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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한사람씩

 

서울 동대문 밀리오레라는 곳을 찾아가던 때 일입니다. 그곳 1층으로 들어설 때 보니 문에 몇 가지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있을지 궁금합니다만, 여러 해 앞서 그곳 나들문에는 다음처럼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한글로, 하나는 한자로, 또 하나는 알파벳으로.

 

 ┌ 한사람씩

 ├ 1人用

 └ one person

 

뱅글뱅글 돌아가는 문, 그러니까 ‘회전문(回轉門)’에 적힌 말이었습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문에 둘이나 셋씩 들어서면 꽉 막힐 뿐더러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붙여놓았지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럿이 드나들면 다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문을, 사람들 북적거리는 곳 나들문으로 써도 괜찮은가 싶은데, 어떤 마음으로 뱅그르르 문을 달았는지 모르지만,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은 한국사람과 일본사람과 영어 쓰는 사람이었기에 세 나라 글로 알림글을 적었으리라 봅니다.

 

 ┌[한국말] (몇) 사람씩

 ├[일본말/중국말) (몇) 人用

 └[영어] (몇) person

 

어수선하고 북적북적거리는 곳을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면서 생각합니다. 세 가지 글로 적은 알림글이라 한다면, 하나는 우리들 한국사람보고 알아들으라는 글이요, 다른 하나는 일본사람과 중국사람 알아보라고 적은 글이며, 마지막 하나는 영어를 쓸 서양사람 보라며 적은 글이겠다고. 우리들은 으레 ‘몇 인용’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곰곰이 따지면 이러한 말투는 우리 말투가 아니라 일본사람과 중국사람한테 어울리는 말투요 일본사람과 중국사람이 쓸 말투라는 소리가 된다고.

 

 ┌ 혼자 타는 차 / 하나 타는 차 / 둘 타는 차

 ├ 1인승 차 / 2인승 차

 │

 ├ 삼겹살 세 사람 치/몫

 ├ 삼겹살 삼인분

 │

 ├ 혼자 쓰(자)는 방 / 하나 쓰(자)는 방 / 둘 쓰(자)는 방

 └ 1인실 / 2인실

 

‘-人用’과 더불어, ‘-人乘’이 쓰입니다. ‘-人分’도 쓰입니다. ‘-人室’도 쓰여요. 이런 말투를 쓰면서 우리 스스로 ‘이 말투가 우리한테 걸맞는 말투인지 우리가 쓸 만한 말투인지’ 돌아보는 일이란 없습니다. 예부터 써 왔다는 생각에 그러려니 하거나, 예전부터 듣고 보고 썼으니 앞으로도 이대로 쓰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두 겹도 한 겹도 아닌 세 겹이라서 ‘세겹살’이지만, 세겹살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한결같이 ‘三겹살’이라고 합니다. 다섯 겹으로 된 살이라면 ‘닷겹살’이나 ‘다섯겹살’이라고 말해야 올바르지만, ‘五겹살’이라고만 말합니다. 밥집에서 “밥 한 그릇 주셔요.” 하고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나, “공기밥 일인분이요.” 하면 금세 알아듣습니다. 오락실에는 ‘일인용’과 ‘이인용’이 있을 뿐, ‘혼자 하는’ 오락이나 ‘둘이 하는’ 오락은 없습니다. 운동경기를 해도 ‘단식’과 ‘복식’뿐이지, ‘혼자’나 ‘홀로’ 치르는 경기와 ‘짝’이나 ‘짝궁’을 맺어 치르는 경기와 ‘여럿이’ 함께 치르는 경기로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로 버릇을 들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로 우리 삶을 추스르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낱말로 우리 생각을 여미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말씀씀이를 북돋우지 못합니다. 이냥저냥 딸려가고, 그냥저냥 흘러갑니다.

 

ㄴ. 작은일과 큰일

 

.. 천하와 국가를 논하는 것이 국회인데 여자와 아이들의 문제는 작은 것이라는 의식이 남성의원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인류의 절반은 여자이다. 이런 여자의 문제가 작은 문제로 취급되는 한 대다수의 남자도 적게 취급받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다나까 미찌꼬/김희은 옮김-미혼의 당신에게》(백산서당,1983) 72쪽

 

 국어사전을 뒤적이면 ‘大事’와 ‘小事’라는 낱말이 실려 있습니다. 토박이말로 ‘큰일’은 실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은일’은 실리지 않습니다. ‘대소사(大小事)’ 같은 낱말은 실리고 곧잘 쓰이지만, ‘크고작은 일’이라는 말은 두루 쓰여도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아니, 못 실립니다.

 

 ┌ 큰일 1 : 다루는 데 힘이 많이 들고 미치는 영향이 넓은 일

 │      2 : 큰 잔치나 예식을 치르는 일

 ├ 대사(大事)

 │  (1) = 큰일 2

 │  (2) = 대례(大禮)

 └ 소사(小事)

     (1) 사사(些事)

     (2) 벌의 등급이 가장 작은 사건

 

부피나 양을 두고 ‘작은무게(적은부피)-큰무게(큰부피)’라고 가리키는 사람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모두들 ‘소량(少量)-대량(大量)’만 말합니다. 장난삼아 ‘대(大) 아무개 고등학교’처럼 말하기는 해도 ‘큰 아무개 고등학교’처럼 말하는 이는 없습니다.

 

마음그릇이 크거나 넓은 사람은 ‘위인(偉人)’이기도 할 터이나, 위인에 앞서 ‘큰사람’입니다. 또는 ‘큰어른’입니다. 마음그릇이 작거나 좁은 사람은 ‘소인(小人)’이거나 ‘소인배(小人輩)’일 터이나, 소인과 소인배에 앞서 ‘작은사람’이나 ‘좁은사람’입니다.

 

 ┌ 큰일 - 작은일

 └ 대사 - 소사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말과 글을 자잘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내몰았습니다. 말을 배운다고 하면 영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을 배우는 일로만 여깁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딱히 어찌어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모두들 용케 잘 쓰고 있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곧잘 틀려도 말 못하는 사람 없고, 글 못 쓴다는 사람 없습니다.

 

좀 어렵거나 이상한 말을 섞어도 그럭저럭 알아듣습니다. 말투가 영 어설퍼도 뜻과 느낌과 흐름을 살피며 알아차립니다. 퍽 용한 노릇인데, 우리 말이 쉬워서 그런지 우리가 똑똑해서 그런지,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낮잡거나 깔보거나 거들떠보지 않아도 말하고 글쓰는 데에 큰 걱정이 없으니, 예나 이제나 우리 말은 찬밥 대접에다가 작은일로만 여겨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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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살려쓰기#토박이말#한글#우리말#우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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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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