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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이범석의 변질

장준하는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몇 달 전 김구의 경교장에서 나왔다.

"선생님, 아무래도 이곳은 젊은 제가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침 이범석 장군이 족청(조선민족청년단) 일을 도와 달라고 하십니다."
"하기야 장 목사는 바삐 활동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체질이었지. 임시정부 각의실에도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파벌을 깨라고 소리 질렀었잖아."

김구는 장준하가 신학교에 다녔다고 해서 애칭으로 장 목사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 그는 어설프게 빙긋 웃으며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고뇌가 묻어 있었다.

"차라리 그때가 그립네."

김구의 눈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중경에서도 답답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철기(이범석의 호)를 따라 가더니만."

김구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애국 청년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무대 하나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나로서는 면목이 없네."

장준하는 민족청년단의 요직인 교무처장을 맡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열흘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이범석에게 그만둔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나왔다. 그는 일부러 족청단복을 벗어 자리에 반듯하게 개놓고 나왔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족청은 순수한 애국청년단이라고 해서 간 것이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족청은 세력 확대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의 오합지졸 집단에 불과했다. 족청은 이승만의 지시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사실 공산당은 장준하의 생리에 맞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친일파가 공산당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일 수가 있는 것인지 그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범석은 옛날의 독립군 지대장이 아니었다. 장준하는 서안에서 특공대를 파견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범석이 자신과 김준엽 두 사람을 뺐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김구가 왜 그리도 족청에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범석도 장준하를 다시 찾지 않았다. 이후 장준하는 이범석이 이승만 독재의 수하 노릇을 하게 된 다음에는 아예 그의 기억을 뇌리에서 지워 버렸다.

나는 목회자의 인격이 아니다

장준하의 아내와 부모는 월남하여 함께 살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생각해야 했다. 장준하는 임주호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주호의 예상대로 남북에서 제각기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민족의 분단은 고착되었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안 김구와 김규식 등이 노약한 몸으로 남북 합작을 시도하고 있지만 장준하는 이제 남북협상에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장준하는 출판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미뤄 놓았던 신학교를 마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원효로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하여 6개월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는 졸업장을 받는 날 자신은 목회가 어울리지 않는 인격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졸업식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온갖 관심이 쏠려 있었다.

유엔 한국위원단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김구의 임시정부는 5· 10 남한 총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국회에는 임정의 노선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상당수 진출했다. 더구나 국민 여론은 친일파를 청산하는 데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국회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결성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국회 내 지지 기반이 취약했다. 그리고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특위 구성에 찬성한 의원들도 많았다. 그래서 반민특위는 의외로 쉽게 결성될 수 있었다. 반민특위를 주도한 것은 주로 임정 출신의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평화적 남북통일 전취와 균등 사회 건설에 초연 매진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임시정부의 친일 청산 이념을 담고 있었다.

사실 임시정부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친일파 청산의 지침을 세워 놓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른바 반민족 행위자 7가살(七可殺)을 선언, 죽여도 되는 일곱 가지 유형의 처단 대상을 정해 놓았다.

1. 일본인 2. 매국적(賣國賊) 3. 고등경찰, 형사, 밀고자 4. 친일부호 5. 적의 관리 6. 불량배 7. 배반자

또한 1941년에 임정에서 발표한 건국강령에는, 적에게 부화(附和)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리고 1945년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8월과 9월에 발표한 '당면정책'에서 다시 친일 청산 지침을 천명했다.

1.적산은 무조건 몰수 후 국유화한다.
2.매국적(賣國賊)과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는 징치한다.
3.봉건 파시스트들의 반민주주의 경향을 숙청한다.

장준하는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상덕을 잘 알고 있었다. 김상덕은 장준하와 함께 중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 임정 문화부장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출마해 제헌국회에 입성했다. 따라서 그의 친일 청산 이념은 대체로 임시정부의 것을 계승하고 있었다.

반민특위는 국민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활동에 돌입했다. 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시작으로 이광수, 최린 등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진행했다.

친일파들의 변명과 자기 합리화

장준하는 그들이 법정에서 행한 변명을 읽으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장준하는 자기 나름대로 친일파들이 하고 싶은 말은 어떤 것일는지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런 데라도 조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면 들어가서 발언권을 얻으려 하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나는 창씨를 하지 않았다.(비행기 헌납자, 동척 간부 박흥식)

3·1 운동 당시 나는 집에서 만세를 부른 사람이다. 내가 고문을 했다고 증언하는 저 사람은 정신병자이다.(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진 65세 노인 강우규 의사를 고문한 고등경찰 김태석. 별명 고문왕)

나는 만주에 가서 공산당을 때려 부수고 민족운동의 체계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았다.(밀정 이종형)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는 아니었지만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나는 조선 민족이 대 위기에 있음을 느끼고 일부 인사라도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 줌이 민족의 목전에 임박한 위기를 모면할 길이라 생각하고, 기왕 버린 몸이니 이 경우에 희생이 되기를 스스로 결심하였다. 1년 만 더 해방이 늦었어도 우리는 모두 황국신민이 되었을 것이다.(이광수)

민족의 한 사람으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큰 수치라. 내 이제 그 지탄을 받고, 또 거기 이유가 없지 않으나, 다시 무슨 입과 혀를 놀려 감히 시비의 죄를 논하랴. 나는 반생 행적을 돌아다볼 때 토막토막의 실패, 죄다 어리석음에서 온 것을 얼른 사과한다.

까마득하던 조국의 광복이 뜻밖에 실현하여 이제 민족정기의 호령이 굉굉히 이 강산을 뒤흔드니 누가 이 앞에 숙연히 옷자락을 여미치 않을 것이냐? 오직 공손히 법의 처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채찍을 감수함으로써 조금만치라도 국민 대중 앞에 참사의 충정 표시를 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최남선)

모든 것을 오늘에 와서 본다면 나의 과거 행동은 진정 잘못된 것임을 통감하며 민족 앞에 무릎을 꿇는 바입니다. 변변치 못한 최린이나마 기미년 3·1운동 당시 일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자라로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였으니, 이 죄는 죽음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다만 민족정신의 요람인 천도교를 지키기 위해 나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최린)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오래 안일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더러운 욕망은 하필 오늘의 나의 철학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내가 만고불변의 철칙으로 알고 지켜온 나의 확신입니다. 나는 이 순간에 나의 확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한일합방 때 절개를 지킨 애국자의 자손들이 곤궁하게 살고 있는데 친일파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일제시대에 그들에게 아부한 사람들은 잘 살았고 그 자손들도 좋은 교육을 받아 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나는 일제 때 그들에게 붙어서 민족의식을 상실한 것을 해방 직후에는 부끄럽게 생각했었으나, 그 뒤 얼마 안 가서 나의 일제 행각에 대한 정당한 변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시세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었지요.(이항녕, 1980년, <조선일보>, '나를 손가락질 해 다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 선언이 있을 걸 짐작이라도 했다면 이 몇 해 안 되는 동안 어떻게 해서라도 숨어 살 길이라도 찾아보았으리라. 그러나 당시의 나는 적어도 몇 백 년은 일본의 지배 속에 아리고 쓰리나 견디고 살 수밖에 없다는 체념 하나 외에는 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때 우리 겨레의 다수의 실상이었다고 나는 회상한다.(서정주, 1992년 신문 인터뷰)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반민특위, #7가살, #김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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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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