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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김동호(金東壺) 시인이 새롭게 펴낸 시집 <五絃琴>은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이채로운 시집이다. 표제(表題)인 ‘오현금’은 중국의 순(舜) 임금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다섯 줄로 된 옛날 거문고인데, 칠현금의 전신이다. 먼저 형식적인 측면에서 시집 <五絃琴>을 살펴보면 그 체제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부의 맨 첫머리 시는 장시(長詩)로 편재되어 있고, 곧 이어 4행으로 된 단시(短詩)가 2부에는 11편, 나머지에는 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러한 독특한 체재의 형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종심(從心)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시인이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한데 모아 세상을 향한 다섯의 큰 노래(五絃)를 한번 불러보겠다는 의지의 표상이 아닐까. 그리고 모두 4행으로 처리된 47편의 짧은 단형의 시는 그 큰 노래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삶의 예지(叡智)를 간명하게 들려주는 아포리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굶어 누렇게 부황이 든

소작小作들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개 패듯 패대는 대작大作들이 있었다

‘쌀 나무에서 쌀 털어낸다’고

 

서러움과 무서움 밖에 모르는

양민良民들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개 패듯 패 죽이는 미친개들이 있었다

‘사思, 사상思想을 털어 낸다’고

 

개죽음! 일차대전 이차대전

한국전 월남전 중동전-그 숫한

개죽음들을 보고도 어떻게 그 분은

가만히 있었을까. 꽃을 빚고 꿀을 빚고

무한 무한 화원을 빚은 분이-

 

시집 맨 첫머리에 나오는 제1부의 장시 ‘물음’ 연가戀歌의 1이다. 먹이와 사상을 위해서 사람을 패죽이고 전쟁으로 삶을 파멸시키고 있는 이 세계의 부정적 징후를 선명한 언어로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꽃을 빚고 꿀을 빚고/무한 무한 화원을 빚은” ‘그 분’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 라고 항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도 언어이다/하늘이 준 언어이다/짐승에겐 없는 인간의 언어이다”라고 표명하고 있다. 위 시에서 시인이 제시하고자 하는 ‘물음’ 즉 ‘?’는 “존재의 근원을 파는 보드라운 물음”이고 “0의 실타래 막-풀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또 그것은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자모양으로 몸을 말고 있”는 것으로 진술하면서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의 모습인 ‘물음’(?)이 제대로 살아나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곧바로 생명(生命)이고 사랑의 본체인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의 바다엔 왜가 없다”(왠지는 모르지만)라는 진술에 우리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사랑과 생명에 무슨 이유를 물을 수가 있는가?

 

김동호 시인의 새 시집 <五絃琴>에는 “존재의 근원을 파는 보드라운 물음” 아니 짧지만 큰 물음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석양의 거울

투명 반사를 받아

마침내 온 누리 비춰주는

영경靈鏡이 되네

-「석양의 거울」전문.

 

일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 사특한 이기심과 욕망에 휘둘려 상대를 짓밟고 빼앗고 죽이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인간에게 위 시가 전하는 ‘석양의 거울’을 비춰줘야만 하겠다. 단 4행 밖에 안 되지만 위 시가 거느리고 있는 함의(含意)는 참으로 광대하다. “석양의 거울”이라는 비유와 영경(靈鏡)이라는 상징적 빛을 많은 사람들에게 되비춰주고 싶다.

 

제2부의 장시 나무와 여인들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사람의 질병, 복제인간과 생명의 문제를 노래하고 있다.

 

“먹는 기쁨이 클까요

싸는 기쁨이 클까요”

“고플 때는 앞이 크고

찼을 때는 뒤가 크니라”

 

-「신진 대사大師」전문.

