리지 않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한 조사는 경찰서에 근무하는 14등관 서기 에라스트 판도린에게 맡겨진다. 판도린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먹고 살기 위해서 14등관 관리 시험에 합격한 21살의 젊은이다.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꼼꼼하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 큰 키에 용모도 단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판도린은 이 사건의 조사를 시작하지만 많은 것들이 의문이다. 자살한 남자는 영국에서 건너온 한 자선사업가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넘기는 유서를 남겼고, 그의 주변에는 악마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여인 아말리야가 있다.

남자의 자살과 이 여인이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판도린은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말리야에게 접근하지만 이 또한 쉽지가 않다. 그녀의 주변에는 온갖 남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아말리야와 말할 기회를 잡는 것조차 어렵다.

그러던 중에 아말리야를 추종하는 한 젊은 남자가 살해당한다. 함께 현장에 있던 판도린은 살인자가 '아자젤'이라고 작게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이상한 자살과 살인은 모두 아자젤과 관련된 어떤 단체가 주동하는 일인가?

판도린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때로는 칼침을 맞고 때로는 권총으로 위협당하면서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 사건은 단순하게 정신나간 사람들의 소행일 수도 있고 당시 러시아에 만연했던 니힐리스트들의 테러일 수도 있다.

혁명을 꿈꾸는 지하단체가 거론되기도 하고,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서 벌인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으로 봐야한다는 주장도 생겨난다. 간단하게만 보였던 살인과 자살이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음모로 부각되는 것이다. 판도린도 더욱 바빠진다. 모스크바를 떠나서 유럽을 돌아다니고 영국으로 숨여들면서 조금씩 진실을 파헤쳐 간다.

아자젤의 정체는 무엇일까

작품에 등장하는 한 여인은 아자젤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자젤은 악마가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이자 계몽가의 위대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사람들을 만든 뒤에 그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람들은 너무나 약하고 맹목적이어서 신의 나라를 지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영웅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예수는 인간에게 도덕의 핵심을 주었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아자젤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가르쳐 주었다고 주장한다.

아자젤 덕분에 남자는 가정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여자들은 수태하는 암컷에서 선택의 자유를 갖는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신은 인간에게 카드를 던져주었고 아자젤은 카드를 해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아자젤은 타락천사일까 아니면 가리워진 영웅일까.

<아자젤의 음모>는 에라스트 판도린이 활약하는 시리즈의 첫번째 편이다. 보리스 아쿠닌은 '모든 양식의 추리소설을 써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에 맞게 이어지는 작품들 속에서 판도린의 모습도 바뀌어갈 것이다. 조용히 사색하는 탐정, 주먹을 휘두르며 거리를 뛰어다니는 터프 가이, 또는 영리한 스파이 등.

19세기의 러시아가 주무대인 만큼 당시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거리와 사람들도 흥미롭게 묘사된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주인공인 판도린이다. 이어지는 작품들 속에서 판도린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아자젤의 음모> 보리스 아쿠닌 지음 / 이항재 옮김. 황금가지 펴냄.



아자젤의 음모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항재 옮김, 황금가지(2008)


태그:#아자젤의 음모, #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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