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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발행한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1960년대 발행한 초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 최병렬

"이리와, 이리와, 바둑아 나하고 놀자."
"집으로 가아. 바둑아, 집으로 가아. 영이한테 가아."
"두 개, 두 개, 사과 두 개. 언니 한 개, 나 한 개."

1948년 문교부가 발행한 '철수와 바둑이(국어 1-1)'의 한글 가르침을 시작하는 대목에는 씩씩한 철수와 영이가 등장한다. 지금 철수와 영이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 국어교과서는 읽을거리가 별로 없던 50~60년대 당시 아이들에게 최고로 인기 있는 책이었다. 표지의 예쁜 아이들은 몽당연필과 색연필로 베껴 그리기의 모델이 되었고 아이들은 책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도 했다.

철수와 영이, 바둑이, 복남이, 영수가 등장하는 이 교과서는 지난 2006년 '교과서의 날 제정추진위원회'가 정부수립 후 문교부가 최초로 발행하여 학교에 공급한 책으로 '초등국어 1-1' 탄생일인 10월 5일을 '교과서의 날'로 정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국어교과서 특별전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 포스터
국어교과서 특별전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 포스터 ⓒ 서울교육사료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며 정독도서관 부설 서울교육사료관은개화기부터 현재까지의 국어교과서를 통해 우리말과 우리글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고자 기획한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 국어교과서 특별전을 오는 6일부터 개최한다.

2009년 2월 21일까지 6개월간 열리는 특별전에서는 개화기, 일제강점기, 광복 후 등사판을 이용해 임시로 제작한 국어교과서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문교부에서 발행한 '바둑이와 철수' 제목의 국어교과서 등 650여점에 달하는 국어교과서가 공개된다.

전시회 목록에는 근대교육의 시작이던 개화기의 소학독본류는 물론 교과서 최초로 삽화가 등장하는 1896년 대한제국 학부편찬 '신정심상소학'과 우리나라 최초로 국어라는 명칭으로 발행되었던 대한제국 '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 등 희귀본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제2외국어로 강등되었던 조선 총독부 발행 모든 '조선어 독본'들이 총망라돼 있으며 조선시대 초학 아동이 익히던 천자문과 유합(類合), 훈몽자회(訓蒙字會), 정음 창제 후 근대 한글까지 문자의 맥을 이어주던 운서(韻書)인 정음통석(正音通釋)과 삼운성휘(三韻聲彙), 규장전운(奎章全韻) 등 귀중한 책들도 선을 보일 예정이다.

서울교육사료관은 "국어교과서가 여러 교과서 중에서 단지 한 종의 교과서가 아닌 우리고유의 정신과 전통 그리고 한 시대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인간상이 담겨 있는 훌륭한 지침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어 이번 국어교과서 특별전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발간한 한글 첫걸음, 1947년 미 군정청이 발행한 초등국어교본
1945년 해방과 함께 발간한 한글 첫걸음, 1947년 미 군정청이 발행한 초등국어교본 ⓒ 최병렬

'철수와 영이 그리고 바둑이'전은 크게 4개 부스(Booth)로 나눠 전시된다.

제1부스는 개화기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제국 학부편찬 교과서이고, 제2부스는 조선 총독부 발행 조선어 교과서이며, 제3부스는 미 군정청 학무국 발행 교과서, 마지막 부스가 대한민국 문교부 발행 국어교과서다.

4개로 나뉘어진 전시 부스만 얼핏 보아도 지나온 100여년간 4개 정부에서 우리 교과서를 발행해 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굴곡 많았던 우리민족의 현대 100년사(史)는 바로 우리 국어교과서의 험난했던 100년 역사였음을 보여준다.

또 6.25전쟁 중 발행된 교과서 대부분이 지질과 인쇄가 매우 열악한 반면 같은시기에 발행된 교과서임에도 어떤 책은 지금으로서도 고급에 해당될 만큼 좋은 지질에 컷 그림도 상당히 높은 안목을 보여주는 등 특이한 점도 많다.

서울교육사료관 황동진 학예연구사는 "6.25전쟁 피난지에서도 천막교실, 노천교실을 지어 학교교육의 그 명맥을 유지하고 이에 감동한 세계 각국의 관심과 도움이 유네스코 등을 통해 전달되면서 원조 받은 종이로 교재를 제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0년대 문교부에서 발행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1950년대 문교부에서 발행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 최병렬

"말과 글은 문화의 정수이며, 국어는 그 민족의 혼이기 때문에 우리 말과 글의 시작인 국어교과서야말로 우리 혼의 집약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회는 헌옷을 벗어 던지듯 무심코 버려진 국어 교과서만을 수집하는 외길 20년을 걸어온 한 소장가의 집념과 정성이 깃들여 현재까지 국내에서 사용된 모든 종류의 국어교과서를 한자리에 모아 최초로 공개하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 또한 매우 크다.

도서 소장자인 김운기(52·안양시)씨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모든 종류의 국어교과서를 한자리에 모아 최초로 공개한다는 점에서 감개무량하다"면서 "교과서의 변천사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 교육적 효과도 매우 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인 2006년 10월 안양시에 있는 스톤앤워터 전시공간에서 '한글 560년, 국어교과서 100년전'을 연 적이 있다. 당시 시간과 장소의 제한으로 모두 전시하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으나 이번 특별전에서는 모든 교과서를 총망라하는 방대한 자료를 선보인다.

