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수구레한 나이에 전날 샤워실이 들여다 보이는 경북 안동의 한 모텔에서 호강(?)을 하고 도산서원을 향해 출발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날씨는 언제 장대비가 뿌릴지 모를 듯하다.
시원한 들바람을 맞으며 길을 재촉하는데 오른쪽으로 얼핏 '오천유적지'라 쓰여진 팻말이 보이고 한옥 여러 채 스쳐 지나가는데 왠지 그냥 가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차를 다시 되돌려 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들어가니 곧이어 시야가 넓어지며 얕은 언덕 기슭에 잘 관리된 한옥이 여러 채 나온다.
입구 게시판에는 재미없는 제목으로 '군자마을 체험장 약도'라 쓰여 있고 배치도가 붙어 있다. 곁에 깨끗하게 붙여놓은 '오천유적지(烏川遺蹟地)' 설명을 보니 광산 김씨 예안파(이곳의 옛지명은 예안면이었다)가 600년 동안 살고 있던 마을의 문화재급 건축물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처지에 놓여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라 적혀 있다.
씨족으로 이루어진 포항 안강읍 양동마을에 가면 이와 같은 한옥들을 많이 볼 수 있으나 우중충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유난히 끌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나라 가옥은 유명하다는 곳을 둘러보면 양반집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초라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되고'송을 한번 짚어 보아야 한다. '옷은 몸을 가릴 정도면 되고, 음식은 허기를 면할 정도면 되며, 집은 비바람을 피할 정도면 된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더구나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씨엔 호화 빌라가 아니더라도 비를 그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거실에 앉아 있어도 겹겹히 차단된 유리문 밖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퀭한 빈 하늘뿐인 것이 아파트에서의 삶이다. 뽀송뽀송한 온돌바닥에 궁뎅이를 지지며 모란 이파리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마당 한가운데 나와 앉아 울어제끼는 개고리를 볼 참이면 이미 엑스터시에 도달했다 할 것이다.
오묘종죽오묘예소 반일정좌반일독서(五畝種竹五畝藝蔬 半日靜坐半日讀書, 다섯 이랑은 대나무 심고 다섯 이랑은 채소 심어 반나절은 책을 읽고 반나절은 명상을 한다)
선비가 밭을 갈지야 않았겠지만 채마밭이 곁에 있으니 아침 저녁으로 밭에 나가 피 뽑고 줄기 세우고, 해뜨면 들어와 툇마루와 뒷담장으로 통하는 창을 활짝 열고 차 한 잔 마시며 사색하고 글을 쓴다. 번잡스럽게 눈뜨자마자 TV 틀어놓고 신문 들고 화장실부터 가는 우리네 아득바득 살림살이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시대가 바뀌니 지고선(至高善)으로 여겨지던 '빨리빨리'의 조급증은 지고 악으로 치부되던 '느릿느릿'을 찾는 웰빙시대가 되었다. 어느 정도 살림살이가 되니 양보다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이 시류가 됐다.
그러나 나이가 들 만큼 들어 서울생활 청산하고 시골에 땅사서 어줍잖게 전원생활을 하니 주말마다 아들딸 식구가 내려와 손주들 재롱 보며 오순도순 살려던 꿈은 아들딸 친구들과 내려와 밤새워 술마셔서 동네 사람 시끄럽다 하고 뒤치다꺼리에 지칠 즈음 그나마 발길마저 뜸해지고 만다.
오천유적지의 가옥들은 이전을 한 것인 만큼 옮길 만한 가치가 있는 잘생긴 한옥들과 현대적인 배치로 아담하고 깔끔하다. 말을 타고 계단을 올라가 솟을대문을 지날 리 없건마는 그런 구도도 나름대로 운치 있고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와 대청에는 우산이 걸려 있어 문이 닫혀 있어도 방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고 무얼하고 있는지, 띠살문 사이로 헛기침하듯 절로 짐작이 간다. 각 가옥은 담장과 중간문으로 느슨하게 구획지어져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
중앙에는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후조당(後彫堂)'이 자리하고 있다. 넓직한 대청이 왠지 충남 아산 맹씨행단이 연상되는데 맹씨행단이 대청 좌우에 방이 있어 좀 답답한 느낌이라면 후조당은 방같은 넓은 대청이 누각형태로 된 방과 독립되어 훨씬 호방한 느낌을 준다.
잠시 기웃거리는데 아까 주차장에서 보았던 희끗한 머리에 댕기를 하신 내방객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나누니 벌써 하루 묵었다 한다. 이 넓은 후조당을 혼자서 차지하고 있었다니 그 여유가 부럽기만 하다.
최일남의 <서울사람>처럼 시골생활을 동경해도 이틀 버티기 힘들다. 추사가 아무리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의 만남)이라 외쳐봐도 깡보리밥에 막걸리도 이틀 계속 먹으면 신트림만 올라오는 것이다. 또 전원생활이라 할지라도 아들, 딸 식구도 한두 번 오고나면 뜸해지는 것이 바쁜 현대생활이다. 괜히 일 저질러 놓고 후회하지 말고 맛보기로 휴가 때 이렇게 좋은 곳을 하루 이틀 빌려서 오붓하게 한유(閑裕)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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