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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 파피루스에서 e-북, 그리고 그 이후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 파피루스에서 e-북, 그리고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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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감옥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는 명언을 남긴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 의사가 남긴 말은 비단 그 시대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의 힘이 부족하여 국권을 강탈당하는 사태에 직면하여 안중근 의사는 그 원인을 공부하지 않은 데서 찾은 셈이다. 

책은 이렇듯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다. 문자를 만들어낸 기원전 6000년 무렵부터 인간은 기억을 이미지와 글로 고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 이전에 기억은 구술로 전달되었는데, 그것은 망실과 변형의 위험을 언제나 내재하고 있었다. 문자 발명 이후 인간은 보다 정확하고 오랫동안 문자정보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장치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책은 인간의 그런 노력을 총체적으로 보장하는 최고의 발명품이다. 한 권의 책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많은 장인들의 노력이 뒤섞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와 역자는 물론 삽화와 디자인전문가, 제본사, 편집자, 종이제조자 등등. 컴퓨터의 광범한 보급으로 개인출판이 가능해진 오늘날에도 책에는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있는 것이다.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니콜 하워드 지금, 송대범 옮김, 플래닛미디어 펴냄)는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 책의 진화에 대한 연대기다. 원제는 아주 단순하다. 그냥 <책 The Book>이다. 그것을 출판사가 독자들의 이해와 판촉을 위하여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다. 서책에는 책의 시초부터 현재와 미래의 책까지 대략 2800년 정도의 기나긴 역사를 추적한다. 그 여정을 따라가 보자.

책의 시초와 구텐베르크(기원전 800년부터 16세기까지)

주지하듯이 기원전 2600년 무렵 이집트 사람들은 파피루스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다. 서기 1세기 무렵부터 인간은 파피루스 대신 양피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4세기가 되면 양피지가 파피루스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 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내구성이 강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언제 어디서나 공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대 동양, 특히 중국에서는 파피루스 대신 대나무를 이용한 서책의 보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공자가 활동했던 기원전 500년 무렵 '죽간(竹簡)'이란 이름으로 통용되었던 책자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죽간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도 출토되어 화제가 되곤 한다. 그것을 통한 지식과 정보유통에 대한 내용이 서책에는 일절 언급되지 않는다.

제지술이 8세기에 무슬림세계로 전파되었고, 바그다드에 도읍을 둔 아바스 칼리프가 서적제작에 박차를 가한다. 832년에 '지혜의 집(바이트 알 히크마)'가 설립되어 서적 제작과 번역 중심지가 되었다. 무슬림 치하의 에스파냐 코르도바에 대형 도서관이 세워져 40만 권의 장서를 자랑했다. 무슬림의 이런 유산을 발판으로 유럽은 르네상스와 대면한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기억해야 할 인물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9~1468)다. 마인츠의 명문 귀족 출신인 그는 1453년 무렵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시대를 개막한다. 지식대중화가 시작된 것이다. <수량화혁명>의 저자인 크로스비는 1453년의 기념비적인 사건을 동로마제국 멸망이 아니라, 인쇄기로 출판되기 시작한 서적의 등장이라고 주장한다.

책의 성장기(16~18세기)

16세기 이후 유럽에는 책을 필요로 하는 유식한 독자층이 급속하게 증가한다. 전문학자 이외에도 은행가와 상인 계층출신의 열성적인 지식인이 새로운 독자로 부상한다. 그 결과 1480년 유럽전역에 100개 정도 존재했던 인쇄소가 1500년이 되면 260개 도시에 1100여개로 늘어난다(100~119쪽 참조). 이에 따라 도서출판도 급속하게 확장된다.

영국에서 촉발된 자국어 출판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종교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루터의 성서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인 <마틴 루터의 신약성서>는 비텐베르크의 멜히오르 로테르 인쇄소에서 발간되었다. 3000부가 넘는 1쇄가 두 달 만에 다 팔리자 즉시 2쇄가 발행되었다. 루터 성서는 1522-1525년 사이에 적어도 8만 6천부가 인쇄되었다. 책값은 일반노동자의 반달 내지 두 달 치 급료에 이를 만큼 비쌌다." (122쪽)

인쇄기로 발간된 책은 주로 종교 관련 서적이었지만, 과학과 인문학 서적출간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해부도>가 1543년에 출간됨으로써 다가올 과학혁명을 예견하였다. 이와 아울러 리옹과 프랑크푸르트에 도서박람회가 개최됨으로써 서적의 대량판매와 교환이 가능해졌다.

