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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쯤 발견했다. 나는 놀랐다.

 

“민서야, 이 머리핀 뭐니?”

 

동생과 놀고 있던 5살 된 큰 아이는 멈칫 그 자리에 섰다. 그리고 눈만 크게 뜨고 움직이지 않는다. 오전에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왔는데, 오랜 시간 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이거 민서가 가져 왔니? 어디에다 넣고 왔니?”

“말하기 싫어”.

 

아이의 눈자위가 빨갛게 붉어진다. 내가 아이들 옷을 보고 있는 동안 아이가 조금 떨어진 액세서리 가게 앞에 서서 “엄마, 이거 너무 예뻐, 나 이거 사주면 안돼?” 하고 얘기 하던 게 생각났다.

 

“새 거 사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음에”.

 

나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이는 그 물건을 몰래 가지고 온 것이다. 나는 그런 행동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 얘기해 주었고,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는 다짐을 받았다. 아빠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내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직 소유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아이는 요즘 한창 반짝이는 보석, 목걸이, 반지 등에 관심이 많다. 아빠가 사준 ‘귀금속’이 보석함에 한 가득이다.

 

지난 주에는 제 할머니의 결혼 반지를 말도 않고 끼고 왔다가 며칠 지난 뒤에 슬며시 내게 건내 주었다. 알라딘의 얘기에 등장하는 공주 자스민의 초록 보석 박힌 머리띠를 어디에서 살 수 있을지를 묻는다. 동그랗고  파랗게 빛나는 보석 위에 작은 진주들이 뺑 둘러 장식된 예쁜 핀 역시,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 머리핀을 사 주어야 했을까?

 

내가 고르긴 했지만, 새 것을 사준 지 일주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니 허락할 수 없다. 나름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큰 아이가 5살이 된 올 초부터, 아이들이 뭔가 사고 싶어 할 때 나는 항상 그 물건의 ‘필요성’을 묻는다. 그 물건이 왜 필요한지,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그래서 더욱 절제와 절약은 어려서부터 몸에 배야 할 덕목이다. 아이들은 눈에 띄는 물건, TV에서 광고하는 장난감 등은 무작정 갖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고, 사주어도 며칠 지나면 쳐다보지도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나는 장난감, 인형 등은 특히 구매를 자제하고 선물을 사 줘야 할 일이 있으면 책으로 유도하곤 했다. 큰 아이는 나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뭔가 사고 싶을 때면 “엄마, 나 이거 필요해요”라고 적절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출근하는 아빠의 귀에 대고 속닥거린다. 음모를 꾸미듯 말이다.

 

아이는 부모의 그림자라고 했던가. 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줄 아빠와 자로 잰 듯 어림없는  엄마 사이에서 선택의 여지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 ‘아빠’가 늘 곁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리라. 이번에도 필요하다고 말해봐야 엄마는 사주지 않을 것이 불보듯 뻔하다고 판단한 아이는 제 주머니에 그 머리핀을 넣고 집으로 온 것이다.

 

나는 지나치게 엄격한 것일까? 아빠였다면 사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이가 부쩍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백설공주를 보면서 다이아몬드 광산에 가자고 졸라대는 아이를 나는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 너무 멀어 어른이 되어야만 갈 수 있다고 말이다. ‘심미안’이 발달한 아이는 이제 아무 장난감이나 사 내라고 떼쓰지 않는 것 같다.

 

들여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환상적인 세계를 떠올릴 법한 물건들에 시선이 고정된다. 이제는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너무나 갖고 싶은 그 마음이 곧 ‘필요성’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 마음에 공감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어제 직접 가서 돌려 주었다. “아, 그 청치마 입은 아이 맞죠? 그거 만지작 거리는 것 같더라”. 판매하시는 분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머리핀을 주머니에 넣는 그 순간을 조용히 참아준 그 분에게 감사하다.

 

내 아이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엄마’인 것이다. 아이의 모든 말과 행동에 좀 더 민감해지자. 아이의 마음을 읽고 다치지 않게 배려해 주자. 이 사건을 계기로 제 아빠는 조금 더 ‘엄격하게’ 나는 조금 더 ‘허용적인’ 엄마가 되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린이집을 다녀온 아이는 벌써 그 머리핀을 잊었다.


#아이의 소비#아이의 욕구 충족#허용적인 아빠#절제하는 엄마#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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