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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과 잘 어울리는 도자기
수리산과 잘 어울리는 도자기 ⓒ 이민선

그리 맑지도 그리 흐리지도 않은 '흐리멍텅' 한 주말(11월9일)이다. 그래도 방바닥에서 뒹굴기는 아까운 날이다. 자전거를 타고 안양 8경중 하나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지'에 가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지만 그동안 짬이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아무래도 뒤통수가 따끔거린다. "또 혼자만 놀고 올 거냐?"는 원망 섞인 시선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 항의가 빗발치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호연아 아빠 따라 갈래?"

"그래, 나 아빠하고 자전거 탈거야."

"하영이도 갈래?"

"난 오늘 좀 바빠, 빼빼로데이 준비해야 하거든, 승주하고 빼빼로 사러 가기로 했어."

 

하영이(11살)가 따라오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하다. 두 녀석 거두는 것보다는 하나만 챙기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아빠가 외출하자고 하면 환호성을 지르며 옷부터 갈아입던 녀석이었는데'라는 생각에 살짝 섭섭해진다.

 

어쨌든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고 선언한 것은 성공적이었다. 구겨질듯 하던 아내 얼굴이 환하게 펴져 있었다. 아내 말을 들으니 나보다는 호연이(4살)가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최경환 성지 가려면 호연이는 필히 데리고 가야 하는 거야, 얘 세례명이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거든."

 

아내 말을 듣고 속이 뜨끔했다. 왜냐고? 솔직히 고백한다. 이때까지 난 아들 세례명이 '최경환 성프란치스코'인지 몰랐다. 아들 세례명을 몰랐다는 내색을 차마 할 수 없어서  '포커 페이스' 로 위장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사실 이 얘기 쓸까말까 굉장히 망설였다. 무심한 아버지라는 손가락질 받을 각오하고 쓰는 것이다. 글은 최대한 솔직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기에. 성당에서 얼굴 마주치는 신부님이나 신자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까! 걱정이다.

 

밖에 나와 보니 바람이 꽤 차갑다. 유아용 보조 의자에 앉아있는 호연이 녀석이 걱정스럽다. "춥냐?"고 물으니 연신 "아빠 안 추워"라고 대답한다. 안양시 석수동에서 오전 11시에 출발했다.

 

아들이 어머니 작품 전시해 놓은 곳,  '돌석 도예전시관'  

 

 돌석 도예전시관
돌석 도예전시관 ⓒ 이민선

익숙한 길이지만 아들 녀석을 태우고 가려니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자전거 도로가 없기 때문이다. 박달동까지는 그나마 인도를 할애해서 깔아놓은 '무늬만 자전거 도로'가 있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좁다란 인도와 차들이 씽씽 달리는 차도뿐이었다. 차도로 달리기보다는 주택가 골목이 안전할 듯하여 박달 시장이 있는 주택가 골목을 이용, 안양 3동까지 갔다.

 

안양3동을 지나 수리산 입구(안양9동)에 들어서니 등산객들 모습이 보인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숨이 차다. 완만한 경사지만 그래도 오르막길이다. 4살배기 아들 녀석을 태우고 가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호연이가 좀 쉬었다 가자고 보챌 때쯤 멋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돌석도예전시관'이다. 널따란 마당에 여러 가지 신기한 모형의 도자기들이 놓여 있었다. 내친김에 관장님을 만나보기로 했다.

 

"어머니가 평생 만드신 작품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 작품들은 어머니가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문화 예술 행사도 하고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도예교육도 할 예정입니다."

 

친절한 관장님(장지훈)은 도예가 돌석 김석환 선생 아들이었다. 아들이 어머니 작품들을 모아 전시관을 만든 것이다. 돌석 선생 작품은 주변과 잘 어우러지는 것이 특색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흙색이나 나무색을 가지고 있어서 소박한 느낌이 있는 수리산과 잘 어울렸다.

 

2층에는 차를 마시는 카페도 있다. 차 한잔 마시며 '망중한' 을 즐기고 싶었지만  아들 녀석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통에 혹여 도자기를 깰까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아들 녀석과 함께 도자기가 전시된 카페에 있는 자체가 굉장한 스트레스 였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들 녀석이 보채는 바람에 '다음에 다시 들르겠다' 는 약속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앗차! 하는 사이 발을 헛디딘 호연이

 

 호연이, 바위에서 떨어진후 시무룩한 표정 ...웃으라고 해도 웃지 않았다.
호연이, 바위에서 떨어진후 시무룩한 표정 ...웃으라고 해도 웃지 않았다. ⓒ 이민선

 

 언제 시무룩 했느냐는 듯 활짝 웃는 호연이
언제 시무룩 했느냐는 듯 활짝 웃는 호연이 ⓒ 이민선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자전거를 더는 타고 갈 수가 없었다. 호연 이를 유아용 의자에 앉힌 채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성당 십자가가 반가웠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성당에서부터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걷기로 했다. 호연이 손을 잡고 몇 미터 더 올라가니 드디어 최경환 프란치스코 생가가 보인다. 깔끔하게 정돈된 초가집이다. 이정도로 잘 정돈 돼 있으면 도심 한가운데 짓고 살아도 괜찮을 듯 했다.

 

'최경환 성지고택'이라 쓰여진 비석 앞에서 호연이 녀석 사진을 찍어 주려고 하는데  녀석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비석 옆 바위에서 이리저리 뛰며 노느라 정신이 팔려있다. 내심 불안불안했다. 아무래도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말았다.

 

"호연아 괜찮아" 하며 일으켜 세우고 안아주자 녀석은 울먹울먹 하며 울까말까 눈치를 본다. 다행히 다친 곳도 없고 울지도 않는다. 엄마가 있었으면 분명히 울었을 것이다. 호연이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나서 옆을 보니 카메라가 나뒹굴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카메라를 내던지고 호연이를 붙잡은 것이다.

 

어린4형제, '어머니 단칼에 내리쳐 달라'고 망나니에게 부탁

 

 성 최견환 생가
성 최견환 생가 ⓒ 이민선

최경환 성지는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겨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의 집을 급습해 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는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다시 갇힌 몸이 되고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는 4형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 그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에 앞서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가톨릭출판사, 1996)

 

이 얘기를 최경환 성지에 가기 전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역사의 아픔이 간직된 곳을 속속들이 돌아보고 싶었지만 네 살배기 아들 녀석이 집에 가자고 보채는 통에 하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 한 자전거 여행이었다는 것이 큰 즐거움으로 남는다.

 

역사의 아픔이 숨어있는 최경환 성지와 도예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돌석도예전시관'은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안양뉴스 유포터 뉴스


#성 최경환 성지#안양8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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