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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으로 죽음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따뜻했던 오월의 늦은 밤, 황금 같은 주말에 삼촌의 영혼은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누워있던 그를 지탱해주던 산소 호흡기에 더 이상 희망을 걸기는 어려웠다. 그 무엇도 그를 이쪽으로 끌어올 수 없다는 절망의 상황에서 의사가 내민 것은 산소호흡기 포기동의서였다. 사실상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그 종이쪽지 하나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고, 이내 곧 주저앉아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최근 전 세계 상황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 때 기억이 떠오른다.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우리 경제도 그만 앓아누워 버렸다. 원인 분석이 마땅치 않으니 치료방법도 효과적이지 못하다. 빠른 시간 내에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그렇다고 또한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섣불리 갖기도 쉽지 않다. 자영업자들은 비명 소리마저 들어간 채 탄식만 거듭하고, 월급 받는 직장인들도 불안하긴 매한가지다.

 

영미식 금융자본주의의 몰락은 이미 현실화되었고, 괴물처럼 성장하던 증권가에는 싸늘한 바람만이 떠돈다. 펀드에 희망을 걸었던 많은 이가 본전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 탓에 숨죽여 울고 있다. 반면 현 정권은 바로 앞의 위기에만 눈이 멀어 얄팍한 단기치료만을 거듭하며 많은 이의 원성을 사고 있다. 2009년의 경제 전망 역시 밝지 않은데, 정부의 대응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의 한숨이 꺼질 것 같지는 않다. 끊임없는 경쟁과 무한 성장, 선택과 배제를 통한 '하드보일드 라이프'가 주는 행복은 결국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에.

 

최근 '생각의 나무'에서 출간된 앙드레 고르의 <에콜리지카>는 현 상황에 대한 철저하고도 예리한 분석은 물론, 현실적인 가능성의 대안을 보여주는 책이다. 2007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 전, 그 스스로가 구성하고 뽑은 글로 구성한 그의 이 대표작은 단도직입적으로 현 자본주의가 재생불능이라고 선언한다.

 

"불황의 위협, 나아가 세계경제에 무겁게 드리운 붕괴의 위협은 규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재생불능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본문 30쪽)

 

지난 날,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네

 

앙드레 고르의 이 저작을 다 읽고 나면 깨닫는 것이 하나 생긴다. 우리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본주의의 희망찬가를 불러왔다는 것. '자본'을 위해 기꺼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불살랐지만,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브레이크 없는 차를 탄 채 비탈길에 다다랐다는 것, 우리가 근근이 버티고 있는 이 상황이 실은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삶과 죽음의 애처로운 갈림길이었다는 사실을. 이윤 추구를 위한 무차별 개발에 대한 욕망,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끊임없이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게 현실이다.

 

저자의 말을 참고로 살펴보면 현 정권은 무한성장에 중독되어 있는 상황이다. 현 대통령이 시울 시장 재직 때 청계천을 뒤집어엎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그는 성장 실적을 위해, 세계 일류를 위해서라면 강이라도 뒤엎을 것처럼 보인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는 무한 경쟁을 유도해 '선택과 배제' 생존법칙을 가르치려고 하고, 언론에게는 다른 말 못하도록 탄압에 들어갔다. 무한 성장에 취한 그들에게 다른 의견은 배제 대상일 뿐,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법칙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언론이든, 사람이든 장악에 나서 어떻게든 모두를 똑같이 취하게 한다. '성장'이라는 마약에 홀릴 수 있도록, 그 허황된 가면과 거품에 도취되어 진실을 알 수 없도록. 경제 불황을 그들은 되레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폐해는 다름 아닌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도의 소비문화는 이미지와 마케팅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는 실제로 많은 회사에서 떠들어대는 말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현 시대를 '마케팅의 시대'라고 정의하며 광고에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 유명 배우와 명품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기업에게 사람들은 피가 흐르는 생물체가 아니다. 단지 '소비자'일 뿐이다. 언론과 기업은 사람들에게 충분함과 만족함을 앗아가 버렸다. 끊임없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언가 필요할 수 있도록, 그래서 지갑이 텅 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결국 지상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결말은 공허하다는 게 현실이 되는 걸까. 지난 날, 우리의 불꽃놀이는 유난히도 화려했다. 축제가 그 종말을 우리에게 예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그저 거대한 괴물에 이끌려가는 부속품일 뿐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괴물.  

 

공동협력 자율생산, 경제위기의 구원투수 될 수 있나

 

현 시스템의 문제점을 분석하며 저자가 내딛는 곳에는 '탈(脫)성장'이 있다. 이 의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의견이 기존의 것과 구분되는 점은 바로 소위 마르크스가 주창하던 '노동자 계급투쟁' 이론을 벗어났다는데 있다. 그는 회사가 이윤을 추구하고, 노동자가 임금을 위해 일하는 현실에서 투쟁은 진정한 의미의 보완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는 곧 현 노동 형태를 벗어나 노동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의견에까지 이른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은 자본주의 기초를 완전하게 무너뜨렸다. 지식과 정보가 무상으로 제공되며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돈을 들여 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짜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나 관계자의 규제가 아무리 철저해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체계 자체가 현 지식경제 사회의 트렌드에 전혀 맞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소모될 뿐인 노동과 경제 불황의 대안으로 '공동협력 자율생산'을 제시한다.

 

"자체생산의 공동작업장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서로 연결될 것이며, 자신의 경험, 발명, 아이디어, 발견들을 서로 주고받거나 함께 쌓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은 문화의 생산자가 될 것이며, 자체생산의 충만한 삶의 한 양식이 될 것이다."(본문 43쪽)

 

그의 유토피아에서 사람들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한다는 망령에서 벗어날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언론매체가 세뇌시키는 '노동 미덕'에서 탈주하는데 필요한 요건은 바로 임금노동 철폐와 그를 보완할 생계수당 지급, 그리고 일자리 나누기 등이다. 그의 유토피아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바로 본래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욕망과 필요 그 자체다. 그들은 서로 돕고 일하면서 노동을 능동적으로 행사한다.

 

이런 저자의 견해는 달콤하지만 의문스러운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정책들 중 일부가 실제로 유럽에서 실행되고 있다고는 하나, 이런 유토피아가 실제로 실물 경제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얼마나 현실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다. 특히나 자본주의 틀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난 세대에게 앙드레 고르가 제시하는 유토피아는 그저 머릿속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놓인 이들은 개인주의에 이미 몸이 익숙해져 있는 세대다. 소비욕망을 긍정하고 트렌드에 집착하면서, 현 체제를 전복시키기보다는 그 안에서 경쟁하고 싸우는 게 더 쉽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시대의 흐름은 이미 '개인'으로서 온전하게 흘러가고 있고, 이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나 방도가 과연 있을까. 있다면 그건 과연 몇 퍼센트의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앙드레 고르의 말처럼 다른 세계의 대안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변죽을 울리는 시행착오의 일부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해답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뒤꽁무니 쫓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앙드레 고르의 첫 번역서로 출판사 `생각의 나무`에서 그의 또 다른 역작인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 이어 출간될 예정이다.


에콜로지카 -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외 옮김, 갈라파고스(2015)


#에콜로지카#앙드레고르#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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