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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인터넷 신문에 글을 연재하다보니 가끔 현장 교사들로부터 편지를 받곤 합니다. 제가 쓴 책을 읽고 독후감 형태로 편지를 주시는 고마운 분들도 계십니다. 대개는 읽고 나면 마음이 흐뭇해지는 그런 편지들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편지를 받고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당장 답장을 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모법답안이요, 하고 제 생각을 대강 정리해서 던져주기에는 그의 고민이 너무 깊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감안할 때 그의 고민은 당연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며칠 뒤에야 저는 안부편지에 가까운 무성의(?)한 답장을 보내드렸습니다. 물론 그것이 작은 시작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이라고 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제가 안고 있는 문제를 도저히 풀 수 없고 답답한 심정이 자꾸만 깊어져서입니다.

저는 2년차 밖에 안 된 신참교사입니다만, 2년 동안 학교에 근무하면서 제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꾸만 회의가 듭니다. 저의 역량도 형편없고, 이 학교교육 자체가 갑갑하기만 합니다. 학생들에게 보충수업을 할 때면 제가 도둑놈 같습니다. 보충수업비는 받는데 도무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보충수업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혼자 벽보고 얘기해도 이보단 나을 것입니다.

제가 영어를 가르치는 데 도무지 학생들에게, 특히 영어에 아무 관심도 기초도 없는 학생들에게 제 과목을 꼭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한 반에 35명이상 학생들에게 교사 중심이 아닌 학생 중심의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수업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은 허용을 하고 책을 읽고 싶은 학생도 허용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좀 참담하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선생님은 실업계 학교에 계시면서도 학생들이 영어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시던데 저는 안 하는 학생들을 억지로 시키는 게 너무 힘들고 억지 같아서 차라리 책이라도 읽으라고 하지만, 얘들은 휴대폰하고 수다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바르게 앉아라, 치마 길이가 너무 짧다, 화장 지워, 머리 풀어 등등 이 모든 말들을 해야 하는 게 제겐 고통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당장 윗선에서 압박이 들어옵니다. 제가 무능한 교사가 돼 버리는 겁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듯이 저도 부적응 교사인 듯합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창밖을 내다보며 여기를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도무지 가르친다는 것이 제겐 억지 같기만 합니다.

선생님께서 책에 쓰셨듯이 하루가 선물 같은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아침에 눈 뜨면 학교가기 싫고 학교에 와서도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는 쓰지만 자꾸만 마음이 딴 데로 달아납니다. 이렇게 좋은 가을 날 제 우울한 얘기가 행여나 선생님 기분을 불편하게 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제 답장은 이랬습니다.

선생님, 

보내주신 편지 받고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할 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답장이 늦어졌습니다. 우선,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가 인문계인지 알고 싶군요. 인문계라고 해도 학생들의 형편은 다 다르겠지요. 도시인지 시골인지 평준화된 곳인지 등등을 먼저 알고 싶군요.

편지를 읽고 선생님 말씀대로 부적응 교사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한 편으로는 선생님의 고민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억지로 하는 보충수업에 아무런 고민 없이 적응하고 있는 교사들이 더 문제라는 것이지요. 저도 보충수업시간이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정규수업시간은 좀 다르네요.

어떤 사회이든지 모순과 어려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다만, 그 고민이 생산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겠지요. 그리고 어떤 부분은 기술적으로 처리하거나 가볍게 넘길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화장을 하는 문제 등은 처음부터 허용을 해서는 안 될 일로 규정하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평소 학생들을 편하고 자유롭게 대하시는 선생님의 모습과 너무 달라 보이지 않도록 부드럽고 기술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 부분에 대하여는 제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편지에 자세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학생들의 치마길이가 짧아진 것은 일종의 유행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교사의 지도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도덕적인 잣대로만 잴 문제도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하도록 하지요.

어쩌면 선생님이야말로 좋은 교사의 자질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힘내시고, 시나브로 가을이 오고 있듯이 시나브로 일을 풀어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편지를 보내놓고 저는 '교사의 자질'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좋은 교사는 먼저 학생들을 배려하는 교사일 것입니다. 하지만 학생을 배려하는 좋은 교사가 관리자의 눈에는 유약하거나 무능한 교사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학교에는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교사들이 유능한 교사로 대접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듯이 저도 부적응 교사인 듯합니다'라는 고백은 듣기에도 민망한 참담한 자기부정입니다. 하지만 우리 학교 현장에 이처럼 자기 자신을 뼈아프게 성찰하고 있는 교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마땅히 반성해야할 교사가 반성하지 않는 것은 자기성찰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성찰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 우리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문제이기도 합니다. 창의적인 인간육성 운운하면서 0교시 부활이니, 일제고사 부활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렇지요.

'도무지 가르친다는 것이 제겐 억지 같기만 합니다.'

누구라도 이 고백이 먼저 있고 나서야 진정한 가르침의 도를 깨닫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부적응 교사가 미래의 가장 좋은 교사의 표본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신참교사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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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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