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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아이들은 처음으로 내 품을 떠나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4살, 5살된 아이들은 둘이 함께 가게 되어서 그런지 가지 않겠다고 심하게 떼쓰고 울진 않았다. 물론 1, 2주 정도는 아침에 셔틀버스 탈 때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먹거리기도 했다.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6개월 남짓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다녔고, 선생님은 여름방학과 함께 그간 아이들을 보살펴 온 소견을 보내 주었다. 모두 다섯 분야로 건강, 사회, 표현, 언어, 탐구와 종합의견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작은 아이는 집에서도 활달하고 적극적인 애교쟁이인데 그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런데 큰 아이의 종합의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모든 면에서 항상 침착하고 친절하며 바른 태도로 인사하는 예의바른 어린이입니다. 다만 정해진 시간안에 활동을 마무리 하는 모습이 힘겨워 보이며 다소 지연되는 면이 아쉽습니다. 가정에서 민첩성을 길러 줌으로써 정해진 시간내에 하나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지연’, ‘민첩성’, ‘과업수행’ 등과 같은 용어에 마음이 쓰인다. 데리러 가던 날 넌지시 선생님에게 어떤 식으로 지연되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색칠하기 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칠하기를 모두 마치고 크레파스를 정리할 때까지 큰 아이는 반 정도가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민서가 그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여자 친구들이 공주를 그리고 눈의 눈동자까지 그리는데 민서는 그렇지 않아요. 대신 민서는 오리고 붙이기를 잘하고 좋아해요.”

옆집에 사는 아이의 고모에게 얘기해 보았다. 옆집 사는 조카는 초등학교 1학년이라,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국어, 수학, 영어의 기초를 학습하기 때문에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려면, 혹은 선생님 눈에 띄려면 ‘그리기’와 ‘체육’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아이도 매번 그리기 수업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해 수행평가가 좋지 않다고도 했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내에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또 다른 얘기도 듣게 되었다. 그 학교에서 수영 수업을 할 때마다 1등하는 아이가 있는데, 특히 남자 아이들 사이에서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큰 부러움의 대상이란다.

그런 아이는 기세등등하게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아이의 엄마가 제 아들을 수영에서 1등하게 만들려고 3년전부터 맹렬히 강습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학교 들어가서 기죽지 않으려면 서너살 되면서 많은 과목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 고모도 “요즘 아이들은 배속에서부터 배우고 나오기 때문에 태어나서 많은 것을 학습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는 쪽이다. 조카 역시 국어와 수학, 영어, 피아노, 과학교실, 컴퓨터, 축구 등 빡빡한 일정이지만 무리없이 소화해 내는 듯하다. 그런 아이들 고모도 3년 전부터 계획적으로 수영을 가르쳐 온 엄마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른다.

그런 얘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 생각하게 된다. ‘민첩성’을 길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나는 또 괘념치 않는다. 나를 믿고 나의 아이를 믿기 때문이다. 설마 눈치가 있는데 계속 그러기야 할까. 아직도 가끔은 ‘가’와 ‘기’가 헷갈리지만 초등학교 졸업 때 까지는 알 수 있으려니 한다.

공주의 눈동자를 그릴 생각은 하지 않지만, 티슈로 여자 인형의 드레스를 만들어 입히는 아이다. 언제나 오천원 균일로 물건값을 부르고 열둘부터는 가물거리지만, 해가 지나면 한 살 씩 나이를 더해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두 돌 지난 어느 날 부터 쉬를 가리더니 그 후 한 번도 이불에 지도를 그린 일이 없는 아이다.

“하늘이 퍼즐조각처럼 떨어지면 그 위에 뭐가 있어?”라고 묻기도 한다. 누군가 과자나 사탕을 사 주면 꼭 동생 것까지 챙겨가지고 오는 아이다. 오늘 오지 않은 친구를 걱정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안부를 챙기는 아이다. 밤에 책을 읽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읽어준 그 내용을 제 말로 풀어 동생에게 들려준다.

주위를 돌아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속도를 숭배하는 세상인 것 같다. 시계에 맞추어 살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라고 가르친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1등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사작전 같은 일상은 일분일초도 허투루 보낼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연령대의 아이들이 더 빨리 자라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천천히 생각해 보자. 4살, 5살 된 아이들이 행복하게 웃고 신나게 뛰어노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체험이 있을까. 하바드 대학 학장이 매년 신입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제목은 ‘속도를 늦추세요(Slow down)'라고 한다. 대학은 물론 인생에서도 너무 많은 것을 하지 않음으로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휴식하고 이완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라고 말이다.

나는 ‘엄마의 의견’란에 이렇게 썼다.

‘집에서는 틀에 맞추어 혹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마쳐야 하는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놀이를 충분히 하고 나면 스스로 다른 놀이를 창조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린이집에서도 정해진 시간에 과업을 마치지 못했다면 마친 그 부분까지를 칭찬해 주세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좋았을까 덧붙여 주세요.’


#육아#선행학습#속도 줄이기#느리게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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