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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법. 법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법치, 법과 질서를 유난히도 강조하는 현 지도자들을 보면서 과연 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법은 무엇이고, 법치사회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나누어 보고 싶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날라리 법학도의 법치사회 탐구라고나 할까.

5. 가짜법치 부작용

 

2) 법에 갇힌 인간_'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두번째 글에서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정치가 실종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번에는 겉모습만 법치인 가짜법치가 판을 칠 때 인간을 위한 법이 아닌,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웃지못할 상황의 도래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인간이 법에 갇혀 종속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에게 이미 도래해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법에 오히려 종속되고, 갇혀서 신음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변명이 그럴 듯한 자기 합리화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유지와 정상적인 인 삶을 도와주는 법이 도우미의 제 역할을 벗어나 한 사람과 사회의 건강성을 측정하는 최고의 기준으로 부풀려진 것이다.

 

사회의 투명성이 점차 강화되고, 사회의 도덕적 수준과 기대가 높아지면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위공직자 등 사회지도층에 대한 검증은 매우 날카로워졌다. 예전 같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문제들, 예를 들어 위장전입이라든가 일정기간 연금납부가 누락되어 있는 문제들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물러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회지도층들이 이러한 도덕적 기준에 둔감했던 탓에 사회적 기대 수준에 부응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장관을 시킬 만한 사람이 없다는 웃지못할 하소연도 들려온다. 이렇게 사회지도층들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바로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쌍한 모습이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강변은 '나는 양심에는 털이 무성하고,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인간이지만 그래도 법적으로는, 최소한의 기준이자 사회적 약속인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다'라는 자기 선언의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법에 턱걸이하는 '자기인생의 모라토리움'에 직면한 불쌍한 인간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진실은 사라진다. 오로지 법리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혈안이 된다. 그래서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은 숨을 거두고, 더 똑똑한 변호사가 그럴듯하게 법적인 포장을 잘하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법의 기준에 따라 입을 잘 맞추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면 누구의 눈에도 잘못한 것이 훤히 보이는 사람도 무죄판결로 면죄부를 받는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 불쌍한 고백은 우리의 일상 속에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마을주민들이 생활을 위해 필수적으로 통행해야 하는 길, 그래서 수십년 동안 아무런 불편없이 지나다닌 길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발생하자 주인이라는 법적 권리를 앞세워 통행을 가로막아 버리는 행위, 최근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방기했던 사람이 법적인 친권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자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은 바로 최소한의 법을 전부이자 최고의 기준인양 착각하는 법에 갇힌 인간의 자화상이다.

 

<1번가의 기적>이라는 영화가 있다. 달동네에 아파트를 지어 많은 돈을 남길 수 있는 건설회사가 그곳에 살고 있는 고단한 서민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철거 동의서를 받기 위해 폭력과 협박을 일삼는 모습이 그려진다. 힘쎈 깡패들을 동원해 이루어지는 달동네의 아수라장을 통해 철거동의서에는 하나, 둘 지장과 도장이 채워져 간다. 어떤 대화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대책도 없이 위력이라는 야만적 방법으로 완성된 철거동의서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문서로 재개발의 근거이자, 원주민들의 자발적 의견으로 통용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법치다.

 

이명박 정부는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정부다.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정당한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해서 그 정부의 모든 행위가 정당성을 얻고, 국민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법은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법은 정부가 국가에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존립기반일 뿐 자동적으로 그 정부를 좋은 정부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정을 펼쳐나가는데는 법에 부여된 권한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며 국민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 국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화하고,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타협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가는 리더십이 그 정부를 바로 국민에게 인정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무시하고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들의 잘못을 정당화한다면 점점 더 국민으로부터 멀어져갈 뿐이다. 체육관 선거로 민의와는 동떨어진 정부를 탄생시킨 전두환 정권도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 정부였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법은 최소한이다. 그런데 법이 전부인양, 법에 갇혀서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가면서도 법의 기준에 충족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법대로'를 외치며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 정당성의 근거가 된 사회가 정말 우리가 지향해야할 법치사회인지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이런 현실속에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는 지도자들에게서 현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집단중에 하나인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관용과 사랑의 마음은 하나도 없으면서 여러가지 종교적 법을 준수하는 데 목숨을 걸고, 그 법의 준수여부로 사람을 차별했던-들을 떠올리는 것은 나만의 과도한 감정적 접근인가.

 

6. 마치며- 법치를 찾아서, 법치사회를 향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돈이 돈을 낳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에 따르는 모든 경제활동을 자본중의의 모습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경제윤리도, 약자에 대한 배려도, 공동체 유지에 필수인 복지를 등한시하는 자본주의를 우리는 본래의 자본주의와 구분하여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른다. 법치도 마찬가지다. 법으로 지배되는 사회라고 해서 다 법치가 아니다. 법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며,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더욱 공고하게 하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법안에 인간이 갇혀 기계와 같이 전락하고, 법대로와 법적인 하자가 인간의 삶을 짓누르는 사회는 법치 사회가 아니라 천박한 법치사회다.

 

법이 인간을 존재하지 않는 순간부터, 인간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보잘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법치는 위기이다. 이 위기에 대해,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면서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법치사회의 도래를 도리어 가로막는 것이다. 임의가 아닌 공평한 법의 지배를 통해 공정과 기회 그리고 신뢰가 가득한 사회가 법치사회다. 누구도 자신의 재능과 꿈을 억압받음없이 자신의 노력에 따라 마음껏 자신의 삶을 펼칠 수 있는 사회가 법치사회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로 가득찬 법을 가졌어도, 지도자가 그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법과 원칙을 외쳐도, 검찰과 경찰이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사람들을 정해진 선 안에서 통제하고 길들여도 법치사회가 아니다. 법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 법이 다 감당할 수 없는 도덕과 양심, 관용과 정의가 사람들의 삶속에 뿌리박는 사회가 바로 법치사회다. 아직 우리는 그곳에 도달하기에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준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준법은 우리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장치인 것이다. 준법이 우리의 삶을 자동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것이다. 우리는 그 안정적인 기반위에 공부도하고, 사랑도하고, 대화도하고, 술도한잔하면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준법은 게임의 법칙일뿐 게임 자체가 아닌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법치에서 정치는 꽃피운다.

 

거기에 더해 이 게임의 법칙이 나를 위한 것인지, 도리어 내가 법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를 의심해야 한다. 준법은 법이 아닌, 그리고 이 땅의 일부 사람들만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일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법은 만인앞에 평등하므로.

덧붙이는 글 | 권오재의 블로그 오재의 화원(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법, #법치, #공정,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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