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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2008년 한해도 저물어 가고 있다. 이맘때쯤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해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신년에 계획했던 일들은 또 계획대로 추진해 왔는지, 남은 시간은 어떻게 채우고 또 새해를 시작해야할지 마음이 괜시리 바빠지기 마련이다.

쳇바퀴 돌 듯 하는 생활의 굴레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 내가 꼭 하고 싶었고 꼭 하리라 작정했던 계획도 계획으로만 끝나버린 채 한 해가 어느새 저물어 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한 저자의 두 권의 책을 만났다.

<미쳐야 미친다>(정민/푸른역사)

푸른역사
▲ 정민 푸른역사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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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었던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를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 읽었다. 처음 읽을 때 와 닿지 않았고 염두에 두지 않았던 문장들이 가슴팍을 파고들어 시퍼렇게 정신을 일깨움을 느낀다.

그렇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때, 그때는 미처 발견해지 못했거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으로 전율할 때가 가끔 있다. 수년, 혹은 더 오래된 책을 펼쳐들 일이야 별로 없지만 아주 가끔은 그런 순간이 있다.

그때마다 책이 새로운 감동으로 새로운 인식과 자각으로 눈뜨게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한권의 책 속에 든 수많은 활자들과 문장들이 다 내 것으로 와 닿지 않더라도 한 줄의 글, 한 문장의 글이 살아 움직일 때 그런 순간을 만나는 기쁨은 적지 않다. 한 해가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는데다 내가 뭘 했을까 하고 마음이 착잡해질 때, 우연히 든 이 책 속의 글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불광불급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미쳐라(狂).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를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이 책에는 조선의 지식인들 중에서 비주류의 사람들, 재능과 학식 등이 풍부하지만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버린 사람들, 변방의 지식인들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저자는 묻혀버리기 쉬운 그들을 찾아 한데 책으로 묶은 듯 하다. 책은 제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 벽(癖)에 들린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을 끝까지 붙들고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사람이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癖)이란 글자는 질(疾)에서 나온 것이니, 병중에서도 편벽된 것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박제가의 <백화보서>에 나오는 꽃에 미친 김군과 둔재 김득신이 책을 달달 외우되 사마천의 <사기>중에서 <백이전>은 1억1만3천 번을 읽을 정도로 외워서 깨우친 혀를 내두를만한 노력, 허균, 권필,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등 학문과 예술, 사랑에 미치고 몰두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박제가는 그의 책 <백화보서>에 꽃에 미친 김군의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꽃에 미쳐 꽃밭에서 꽃만 하루 종일 이리저리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쑥덕거렸다고 한다. 손님이 와도 하루 종일 꽃을 주목하고 눈도 깜박이지 않고 꽃 아래 앉거나 누워서 몰입해 있는 모습은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그가 그린 <백화보>는 김군이 1년 내내 꽃밭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절에 따라 변하는 꽃술의 모양과 잎새 모양 등을 그려놓은 책이다. 박제가는 꽃병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책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계산하고 앞뒤 재가면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벽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대충하고서 이룰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저자는 이들의 글을 빌려 또 강조하고 있다.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는 말이 위로를 준다.

부족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재주꾼이란 칭찬을 들었던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디로 갔는가.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김득신)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권의 책을 읽기를 억 번 만 번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이서우가 쓴 <백곡집>의 한대목)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책 제목과 마찬가지로 ‘미쳐야 미친다’는 것이다. 벽에 든 많은 선조들을 소개하면서 이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으며 광기어린 열정과 몰두가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삶의 질곡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절망을 넘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노력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위로와 도전을 준다. 제2부에서는 ‘맛난 만남’이라는 주제로 삶을 변화시킨 사람들의 맛있는 만남들을 소개하고 제3부는 ‘일상 속의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펼치고 있다.

<책읽는 소리>(정민/마음산책)

마음산책
▲ 정민 마음산책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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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들이 글 외우는 소리가 유창하여 마치 병 속의 물을 따르는 것만 같으니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청나라 때 김성탄이 쓴 ‘쾌설’에서-

옛날의 독서는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서당에서 낭랑하게 목청을 돋우고 가락에 맞추어 책을 읽었고, 선생은 좌우로 몸을 흔들고, 학생은 앞뒤로 흔들며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상상해본다. 책을 읽다보면 그 가락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뇌리에 스며들고 뜻도 모르고도 글을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의미는 소리에 뒤따라왔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아이들은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어른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정민의 또 다른 책을 도서관에서 만났다. 바로 전날, <미치면 미친다>를 책꽂이에서 꺼내 다시 읽었고 선조들의 글을 대하면서 또 저자가 풀어낸 글을 맛들이면서 그 은근한 맛이 좋아 음미하며 읽었는데, 똑같은 저자의 책을 예서 만난 것이다. 그 이름하여 <책 읽는 소리>다.

