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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볼 것이란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는 등산로 초입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잉크라도 풀어 놓은 듯 하늘이 파랗고 살랑이며 부는 바람도 마치 봄바람 같다. 낙엽 진 늦가을의 숲은 고요했다.

 

낙엽활엽수는 넓은 잎새를, 침엽수림은 가는 잎새를 떨구고 고요히 겨울로 향하는 숲이 평화롭기마저 하다. 소나무 숲과 참나무 숲 사이에 들어선 작은 관목 숲엔 새들이 재잘거리며 놀았다.

 

활엽수림의 넓은 잎을 밟으면 사그락 소리가 났고, 침엽수림의 가는 잎을 밟으면 오히려 소리를 삼키며 부드러운 감촉이 밟혀 왔다. 특히, 낙엽송숲길을 걷는 맛이 각별했다. 키가 작고 가느다란 낙엽송이 떨어뜨린 마른가지가 숲 한 켠에 갈색 융단을 깔아놓았다.

 

연한 갈색 융단이 깔린 낙엽송 숲에 정오의 햇살이 가득 내리는 장면이 참 아름다웠다. 그 길을 남편과 조용히 걸었다. 들머리부터 줄곧 따라오던 잣나무가 우거진 숲을 버리고 관목 숲을 지나 낙엽송이 늘어선 아름다운 길에 들어서는 동안은 오가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게 완만하게 이어졌다. 등산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평이한 길은 오늘따라 파랗게 열린 하늘이 손에 잡힐 듯한 작은 봉우리를 넘자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는 늦가을 정경이 하얗게 눈에 덮인 겨울 풍경으로 바뀌어 나타났다.

 

서남쪽과 북동쪽의 경계에서 햇살 대신 음지가 드러났고 바람마저 불었다. 배낭에서 장갑을 꺼내 끼우고 옷깃을 여민다. 낙엽위에 흩어질듯 조금씩 눈에 띄는 눈이 머지않아 낙엽 층을 가득 덮을 듯 쌓여 있다.

 

서서히 길이 가팔라지고 숲도 깊어 가는데 이젠 아예 온통 하얀 눈 세상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도 쓰러진 나뭇가지 위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 쌓여있다. 등산객들이 오가며 내놓은 발자욱으로만 길을 짐작할 뿐 온통 눈으로 하얗게 덮인 세상이다. 도대체 이 생각하지 못한 풍경은 어인 일인가 싶어 눈 속을 헤집어 본다. 낙엽 위에 수분 가득한 눈이 한층 쌓였고 그 위에 마른 눈이 다시 한 층을 이뤘다.

 

11월 중순 이곳에 첫 눈이 내렸었다. 잠깐 흩뿌리다 사라진 아쉬운 첫 눈이었다. 날이 그닥 춥지 않았는지 그나마의 눈도 그치고 비가 내렸었다. 그 첫 눈이 이곳에 그렇게 쌓여 있었나 보았다. 잠깐 내리다 비로 바뀐 첫 눈이 그대로 낙엽층 위에 쌓였고, 일주일 간격으로 다시 한 번 진눈개비가 내렸는데 지대가 높은 탓에 이곳은 눈으로 내렸었나 보다.

 

아하, 그제서야 숲을 뒤덮은 눈의 정체를 짐작해 본다. 첫 눈이 왔던 날 잠깐 내리다 말았던 탓에 눈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12월이 다 되어 가는데도 눈이 한 번 제대로 내리는 날이 없었다.

 

그런데 신비롭기도 하지, 내가 그 흔적이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눈이, 그것도 첫 눈까지 낙엽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을 줄이야. 조금 전까지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낙엽 진 길을 걸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 길에 따사롭게 내리던 가을 햇살도 거짓말 같다.

 

햇빛이 일찍 사라지는 북쪽사면인 이곳은 음지라 눈이 그대로 쌓인 모양이었다. 벌써 7부 능선을 넘었으니 고지대에 속한 이곳은 아무래도 기온차도 있었으리라. 사람 사는 마을에 비가 내리는 동안 눈이 내리는 숲을 상상하며 눈에 쌓여 경계가 지워진 눈길을 걷는다.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눈세상이 반갑기 그지없다. 소복이 쌓인 눈길은 그러나 샘이 있는 장소까지였다. 샘 위로는 아득한 절벽 같은 정상을 향한 길이 놓였다. 샘에서 물을 마시고 돌아서 가려던 계획을 눈을 만나서 부득이 수정한다.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았으니 되돌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샘 위의 절벽 길을 오른다. 정상을 넘어서 눈이 녹은 남서쪽 사면을 타고 내려갈 생각으로.

그러자면 눈이 쌓여 미끄러운 이 바위투성이 길을 넘어야 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오르니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정상을 바로 앞에 둔 짧은 암벽구간이다.

 

다행히 밧줄이 설치되어 있지만 눈이 쌓여 미끄러운 암벽구간을 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긴장한 탓인지 밧줄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며칠 동안 팔이 아팠는데 당시의 미끄러운 암벽구간을 통과하느라 긴장한 그때를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하다.

 

애초의 계획에 없었으니 그 역시도 예상치 못하게 겪은 헤프닝이었다고 생각한다. 울퉁불퉁 바위투성이 정상 부근을 벗어나자면 한 치의 긴장도 늦추면 안 되었다. 겨울 산행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정상부근에서 50여미터를 벗어나니 그제서야 눈이 녹은 흙길이 드러난다. 저녁으로 가는 하늘엔 햇살이 조금 남아 온기마저 느껴진다. 햇살이 비추는 길을 걷자니 조금 전 눈 세상을 걸었던 일이 꿈 속처럼 아득하다. 낙엽이 쌓인 길과 눈 쌓인 길의 경계 사이에 늦가을과 초겨울이 가로 놓여 있었다. 계절은 그렇게 바뀌는 모양이었다.

 


#늦가을의 낙엽길#초겨울의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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