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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노릇 황금빛깔, 들녘의 색깔이 바뀌고 있다. 결실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가을색이 물들기 시작한 농촌에 넉넉함이 배어난다. 씨 뿌리고 정성들여 가꾼 땀이 보람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 집 마당 너머 논배미에서 이웃집아저씨가 풀을 베고 있다. 예초기 날에 풀이 여지없이 쓰러지고 있다. 기계로 하는 일이지만 아저씨는 연신 땀을 훔친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계음을 멈춘다.

"태풍이 길을 바꿔가니 다행이야. 작년엔 추수기를 앞두고 벼가 죄다 쓰러져 애간장을 태웠는데…. 이대로만 가면 올핸 소출도 많을 것 같아. 농사꾼은 풍년이 들어야 배가 부르거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아저씨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농부의 소박한 미소가 빛이 난다. 태풍이 비켜간다는 소리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 텃밭에도 가을이 왔다

우리 텃밭의 가을. 고추, 콩, 더덕, 들깨, 토란, 배추, 부추, 갓, 총각무, 대파, 쪽파, 순무 등이 자라고 있다.
우리 텃밭의 가을.고추, 콩, 더덕, 들깨, 토란, 배추, 부추, 갓, 총각무, 대파, 쪽파, 순무 등이 자라고 있다. ⓒ 전갑남

쌀 한 톨도 소중히 여기던 시절, 풍년이 들면 온 나라가 기쁨으로 넘쳤다. 햅쌀을 빻아 고사를 지내고, 이웃에 떡을 돌렸다. 풍요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려는 농사꾼의 인심이 있었던 것이다. 풍년이 예상되는 올 가을이다. 예전처럼 세상사람 모두가 풍년을 기뻐할까? 농사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일을 마친 아저씨가 마당으로 들어와 우리 텃밭을 둘러본다.

"전 선생네 텃밭에도 가을이 왔네. 이제 끝마무리가 중요하지. 제때 거두고, 곡식이나 먹을거리 간수도 때맞춰 잘하라고! 아무튼 무진 애를 썼구먼."

일년 농사는 끝까지 잘 해야 한다며 이것저것을 알려준다. 아마추어와 프로는 마무리에서 차이가 난다면서 말씀이 많으시다.

며칠간 한눈을 판 표가 난다. 손이 가지 않은 곳에 그새 풀이 엄청 자랐다. 언제 꽃을 피웠을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지만 녀석들도 자기가 생각하기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을 피웠다고 여기겠지! 꽃이 진 자리에는 씨가 맺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자손을 퍼트리려는 지혜가 놀랍다.

아저씨가 돌아간 뒤 우리 텃밭을 둘러본다. 추석 명절을 쇠고 오느라 며칠 밭을 돌보지 못했다. 그동안의 변화에도 궁금하다.

애써 가꾼 텃밭 농사에서 결실을 기다린다

가을을 기다리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봄부터 부산을 떨며 땀 흘려 가꾼 작물들의 결실이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 밭에도 가을이 온 게 분명하다.

1000여주 심어진 우리 고추밭. 아마추어 실력으로 꽤 많은 수확을 했다.
1000여주 심어진 우리 고추밭.아마추어 실력으로 꽤 많은 수확을 했다. ⓒ 전갑남

주력작물인 고추밭은 끝물이 가까워졌다. 농약 치고, 풀매는 것을 등한시해서 그런가! 고추가 병이 들고, 시들시들하다. 그래도 어디인가! 1000여주 고추밭에서 10가마 남짓 수확을 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한두 가마만 더 거두어도 대 만족이다.

세물을 딸 때 아내는 아쉬움을 표했다.

"앞으로 두세 차례는 더 따야 하는데! 당신, 내년에도 고추 많이 심을 거야? 내내 잘 가꾸다가 이게 뭐예요. 아마추어 솜씨로 할 수 있을 만큼만 심자구요."

온갖 정성을 다 쏟았는데도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인 모양이다.

들깨밭. 한창 꽃을 피우고, 씨가 여물고 있다.
들깨밭.한창 꽃을 피우고, 씨가 여물고 있다. ⓒ 전갑남

들깨밭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깻대와 깻잎이 무성한 걸 보니 마음이 넉넉하다. 들깨꽃이 무수히 하얀 꽃을 피웠다. 씨도 여물고 있다. 작은 꽃에 벌과 나비가 찾아왔다. 벌이 바삐 꿀을 찾고, 나비도 훨훨 날아오른다.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이치가 여기에도 있다.

우리는 감자 캔 자리에 들깨모를 심었다. 이웃들한테 모를 얻어다 옮겼는데 모진 비바람에도 가슴까지 자랐다. 얻어 심느라 시차가 있었지만 거둘 때는 한 날이 될 것 같다.

그간 들깻잎은 소중한 채소였다. 깻잎은 쌈으로도, 밑반찬 장아찌로도 맛나게 해먹었다. 이제 여문 씨가 또 다른 선물을 안겨줄 것이다. 기름도 짜고, 들깨가루를 음식에 넣어먹으면 우리 집 소중한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아내는 이제나 저네나 고구마 캘 때를 기다린다. 고구마줄기가 밭고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하다. 고구마줄기에서 힘이 느껴진다.