 국어교과서 특별전 초대장
국어교과서 특별전 초대장 ⓒ 자료

너무 흔해서 그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국어교과서, 그래서 이제는 희귀하게 된 국어교과서를 한자리에 모아 꿈과 추억을 선사하는 자리를 마련한 사람이 있다. 건축가이자 시인이며 안양시검도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어교과서 수집 외길 20년을 걸어온 김운기씨를 만나봤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나만이라도 해야 했다

건축회사를 운영하는 김운기 대표에겐 '국어교과서 수집가'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닌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왜 국어교과서를 수집하게 되었는지 묻곤 한다. 무슨 돈이 되는 골동품이나 미술품도 아니고 하필이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국어교과서'냐는 것이다.

20여년 오로지 국어교과서만을 찾아다닌 김운기 대표의 집을 방문해 보면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우리가 알아 왔던 몇 권 안 되는 국어교과서가 이토록 방대하다는 데 한 번 놀라고 그 많은 자료(1500여점)를 개인이 혼자서 발굴하고 수집했다는 것에 두 번 놀라게 된다.

"작정하고 시작한 건 아니고 우연히 헌책방에 들렀는데, 오래된 국어 교과서들의 무게를 달아 폐지로 파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모으기 시작해 재미가 생겨서 빠짐없이 챙기게 됐지요. 사실 학교 졸업하고 나면 교과서를 누가 쳐다보기나 합니까."

시인인 김운기 대표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도 헌책방을 순례하는 게 취미인 그는 1987년께 삼선교에 있는 고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교과서들을 무게로 달아 고물상에 넘기는 장면을 목격하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국어교과서 몇 권을 샀다.

그때 사온 책에서 같은 학년 책이라도 연도가 다르면 삽화나 문장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고, 연도별로 내용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한두 권씩 사 모으다가 몇 년 후부터는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국어교과서를 수집하는 길로 들어섰다.

10년 만에 찾아낸 '바둑이와 철수' 이젠 몇권 안돼

대다수 사람들은 국어교과서는 교육부(現 교육과학기술부)나 국립도서관 같은 관련 기관에서 당연히 보관해 놓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 김 대표의 말이다. 국어교과서는 너무 흔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사라지는 줄도 모르게 사라져 이제는 희귀한 책이 되었고, 그동안 정부는 물론 교과서를 만든 회사에조차 전혀 보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국어교과서가 분명 흔한 책은 아닌 것이다.

특히 이번 기획전 주인공 격으로 불과 60년전 대한민국 건국 당시 문교부에서 처음 펴낸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 '바둑이와 철수'는 현재 국내에 서너권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운기 대표도 수집을 시작한지 10여 년 만에 만난 것이라고 하니 책 한 권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국어교과서 수집가 김운기씨
국어교과서 수집가 김운기씨 ⓒ 최병렬
책 손에 넣었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수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한 달치 월급과 맞바꾼 책도 부지기수입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손에 넣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해요. 지금도 마음에 드는 책이 경매에 나오면 가슴이 설레어 경매 전날은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주말마다 헌책방을 바삐 뒤지고 다니느라 정신 없었지요. 한 10년 그랬더니 수집가들 사이에 소문이 나 제가 찾는 책 값이 엄청 뛰는 바람에 모으기가 더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어렵사리 희귀본을 구하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더라고요.

수집하는 사람 치고 가족, 특히 아내의 내조 없이는 지속적으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20년동안 이 일을 해올 수 있는 데는 아내의 도움이 매우 컸지요. 주기적으로 책에 거풍을 하는 일이나 허드렛일은 아내 몫이니까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운기씨는 이번 여름에 인도 여행을 떠나면서 꼭 사고 싶은 책이 있어 아내에게 경매 입찰을 부탁하고 갔다. 부인 박씨는 혹 낙찰되지 않으면 남편이 실망하게 될까봐 남편이 제시한 경매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적어 넣어 낙찰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 박용자(45)씨는 "교과서 수집에 남편을 뺏긴 것 같아 서운할 때도 많다, 그렇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일이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不狂不及)'는 그의 신념을 부인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국어교과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꿈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서울대와 서울대 환경대학원을 나와 대우그룹 기획조정실과 금강기획에 재직한 바 있으며 1995년 건축·인테리어를 전문으로 하는 동단건축(주)을 설립해 현재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백암빌딩 3층에 본사를, 서울 강남에 서울사무소를 두고있다.

대학시절 야학을 하며 안양과 인연을 맺었으며 서울에서 살다 집과 사업체를 모두 안양으로 옮긴 지 여러 해다.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의 교범인 국어교과서가 이번 전시를 통해 국민 모두에게 자긍심과 역사 의식을 갖게 되는 매개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김운기씨는 '국어교과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꿈이라고 말한다.

국어교과서 박물관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하나씩 풀어나가고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추억의 보물창고를 마련하고픈 그의 소망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양#국어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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