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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시네마 키드의 시대

1998년 12월 20일 일요일, 서울극장 6관 2회차. 영화는 <미술관 옆 동물원>, 요금은 6000원. 그는 수능시험이 끝나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동갑내기 여자와 영화를 봤다. 심은하가 춘희로 나와 인기를 끌었던 이정향 감독의 첫 작품이다.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스크린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던 그는 처음 느꼈던 거대한 영상에 대한 강렬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춘희가 부스스한 머리로 나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할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처음 만난 여자를 의식하며 조금 더 멋지게 웃어보려고 애썼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여기저기서 누가 재미없다고 했냐며 따지는 소리가 나왔다. 대부분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은 그저 그런 대화를 식상하게 나누었고, 극장 옆 국수집에서 멸치로 국물을 우려낸 국수를 한 사발씩 먹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지하철역 개찰구에서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드름 가득한 얼굴에, 연애에는 통 재주가 없던 그는 여자에게 안 좋은 기억 따위로 남았을 것이다.

수줍음이 많았던 소년은 꿈에 부푼 문학청년이 되었다. 지드와 카프카, 조경란과 이청준의 소설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던 때. 그는 처음 스크린으로 영화를 봤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영화클럽을 결성해 <대부>나 <일급살인> 같은 영화의 비평을 주고받던 때도 있었지만, 그건 다 텔레비전으로 본 영화들이었다.

미치도록 종로의 영화관을 들락거렸다.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허리우드, 동숭시네마텍, 서울아트시네마, 필름포럼, 시네마테크, 시네코아, 코아아트홀까지. 오후 수업까지 빠지면서 그야말로 놀고먹는 대학생 흉내를 내고 다녔다.

밥을 먹지 않아도, 버스비가 없어도 좋았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탁탁 털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해는 저물었고, 집에 갈 길은 너무나 멀었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아직 그리지 않은 그림이 너무 많아서 행복했던 그 때에는 뉴욕대학 영화과에 들어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던 외국 감독들이 대개 그 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에 인생 한 번 바쳐보자는 호기도 부려보고 싶었다. 김응수 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뒤늦게 테이프로 보기 위해 열 정거장이 넘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가 빌려보기도 했다. 당시에는 '영화마을'이나 '으뜸과 버금'처럼 예술영화를 다량 소장하고 있는 대여점이 많았다. 집에서 먼 거리의 체인점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이든 치열했고 열정적이었다. 합평회를 할 때도 그 누가 되었든, 습작품 작가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지독하게 달려들었다. 마침표든 쉼표든 쉬이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확신이 있었다. 그 불확실한 허세와 믿음이 그의 청춘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무슨 일이든 지독하게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줄- 여기는 서울 한복판, 지구별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게 된 <미술관 옆 동물원>의 감흥은 처음만 못했다. 철수(이성재)에게 이름 때문에 놀림 받던 춘희(심은하)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후 놀리는 장면이 있다. 춘희가 비꼬는 말투로 "철수?" 라고 말할 때, 극장에서는 큰 웃음이 나왔다. 요즘 말로 '빅재미'였다. 혼자서 텔레비전으로 다시 보게 된 그 장면은 너무나 무덤덤해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유머 코드는 썰렁한 것처럼 느껴졌고, 무엇 하나 흥미를 끄는 장면이 없었다.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영화관 한 번 가려면 너무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그는 항상 머릿속으로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변명할 생각조차도 잊게 되었다.

그는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대학원에 들어갔다. 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재주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대학원의 풍경은 그야말로 기이했다. 학업 수준이 높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마음가짐도 그야말로 남달랐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몰려다녔고, 아줌마 작가 지망생들은 첫 학기부터 교수 뒤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등단하기 위해, 현역 작가나 비평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두들 손바닥을 비벼댔다. 현역 작가가 대학원에 온 경우도 있었다. 직장까지 있는 그가 굳이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돈을 쓰러 왔다는 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거대한 권력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 그러니까 교수 자리 하나 차지하기 위해 굳이 시간을 쪼개 수업을 들었다.

