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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웬만하면 이 땅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 이젠 별로 없을 거다. 세상 물정에 별 관심 없는 내 여동생이 그 이름을 아는 걸 보면. 심상정. 이 땅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을 것도 같다(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경쟁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사는, 그 많은 선거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한나라당을 찍었을 것이 확실한, 내 남동생마저 지난 대선 때 심상정한테 호감을 보인 걸 보면.

 

그런 심상정과 같은 진보신당 당원으로 사는 나, 올바른 여성 정치인을 목마르게 갈구하는 나. 진보신당 공동상임대표이자 여성 정치인인 심상정을 잘 모른다. 언론에서 본 지난 이력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모습들, 그게 전부니까.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일 테니.

 

하지만, 그동안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일만은 참 행복했다. 당당하고, 조리 있고, 무척 똑똑하다. 현란한 말솜씨는 없지만 텔레비전 토론회에 심상정만 나오면 일단 안심부터 된다. 과하지 않게, 스며들듯이, 하지만 똑 부러지게 상대방을 제압할 거라는 믿음이 언제부턴가 절로 생겼으니까.

 

그런 심상정이 쓴 자서전 <당당한 아름다움>을 드디어 읽었다. 보통 정치인 자서전하면 대필 의혹을 많이 받곤 하는데 책을 읽어보니 심상정 본인이 쓴 글 맞는 것 같다. 지난 시간들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흐름이 그런 확신을 주게 한다.

 

그간 살아 온 시간들. 겪은 일도 할 말도 많을 법 한데 그냥 담백하게 풀어내고 있다. 자기  감정들을 술술 풀어내기 보다는, 겪은 일들을 스케치하듯이 써내려 간다. 어떤 뜻에서는 글맛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나처럼 작은 사건 하나하나를 풀어 쓸 때도 감정몰입과 감정이입이 지나친 사람과는 글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다른 듯도 하다.

 

하지만, 그런 글쓰기가 심상정을 대신 표현해 주는 것도 같다. 남들이 보기엔 대단히 위험해 보이고, 대단히 어려워 보이는 노동운동가로 걸어온 길을 덤덤하게 그려낸 것도 그렇고. 국회의원으로 걸어간 길도 마찬가지다. 어떤 정책들을 만들고자 애썼고 실천했는지, 리드미컬함보다는 정확함에 충실한 내용들로 채워 넣었다.

 

그렇다보니 어느 한 부분 '의심' 갈 만한 대목이 없다. '그래, 여기에 있는 말들 다 진실인 것 같아', 하는 믿음이 절로 간다. 감정이나 여러 현상들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사실 위주로 전달하는 이런 글쓰기. 어떤 경우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자기 할 말, 할 행동 그대로 유지할 수 있던 그 동안 모습과 참 닮아 있다.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심상정은 꼭 할 말만 하는 사람이다. 빈틈이 없다. 그 말이 맞는지 와는 상관 없이, 언론에서 주로 본 심상정은 그런 느낌을 저절로 심어주었다. 다정다감한 느낌과 조금 거리가 멀어 보이는 건, 그래서일 거다.

 

 

언젠가 본 심상정 인터뷰에서 주량이 맥주 500cc 한 잔 정도라고 말한 걸 기억한다. 그런 그가 술이 적당히 올라 얼굴이 발그레해진 모습을 딱 두 번 봤다. 두 번 모두, 기륭전자 후원주점 자리.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땐 술 잘 못 드신다던데 괜찮을까, 잠시 걱정이 됐다가도 술 먹고 적당히 밝게 풀어진 얼굴을 좋아하는 내 성격 탓에 그런 모습, 싫지 않았다.

 

12월 15일 기륭전자 후원의 밤에서는 조금 가까이에서 비슷한 모습을 또 보았다. 적당히 술 마신 기륭전자 조합원들이랑 토닥토닥 거리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 얼굴을 보니 여지없이 발그레하고 눈은 하회탈 저리가라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사람답게 강단진 모습 위주로 사람들한테 비춰지는 심상정. '술' 기운 때문일지라도 그렇게 조금 풀어진 모습 바라보는 마음은 흐뭇했다.

 

그렇게 조금 풀어진 심상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는 시간은 흐뭇했다. 가슴 아픈 절절함은 덜했지만 솔직담백한 글에서 묻어나는 그의 능력과 소신, 자신감. 이런 정치인이랑 같이 살아간다는 거,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았다. 

 

나는 여성 정치인들한테 좀 더 모진 잣대를 대는 경향이 있다. 페미니스트들한테 그런 것처럼. 여성 정치인을 갈망하고, 제대로 된 여성운동을 절절하게 꿈꾸는 내가 여태껏 좋아하는 여성 정치인, 좋아하는 여성 운동가 한 명 없는 까닭은 아마 그 때문일 테다(물론 정치인은 남자 쪽도 없긴 마찬가지다).

 

헌데 심상정 이 사람. 정치인, 여성 정치인, 진보 정당 정치인, 그 어느 갈래에서 바라봐도 모자람이 없다. 오히려 넘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적어도 내 눈에는. 그건 진보신당을 넘어 이 사회가 받은 축복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자서전을 읽고 나니 드디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정치인이 있다고. 그 사람 이름은 바로 심상정. 하지만 '무조건'은 아니다.

 

'최장집 교수는 "나의 정책은 비록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나의 의지는 투명하고 옳았다. 역사가 나를 평가할 것이다"로 집약되는 운동권적 정치관은 책임 윤리의 엄중함을 망각한 것이라고 충고한다. 정치 지도자가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어야 하고, 그가 말하고 지향하는 정책이 현실로 구현될 때 발생할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 정치 세력이 노무현 정권의 실패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핵심이 아닌가.'

 

자서전에 직접 남긴 저 말을 지켜가는,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까지 만이다.

 

나는 심상정에 대하여, '지못미'도 아니고, '팬'도 아니다. 내가 어느 정치인을 좋아한다고 말한다는 건, 곧 그를 계속 '감시'하겠다는 말과 같을 뿐이다. 그러니까 심상정은 나한테, 정치인으로서는 감시 대상 1호가 된 것.

 

진보정치가 꽃피우는 그 날까지, 그리고 그 뒤까지도 심상정이 지금까지 보여 준 책 이름  그대로 '당당한 아름다움'을 계속 지켜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이제부터 즐겁게 심상정의 행보를 감시하련다. '감시'한다는 거 피곤한 일이긴 해도, '감시'할 대상이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훨씬 낫지 않겠는가.

 

'오늘도 나는 깨닫고 있다. 여전히 진보 정치는 출발선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대안 세력으로서 신뢰 획득을 위해 다시 새벽길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심상정이 책에 남긴 저 말은, 진보신당 당원으로 살아가는 내 마음이랑 많이 비슷하다. 진보정치로 가는 출발선에, 심상정이라는 사람과 함께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나의 '심상정 감시'는 '기분 좋은 감시'가 될 것이다. 감시받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당한 아름다움

심상정 지음, 레디앙(2008)


태그:#진보신당, #심상정,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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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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