17~188세기에 일어난 변화 가운데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지적재산권 보호와 '백과사전' 편찬이었다. 1710년 영국에서 저자에게 최초로 원고통제권을 부여하였고, 18세기 말에 저작권은 유럽전역에 확산되었다. 이로써 저자의 권리가 대폭 신장되었고, 원고 해적질과 해적출판이 사라지게 되었다. 지식 생산과 보급이 한층 고양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8세기 유럽에는 종교와 정부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사고방식을 혁신하는 문화적-지적운동이 진행되었는데, 그 시기를 이성의 시대 혹은 계몽기라 부른다. 계몽기 사상가들의 최고업적은 <백과사전>이었을 것이다. 모든 지식의 요약으로 생각된 28권 전집은 디드로의 감독 아래 1751년에 시작되어 1772년에 완성되었다." (206-207쪽)

계몽기의 사고방식을 대표한 <백과사전>은 도처에서 인간이성을 강조하고 종교적 신비주의나 국가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교회와 국가의 박해로 <백과사전>은 1759년에 공식적인 금서목록에 오르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로써 유럽은 지적이고 정신적인 성장과 아울러 미증유의 과학기술문명과 대면할 차비를 갖추고 19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성숙기와 미래의 책(19세기와 그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과학기술혁명으로 촉발된 19세기 유럽의 전면적인 혁신은 새로운 독자인 부르주아를 양산한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신문에 주목하였고, 신문의 확산은 기술발전과 함께 서적의 질적 향상과 결부된다. 스탠호프의 철제인쇄기(1803), 쾨니히의 실린더인쇄기(1814)와 켈러의 나무펄프를 이용한 종이제작 발견(1843) 등이 그것이다.

1837년 프랑스의 발명가 다게르는 은판사진법을 발명하였는데, 그것이 오늘날 사진의 전신이다. 인쇄업자들은 이미지로 책을 돋보이게 하려고 삽화가들을 대신하여 즉시 은판사진법을 채택하였다. 사진술의 폐해를 강조한 1839년 <뉴요커> 사설은 흥미롭다.

"주로 과학적 목적, 기계도면복사, 그리고 자연사 연구대상의 기록이라는 분야에 국한되지만 복제가 판치는 세상(사진)에서는 현재와 같은 창조적 예술 활동은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242쪽)

자동화 시기였던 19세기를 경과한 이후 20세기에서도 책은 계속하여 경이로운 변화를 경험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우리는 복사기와 저렴한 문고본 및 전자출판을 들 수 있다. '제록스(Xerox)'라는 이름을 가진 복사기가 1960년에 어느 사무실로 팔려나간다. 하루 2000~3000장까지 복사함으로써 제록스는 복사기의 대명사가 된다.

복사기와 더불어 '페이퍼백(Paperback)'으로 표현되는 문고본의 등장이 서적시장을 뒤흔든다. 1837년 유럽에서 '타우흐니츠 문고'로 시작한 문고본은 '에브리맨 시리즈'를 거쳐 1923년 '알바트로스 문고'로 진척되다가 1935년 '펭귄북'과 1939년 '펠리컨북스'로 절정에 이른다. 그리하여 1960년에 페이퍼백의 판매고가 하드백을 추월하기에 이른다.

1980년대의 핵심적인 기술인 개인컴퓨터와 레이저 프린터를 활용하는 전자출판은 전통적인 의미의 발행인이란 존재를 증발하게 만든다. 전자출판은 '원고작업, 페이지작업, 디지털화된 그래픽의 저작, 원고와 그래픽의 통합 같은 모든 출판과정이 컴퓨터에서 수행(269쪽)'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자책 e-book'을 예비하는 전단계이다.

맺는 글

"우리에게는 공짜학교도 인쇄물도 없는 점을 하느님께 감사드리오며, 앞으로도 수백 년 동안 그런 것들이 없도록 하소서. 배움이 불복종과 이단과 분파를 낳게 하였고, 인쇄가 그런 불손한 것들과 훌륭한 정부를 비방하는 중상모략을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주여, 부디 우리로 하여금 이 두 가지를 멀리하도록 하소서." (158쪽)

1671년 미국 버지니아 총독이었던 버클리가 내뱉은 말이다. 책과 그것에서 파생된 정보가 불러온 폐해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이다. 지배자들의 압제와 통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형식으로 책은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의 독서의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책은 인간영혼과 정신의 청량한 보관처이자 영원한 원천인 셈이다.

사진이 그림을, 영화가 연극을 대신하지 못한 것처럼 영상이 전통적인 의미의 서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늘날 전자책이 현저하게 확산, 보급되고 있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서책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지은이의 생각은 의미 있다.

"문화가 아무리 변하고 전자책이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의 손을 거친 순수예술로서 책은 남아 있을 것이다. 수작업으로 하는 목제나 철제인쇄기의 유산으로 수제활자, 수제인쇄, 수제제본도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적인 기술, 그것은 다름 아닌 책이다." (282쪽)

덧붙이는 글 |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니콜 하워드 지음, 송대범 옮김, 플래닛미디어, 2007.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 - 파피루스에서 e-북, 그리고 그 이후

니콜 하워드 지음, 송대범 옮김, 플래닛미디어(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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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역사를 살펴보다!

#책#인쇄기#종이#복사기 #지적재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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