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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의 플로리다 반도에는 매년 많은 사람들이 내려온다. 바닷가에서 화려한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고, 늙거나 아프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은 1년 내내 온화한 기후지만 다른 장점도 있다. 멕시코 만의 단조로운 햇살과 물살은 바라보기만 해도 치유의 효과가 생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듀마 키(Duma Key)는 이 지역의 섬 이름이다. 플로리다 반도 주위에는 '무슨 무슨 키'라는 이름의 섬이 많다. 듀마 키도 그중 하나다. 길이가 15km에 제일 넓은 폭도 1.5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듀마 키>(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서 묘사하는, 이 섬에서 바라보는 플로리다 서해의 모습은 절경이다. 멕시코 만이 발밑에 펼쳐지고, 멀리 돈 페드로 섬과 케이시 키가 꿈처럼 떠다닌다.

 

이렇게 멋진 경치와는 달리, 이 섬 자체의 분위기는 왠지 어둡다. 살고 있는 사람도 몇 명 안되고, 섬 남쪽에는 수풀이 울창해서 마치 정글 같다. 남쪽은 지하수, 식물, 공기까지 모두 오염돼 환경이 안좋다고 한다.

 

작고 어두운 분위기의 섬, 듀마 키

 

그 이유는 2차 대전 중에 미 육군 항공단이 그곳에서 벌인 실험 때문이다. 사방에 옻나무가 널려 있는데 그 옻나무는 미국에서 가장 독한 종이다. 플로리다 반도의 쾌적한 휴양지와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소설 <듀마 키>의 이야기는 이 섬으로 에드거 프리맨틀이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가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한때는 잘 나가던 건설업체의 사장이자 수천만 달러를 가진 재산가였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가 그를 덮치면서 그의 화려한 생활도 끝장이 났다. 건설현장에서 생긴 사고로 오른팔을 절단하고, 뇌에도 큰 손상을 입었다. 다리와 대퇴부 뼈에도 이상이 있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사고의 후유증으로 이혼을 하고 그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듀마 키로 혼자 내려온 것이다. 뇌에 손상을 입었지만 말하고 듣고, 생각하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 오른팔을 절단했지만 에드거는 왼손잡이다. 말하자면 불행중 다행인 셈이다.

 

에드거는 섬 한쪽의 집을 빌려서 자리잡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고 한다. 자신을 돌봐줄 파트타임 도우미를 한 명 고용하고, 재활을 위해서 운동과 산책을 병행한다. 없어진 오른팔이 되살아나지는 못하겠지만, 예전처럼 걷고 뛰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이 섬에 과거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섬에 살고 있는 몇 명의 사람들과도 친구가 된다. 학창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서 소일거리로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 그리고 에드거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주변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생겨난다. 에드거의 눈에 헛것이 보이는가 하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한순간에 간파하게 된다.

 

사고 후 휴양을 위해 듀마 키를 찾아온 남자

 

처음에는 일반적인 플로리다 해변의 풍경화 또는 정물화로 시작했지만, 그의 그림은 점점 환상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그 그림들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을 한꺼번에 내포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드거의 작업속도도 점점 빨라진다. 어떤 창작의 재능을 뒤늦게 발견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엄청난 속도로 창작에 몰입하는 경우가 있다. 에드거의 경우도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인다.

 

더욱 이상한 점은 에드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그림을 그려나갈 때도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 지 알지도 못한 채. 듀마 키 섬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에드거에게 그런 그림을 그리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에드거의 재능을 점점 증폭시키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듀마 키>의 작가인 스티븐 킹도 약 10여 년 전에 에드거처럼 커다란 사고를 당했다. 자신의 집 주변에서 산책을 하다가 승합차에 받힌 것이다. 에드거처럼 팔을 절단한 것은 아니지만, 다리와 대퇴부 뼈가 엉망이 되는 중상이었다.

 

스티븐 킹은 수개월 동안 병원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매일 100알쯤 되는 약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걷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사고도 스티븐 킹에게는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작가 스티븐 킹이 겪었던 커다란 사고

 

<듀마 키>의 초반부에는 병원에 누운 에드거가 자신의 모습에 절망한 나머지 주위에 대고 화풀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모습은 에드거가 아내에게 이혼 당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에드거처럼 공격적이지는 않았더라도 스티븐 킹도 그에 못지않게 좌절하고 상심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을 덮친 불행과 싸우면서 스티븐 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병실을 벗어나면 멋진 작품을 하나 쓰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와 그에 따른 악몽 같은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매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육체적 고통, 예전처럼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스티븐 킹은 퇴원하고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때로 글은 치유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망가진 육체와 상처 입은 정신에 희망을 불어넣는 가장 상냥한 마법이기도 하다.

 

듀마 키에서 그림에 몰입하던 에드거의 모습은, 사고 이후에도 글쓰기를 놓지 않았던 스티븐 킹 자신의 모습이다. '호러의 제왕'이라는 별명답게 스티븐 킹이 선택한 것은 역시 호러 소설이었다. 가끔씩 공포에 직면하는 것도,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한 괜찮은 방법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듀마 키> 스티븐 킹 지음 /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펴냄.


듀마 키 1 - 스티븐 킹 장편소설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2008)


태그:#스티븐 킹, #듀마 키, #공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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