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만천하에 드러난 세기적 금융사기극의 파탄, 2008년 가을의 악몽. 개별 가계는 애지중지 부어넣었던 펀드가 반토막 나고 어렵사리 빚을 얻어 마련한 주택의 대출금리가 수 년 만에 두 배까지 뛰고, 중소상인들은 만년불황에 금융위기가 더해 언제 가게 문을 닫을 지 걱정하며, 멀쩡한 우량 중소기업은 환율폭등으로 도산의 문턱에 서있고 첨단제품으로 세계시장을 누비던 수출 대기업들도 최악의 경기침체를 맞아 생사의 기로에 서있다. 95%의 국민이 파산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정부는 수출부양을 위해 고환율 정책을 쓰다가 낭패를 보더니 엊그제까지 유동성 확보한다며 외환을 퍼부어대다가 달러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달러모으기 운동을 하잔다. 시장은 경제당국의 실패에 전율한다. 또한 이 순간, 부자 감세를 통해 소비심리를 부양하고 금산분리 완화를 통해 금융선진화를 앞당기자고 까지 나서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정신머리 없는 행보’를 목도하면서, 그리고 끊임없이 한반도대운하와 건설경기부양을 통해 토건국가 재건을 노리는 청와대를 바라보면서, 씁쓸하다 못해 비장한 경각에 소스라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듯하다.

 

폴 크루그만 같은 국가개입주의 신케인지언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고, 미국식 자본주의체제로서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고 설파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의 종언을 선언하는 이 시점, 신자유주의 메카인 영국과 미국에서 앞다퉈 국가개입을 강화하고 신자본주의 건설을 내용으로 한 신 브레튼우즈 협정을 준비하자는 이 시점.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로 올인해야 선진화를 완성할 수 있다며 거꾸로 가는 남자, 이명박 대통령.

 

그 이명박 대통령을 뽑아 놓은 이 나라 국민들은 현재 정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헌법이 규정한 ‘국민 재산권 보호’라는 국가의 책무가 어디론가 실종되어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국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제대로 된 국가’를 가질 수 있을까.

 

95% 국민의 ‘삶의 열망’을 대표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정치

 

가늠할 수 없는 위기의 압박 속에서 선진 각국 정상들이 연일 시장안정화 대책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민주적 통제’로부터 방임된 금융자본의 횡포를 제어하기 위해 ‘국가’를 발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해법이 작동되어 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 북유럽 소강국의 경우처럼 지금이라도 민주적 통제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 헌법 119조 2항은 경제민주화 조항이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세칭 ‘사회적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조항이다. 헌법대로만 한다면 시장의 실패에 대해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조정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2008년 현재 대한민국에 ‘국가’는 없다. 너무 간단한 결론이지만 대한민국에서 ‘국가’를 실종시킨 원죄는 선거와 정치제도에 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대통령과 행정부, 국회의원과 입법부, 헌법재판소-대법원 및 사법부가 바로 선거와 정치제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축제라는 선거와 정치제도가 95% 국민대중의 ‘삶의 열망’을 외면하는 메커니즘은 사실 간단하다. 1인1표의 민주주의 원리가 1원1표의 자본주의 원리에 포식되는 메커니즘. 그 메커니즘이 바로 대한민국의 선거와 정치제도에 내재되어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 대통령제와 지역주의 소선거구제, 국회법과 정당법이 바로 95%의 국민이 원하는 국가를 실종시킨 장본인이다. 1인 1표의 절차민주주의는 아이러니 하게도 5%의 승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들여다보자. 민주주의가 5%에 의해 지배되고 95%는 대표되지 못하거나 분열된다.

 

극심한 권력투쟁 속에서 탄생하는 5년 단임의 대통령과 청와대는 경제정책권력을 행정부의 경제관료에게 의존한다. 행정부는 재경부와 기획예산처의 정책권력을 초점으로 입법권을 행사하여 입법부-국회의 입법권을 능가한다. 아다시피 경제정책권력은 재벌과 시장의 편일 때가 많다. 더구나 기업 프랜들리하다는 이명박 정권은 10여년 전 IMF 환란기의 경제관료를 중용하고 있으니 궁합이 이렇게 맞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입법부-국회가 95%의 민의를 대표해야 하는데, 그게 구조적으로 수월치 않다. 국회의원은 총 299명을 선출하는데, 이중 243명을 지역구에서 종다수 1인씩 선출하게 되어 있고 56명은 각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여 선출한다. 현대 한국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정치적 요구는 종다수 소선거구제에 의해 ‘여와 야’만을 결정하는 현 선거제도에 의해 외면되는 구조다.