 

신진대사(新陳代謝)라는 생물학 용어를 변용한 ‘신진 대사大師’라는 제목 비틀기가 재미있다. 생물학 용어인 신진대사(Metabolism)는 생물체가 생존과 성장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영양분 섭취와 이를 새로운 물질로 전환시켜 에너지 생산으로 이뤄지는 일련의 화학적 반응을 가리키는 말이다. ‘먹이가 들어가고 나오는’ 이 신진대사는 곧바로 생명의 결이다.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는 곧 죽음이 들이닥친다. 이를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빼앗음과 파괴, 살육은 생명의 큰 가르침을 거스르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대사(大師) 큰 가르침과도 같다.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가르침일 것이다. 이는 곧 ‘음양의 조화’를 노래한 다음 노래에도 그대로 통하는 일이다.

 

불과 물이 꽃을 낳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이 세상을 사나

물과 불이 서로를 끄지 못한다면

무슨 수로 이 큰 화원을 지키나

 

- 음양가 전문.

 

인간(人間) 세계는 혼자서 살 수 없다. 함께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 의해서 이뤄지고 발전한다. 그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진정 인간이 아니다. 인간 세계의 상징인 ‘큰 화원’에 꽃이 피어나는 삶이 실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곳이 화원(花園)이고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계일 것이다. 음과 양의 조화, 서로의 참되고 올바른 만남이 사람과 세계의 생명을 존재케 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김동호 시인의 사람과 세계를 향한 깊은 사색의 시선은 3부 만남의 밭에서 “고기가 물을 사랑하듯/나무가 흙을 사랑하듯/인연 사랑하다 가는 사람들/그들을 천산들은 천사라 한다”라 노래하고, 5부「원무圓舞」라는 시편에 “바람이 물결을 깨운다/물결이 바람을 재운다/햇살이 이슬을 바수고/이슬이 햇살을 사방에 전한다”라는 노래로 이어진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 김동호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만남의 밭’이 제대로 실현되고 인연과 생명을 살리는 춤인 ‘원무圓舞’가 제대로 펼쳐질 때 죽임의 나라가 아니라 사랑의 나라가 도래하리라. 이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고 있는 “하늘은 노래하고 땅은 춤”추는 일이요, “만유로 향하는 사랑” 과 “만유로부터 오는 사랑”이 가득한 세상일 터이다.

 

죽음과 생명이

은밀히 만나는 아지랑이 다리

유무간有無間을 흐르는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너는 노래하라

나는 춤춘다

-(중략)-

사방에서 축가 피어오르고

천지가 손뼉을 치며 손뼉을 치며

손을 잡고 다가오는 곳

 

다섯 현絃을 타고

다섯 갈래로 퍼지던 노래가

진공에 빨려 우음偶吟

다시 한 음 되어 돌아오네

 

제5부의 첫머리 장시 <과일잔치> 끝부분의 노래이다. 퇴직한 노교수 김동호 시인의 세상과 생명을 온전히 모시고자 하는 깊고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김동호 시인이 시집<五絃琴>에서 다섯 갈래의 현(絃)으로 노래한 제1부 ‘물음’ 연가, 제2부 나무와 여인들, 제3부 옥류동, 제4부 환타지아, 제5부 과일 잔치, 이는 결국 “뼛속의 물음들을 시로/발효醱酵 시켜”(시인의 말) 부른 세상과 생명을 건져 올리는 한 음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천궁天弓 같은 용수철”(과수원에서)로 세상으로 번져 가리라.

 

필자는 김동호 시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모른다. 불교나 천도교, 기독교 그 어떤 종교라도 그것이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부르는 노래가 환경 파괴와 생명 파괴의 죽임의 세상으로 가는 것을 붙들고 혼신의 힘으로 생명의 세상으로 건져 올리려는 ‘기도’임에 주목한다.

 

그는 “어떤 물이기에/뼈 속 불까지 쓸어낼까/어떤 불이기에/혼 속 얼음까지 녹여낼까”(기도)라고 자신의 노래가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다. 시집 <五絃琴> 맨 뒤쪽에 수록된 시 나의 소원처럼 “과일 향으로 타는 악기”인 김동호 시인의 노래가 어둔 세상의 골목골목으로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시올문학> 2008년 가을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뮤즈에게

김동호 지음, 고요아침(2002)


태그:#김동호 시집 <오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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