모두 자신들의 줄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썩은 동아줄이 아니길 바라며. 치열한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문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뇌물을 주고받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그래. 이곳은 서울 한복판, 지구별이다." 하늘을 날고 싶었고, 더 넓은 세상과 만나고 싶었던 그였지만 결국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줄을 대지 않으면, 확실한 보증수표가 없으면 노력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되는 유토피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잡은 건 썩은 줄이었나?" 대학원을 그만둔 그는 마음을 정리하고 4대 보험과 퇴직금이 보장되는 회사에 입사했다. 매일 아침 직장 상사의 탁자를 광이 날 정도로 닦았다. 회식자리에서 건배를 할 때는 잔을 상사보다 낮게 들었고, 항상 웃으며 활기찬 청춘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노래방에서는 생전 듣지도 않던 댄스곡으로 선곡해 소화기까지 들어가며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쓰레기가 될 정도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남들처럼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자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우물 안에서 만족하고 행복했다. 아니,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여겼다.

틈- 얼룩덜룩한 거울, 삼십 센티미터 앞

자신만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던 그도 불황의 광풍은 피해가지 못했다. 어느새 그는 안정된 직장이라는 울타리 밖에 머무는 주변인 신세가 되었다. 뜨거웠던 나이의 맨 앞에 숫자 2가 붙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지지부진한 감상에 젖어 스스로를 자책하는 날이 늘어갔다. 그는 생각했다. '결국 나는 꿈과 현실, 그 무엇도 잡지 못했구나.'

실업자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자살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상은 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십대가 저물어간다는 절망은 그를 더 고민에 빠지게 했다. 고작 이 좁다란 틈 사이에서 팔과 다리에 잔뜩 힘을 주며 버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세상 또한 그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꿈을 가진 자, 열정을 가진 자는 끝끝내 권력을 움켜진 이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강한 사람은 더 강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더 깊은 어둠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그림자 뒤로 숨어들었다. 이제 자신의 청춘은 끝났다는 체념이 그를 감쌌다.

그의 앞에는 얼룩덜룩한 거울 하나가 놓여있다. 얼굴과 어깨까지가 간신히 보였다. 켜켜이 쌓인 먼지, 묵은 때 덕분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거울과 얼굴 사이의 거리, 삼십 센티미터. 그 거리만큼 그는 자신과 떨어져 있었다. 호호, 불어 거울을 닦으니 한결 보기에 좋았다. 못난 얼굴이 한결 더 산뜻했다.

"찬란하던 그 해에, 우리는 모두 이 땅의 자랑스러운 모험가였다."(윤이형의 단편 소설, <피의 일요일> 중에서)

우연히 읽은 소설의 한 구절처럼 그와 또래의 우리는 모두 이 땅의 자랑스러운 모험가였다. 삶은 그대로 전쟁이었고 전투는 일상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치열하고 뜨거울 수 있었다. 쏟아지던 빛이 너무 따가워 손으로 너무 오랫동안 눈을 가리고 다녔다. 스물아홉의 끝자락은 그에게 또 다른 모험을 안겨주었다. 얼룩덜룩한 거울을 깨끗하게 닦아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것.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꿈과 열정이 있었는지.

그렇다. 그러니 이 글은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스물아홉에 서서, 저물어가는 이십대를 곱씹는 그 모든 '스물아홉들'을 위한 것이다. 우린 아직 경계에 서 있다. 꿈도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고, 현실도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잠시 한 걸음 물러나 있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다독일 수 있길. 공지영 작가와 지승호씨의 대담집 제목처럼. 그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왜냐고? 당신은 그 뜨겁고 찬란하게 쏟아지던 햇빛 아래에서 그 누구보다 위대한 모험가였으니까.


#스물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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