한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현재 모교 국문과교수로 있으면서 한시를 풀어내 소개한 이론서 <한시 미학산책>, <비슷한 것은 가짜다>, <돌 위에 새긴 생각>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고, 지금도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한문학을 가까이 하면서 쉽게 풀어내어 선조들의 철학과 지혜가 담긴 그 시대의 글들을 독자들이 만나 볼 수 있게 기여하고 있다.

저자는 ‘옛 글을 읽다가 많은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이 책이라 한다. 책 읽는 소리, 듣기만 해도 마음 속 머릿속에 청량한 소리와 울림이 생기는 것 같다. 그는 ’고전의 바다 속에는 우리가 건져낼 수 있는 구슬이 너무나 많다‘고 말한다. 그는 또 ’아무도 가지 않아 가시덤불로 막힌 길‘에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그곳에 난만하게 피고 지는 향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가 미쳐 느낄 수 없었고 몰랐던 그 맛난 ’과실을 함께 베어 물자’고 말한다. 가시덤불 같은 길을 헤치고 그는 주옥같은 옛 글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 1부 ‘옛 글을 읽는 까닭’에서 독서와 관련된 글을, 제2부는 마음 속 옛글‘이라는 주제로 옛 사람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보고, 제3부에서는 옛글과 오늘의 글과 삶을 이어보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된 하나의 등뼈를 발견한다.

그것은 읽기와 쓰기, 그것이다. 선조들이 어떻게 책을 읽고, 그 책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그들의 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글을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우리의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아울러 선조들의 책읽기는 오늘날과 같이 보편화되어 있는 어떤 하나의 현상, 즉 지식의 획득과 정보수집에 대한 것보다 지혜를 얻는데 그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모두 독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독서에서 얻은 것이 내 삶에 체화되어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도 상통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수학자 프랭카레라는 사람의 글을 소개한다. ‘송이버섯’에 대한 이야기이다.

“송이버섯의 생장에 좋은 조건이 계속되면 결코 포자를 만들지 않고 뿌리로만 살아가다가 노화해서 죽어버린다. 그런데 급격한 온도의 변화 등 갑작스레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제서야 포자를 만들어 계속 발전해 나가려고 한다.”

심지어 송이버섯 중에는 5백년이나 뿌리 상태로만 있다가 말라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인간의 창조력도 결국엔 역경 속에서만이 꽃피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린 저마다의 창조성을 꽃피우고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혹시 5백년이나 뿌리로 살다가 말라죽는 송이버섯처럼 그렇게 포자도 만들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정신이 번쩍 나는 대목이다.

책 읽기는 곧 쓰기로 지향한다. 하지만 글은 쓴다고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아무 때나 써지고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림도 글씨도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 중요함을 다시 느낀다. 테레사 수녀는 ‘침묵 없이는 하나님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일 할 수 없다’고 했던가. 명나라 진계유의 ‘안득장자언’에서 인용한 글을 적어본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되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

선조들은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부터 독서의 의미와 사색, 책 읽는 즐거움, 어떻게 글을 썼는지 그 방법까지 독서에 관한 다양한 옛글을 담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글 가운데 ‘눈뜬 장님 이야기’가 있다. 수십 년 동안 장님이었던 사람이 길 가다 문득 눈이 떠졌다고 한다. 사물이 보이게 된 그는 그 순간 제 집을 못 찾아 길에서 울고 마는데, 울고 서 있는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바로, ‘도로 네 눈을 감아라’였다고 한다.

이 우화는 곧 ‘자기 자신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라 한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와 편의 속에서도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지켜보며 저자는 옛글에서 길을 모색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 같다. 우리는 남의 눈치보고 이리 재고 저리 재고 궁리하면서 타성에 젖어 살며 대충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 한번도 순수한 몰두와 열정 없이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게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열악한 환경 속에서 포자를 터뜨리는 송이버섯이 아니라, 500년 동안 한번도 포자를 터뜨리지 못하고 뿌리로만 살다가는 무늬만 송이버섯인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저물어 가는 한해의 끝에서 나와 당신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푸른역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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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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