 

그렇게 구성된 국회는 국회법에 의해 운영되는데 국회법도 ‘여야법’이다. 299인의 국회의원은 ‘여와 야’로 규정되어 있고 여야간 사전협의를 거쳐 의안이 조정되지 않으면 의사를 진행할 수 없는 이상한 민주주의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20명의 의원을 배출하지 못한 소수당은 득표율이 10%가 넘어도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다. 종다수 소선거구제에 의해 외면된 ‘다양한 소수의 비극’에 그치지 않고 국회 안에 입성한 소수조차 ‘왕따’가 된다. 민의를 대표하는 정책경쟁 기능보다는 집권성공세력 대 집권실패세력 간의 권력투쟁 기능이 국회법에 의해 우선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은 또 어떠한가. 선거제도가 그렇다 보니, 민의를 대표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공천하기 보다는 당내 권력지형을 반영해 공천을 하게 된다. 정당의 운영도 거듭되는 선거에 맞추어 ‘동원형 체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지지자들과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며칠전 모 일간지의 여론조사를 인용하면, 지지정당 없음 50%, 한나라당 29.8%, 민주당 10%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자유선진당, 민노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등은 선거시기의 득표율보다 한참 처지는 지지율에 그치고 있다. 지지할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50%에 이르른 것은 한국의 정당들이 민의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대표되지 못하고 종합되지 못하는 95%는 필연적으로 분열된다. 5%는 안정적으로 지배권을 유지한다. 소위 87년 헌법체제하의 대한민국 정치시스템과 그 속에 대표를 내세우지 못한 95%의 국민은, 소위 97년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에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열악한 존재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손놓고 있으면 될까. 개헌이든 정치제도 개혁이든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 삶의 의지에 따라 직접 행동하는 국민은 언제나 시대를 이끌어 나간다. 시대는 정치를 국민에게 소환한다.

 

이미 국민들은 모색한다. 행동한다. 2008년 봄과 여름, 국민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한 위대한 촛불시위가 그랬다. 공기업 민영화, 방송 민영화, 국민건강보험 민영화 등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행동이 그렇다. 농지 직불금을 탈법 수령한 공직자들에 분노하여 논밭을 갈아엎는 농민들의 행동이 그렇다. 국제중학교니 일제고사니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밀어넣는 교육정책에 저항하는 교육주체들이 그렇다. 토건국가 개발주의에 맞서는 환경지킴이들이 그렇고, 당국의 종부세 완화에 저항하고 부자 감세에 저항하는 정당과 시민들이 그렇다.

 

또한 좌파 교과서를 뒤집겠다는 명목으로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는 집권세력에 대해 ‘아니오’라고 외치는 역사학자들도 지금 움직이고 95%의 행복을 지켜내기 위해 결집하고 있는 새로운 경제학자들도 지금 행동하며, 대북 상호주의에 반대하며 민족의 평화통일번영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전문가-시민들도 이미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균열된 95%가 현실에서 한편으로는 같이 다른 한편에서는 각자 행동하고 있다. 과거의 계급주의가 이를 포괄할 수 없고, 현재의 대표없는 정당체제가 이를 전담할 수도 없다. 95%의 행복추구권을 지켜내려면, 95%의 의사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연대’가 해법일 것이다. 

 

그러한 연대는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일터에서, 동네에서, 작은 도시나 읍에서, 중소 도시나 큰 도시에서 95%의 행동들은 만나야 한다. 절차에 그친 약한 민주주의를 딛고 행동하는 강한 민주주의만이 새로운 시대의 불문헌법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모든 진보민주진영의 연대조직이 힘있게 되려면, 95%의 국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수 국민을 묶어세우기 위해서는, 대중이 있는 공간 즉, '지역'을 뿌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금융위기#개헌#진짜정치#이명박#국민재산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