아내의 관심종목. 강화 특산품인 속노랑고구마를 심었다. 수확을 앞두고 있다.
아내의 관심종목.강화 특산품인 속노랑고구마를 심었다. 수확을 앞두고 있다. ⓒ 전갑남

고구마줄기는 아내의 사냥감이었다. 아내는 줄기를 벗겨 나물로 먹고, 생선을 졸일 때도 함께 지져먹었다. 올해는 고구마줄기로 김치를 여러 번 담가먹기도 했다. 껍질을 벗긴 줄기를 살짝 데쳐 담그기도 하고, 그냥 소금에 절여 담그기도 하는데 김치 맛이 색달랐다.

고구마 농사는 어렵지 않다. 순을 꽂아두고 고랑에 난 풀을 두어 차례만 잡으면 저절로 자란다. 벌레가 먹거나말거나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큰다. 황토인 우리 밭은 단단하여 한 차례 비를 맞고, 땅이 축축해져야만 고구마를 캘 수 있다.

콩밭과 토란밭. 콩밭에는 흰콩, 서리태, 팥을 심었다. 아직 덜 캔 토란은 키가 엄청나다.
콩밭과 토란밭.콩밭에는 흰콩, 서리태, 팥을 심었다. 아직 덜 캔 토란은 키가 엄청나다. ⓒ 전갑남

콩밭에 콩깍지가 달리기 시작했다. 올핸 세 가지 종류의 콩을 심었다. 팥을 심고, 흰콩, 서리태도 넉넉히 심었다. 팥으로는 떡도 해먹고, 팥죽도 쑤어 먹을 셈이다. 흰콩은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그고, 서리태는 밥에 넣어먹고 콩물을 내려 먹을 요량이다.

아직 덜 캔 토란이 키가 엄청나다. 우리는 추석 때 토란을 몇 그루 거두었다. 토란국을 끓여 이웃들과도 나눠먹었다. 토란국을 맛본 옆집 아저씨께는 아주 맛있다며 입담을 늘어놓으셨다.

"전 선생! 토란 캐주면 그 알토란 나눠줄 수 있지? 내년엔 우리도 심어 봐야겠어. 토란국이 보약보다 낫거든. 토란줄기도 좀 주고 말이야!"

토란을 귀하게 여기는 아저씨와 토란을 마저 캐기로 했다. 알토란은 실온에 보관해 가끔 국을 끓이고, 토란줄기는 서리 내기 전에 말려 겨울철 묵은 나물로 먹으면 그만일 것이다.

마음 속에 든 풍년, 넉넉함이 있다

아내가 밭으로 나왔다. 해거름에 밭을 더듬어 반찬거리를 찾는다. 더덕밭에 눈길을 보내며 말을 꺼낸다.

더덕밭. 내년을 기약하며 씨를 여물고 더덕순이 죄다 말랐다. 떨어진 씨와 뿌리에서 내년 봄 새순이 올라올 것이다.
더덕밭.내년을 기약하며 씨를 여물고 더덕순이 죄다 말랐다. 떨어진 씨와 뿌리에서 내년 봄 새순이 올라올 것이다. ⓒ 전갑남

"여보, 더덕이 왜 말라 죽었지? 뿌리는 살아남을까?"
"이 사람 뿌리가 왜 죽어! 씨를 여물리고 수명을 다한 거지!"

더덕 순이 죄다 말랐다. 예쁜 종 모양의 꽃으로, 진한 향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더니 이제 수명을 다하고 겨울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내년 봄에 새순이 올라오면 더욱 실한 밑이 들 것이다.

아내가 부추밭으로 손을 잡아끈다.

"당신, 뭐하려고?"
"부추 베서 겉절이나 하려구요."

며칠 새 부추꽃이 하얗게 피었다. 먼저 베어놓은 부추는 새순이 올라와 연하다. 아내가 한줌 쓱싹 베고, 꽃이 핀 부추는 죄다 잘라냈다. 다시 순이 올라오면 한두 차례는 더 베먹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채마밭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 가을 김장거리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배추잎이 넙적하다. 무우잎도 실하다. 거기다 총각무, 순무, 갓도 제법 자랐다. 쪽파도 파릇파릇하다.

김장거리가 있는 채마밭. 요즘 하루가 다르게 김장거리가 잘 자라고 있다.
김장거리가 있는 채마밭.요즘 하루가 다르게 김장거리가 잘 자라고 있다. ⓒ 전갑남

해마다 우리는 가을 김장거리를 넉넉히 심는다. 김장거리는 솎아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내가 몰라보게 자란 것을 보고 솎을 시기를 재고 있다.

"여보, 주말에 쪽파하고 갓하고 버무리고, 알타리하고 무는 솎아 열무김치 담그고. 배추 몇 포기하고 부추는 겉절이하면 딱 좋겠네!"

아내는 주말에 시간을 비워둘 모양이다. 맛난 가을 김치가 기대된다. 아내 마음 속에도 풍년이 든 것은 아닐까? 어느새 짧아진 해는 붉은 기운을 토해내며 서산에 걸렸다.


#가을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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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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