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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다가 다쳐 입원 중이다. 나중에 역사가 '저더러 이 순간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있어야겠기에 나왔다. 저는 당당하게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전국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로 뜨거웠던 5월 30일 저녁. 창원 정우상가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 때 환자복을 입고 나온 서정홍 시인이 마이크를 잡고 한 말이었다. 그는 환자복에다 목발을 짚은 채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서정홍 동시집 <닳지 않는 손> 표지.
서정홍 동시집 <닳지 않는 손> 표지. ⓒ 윤성효
그랬던 서정홍 시인이 동시집을 냈다.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이란 제목이 붙었다. 흙에서 생명을 일구는 손으로 빚어 낸, 흙냄새 꽃냄새 나는 동시집이다. 그는 지금 합천 황매산 기슭에 생태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아버지, 어머니 손.//무슨 물건이든/쓰면 쓸수록/닳고 작아지는 법인데/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나무로 만든/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쇠로 만든/괭이와 호미도 닳는데/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나무보다 쇠보다 강항/아버지, 어머니 손."(동시 "닳지 않는 손" 전문).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예지 게재 우수 작품'으로 선정했던 시다. 시인이자 농부이고, 부모이자 자식이며, 어린이의 마음을 가졌기에 더욱 부끄러운 어른인 서정홍 시인만의 따뜻한 시선과 생생한 시어가 돋보인다.

""아버지, 농촌에는 왜/할머니와 할아버지밖에 살지 않을까요?/할머니와 할아버지 돌아가시면/누가 농사지을까요?/우린 무얼 먹고 살지요?"//"누가 또 농사짓겠지./조그만 게 별걸 다 걱정하고 있네./공부나 열심히 해. 이 녀석아!"//아버지는 마치 남 일처럼/툭 말씀하시지만/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다//'이렇게 달고 구수한 고구마/두 번 다시 못 구워 먹겠지.'/할머니와 할아버지/다 돌아가시고 나면."(동시 "'고구마 캐기' 행사에 다녀와서" 전문).

서정홍 시인이 사는 동네뿐만 아니라 어느 농촌에서나 겪는 일이다. 농촌은 이제 어르신들만 사는 동네나 마찬가지다. 아이의 물음에 아버지는 "누가 또 농사짓겠지"라고 대답했다. 현재 농촌의 현실을 보면 이 말이 정답일지 모른다. 그래도 농촌을 걱정하는 아이가 있으니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하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다.

이 책에는 어린이의 마음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아토피 피부염에 걸려서 고생하고, 부모님의 이혼으로 고통 받는 오늘의 어린이에서부터 할머니 돌아가시던 날 크레파스 사 달라 떼썼던 어린 시절을 후회하며 우는 어머니 속의 어린이도 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의 무덤가에 난 고사리로 끼니를 이었어도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말하는 할머니 속의 어린이까지.

시인은 말한다. "각기 처한 시절의 성장통을 어린이다운 순수함으로 이겨 냈거나, 겪고 있는 모든 어린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북돋웁니다. 그 '어린이'다운 힘을 칭찬하고, 희망을 발견하게 합니다. 또한 할머니 할아버지와 부모님, 부모님과 나를 이어 거듭되는 부모자식 간의 애틋한 사랑처럼, 세대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가치를 확인시켜 줍니다"고.

어린이문학 평론가인 김제곤씨는 "서정홍 선생이 기른 고추나 감자, 배추가 밥상에 올라 우리의 목숨을 이어 주듯 선생이 쓴 시들은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양식이 된다"며 "서정홍 선새이 쓴 시를 보면 농사를 짓거나 시를 쓰는 일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고 말했다.

1990년 '마창노련 문학상'과 1992년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던 서정홍 시인은 지금 생태학교 '강아지똥 학교'를 열고 있다. 그는 동시집 <윗몸일으키기>와 <우리 집 밥상>, 시집 <58년 개띠> <아내에게 미안하다> 등을 펴냈다. 이번 동시집에는 화가 윤봉선씨가 삽화를 그렸다.

"우리 고모는/전자제품 공장에 다닙니다/그런데 공장에만 가면/스트레스 받아 옵니다//사장이 일 빨리빨리 하라고/만날 잔소리 해대는 바람에/스트레스 받아서 미치겠다는데/할머니가 한마디 거듭니다/"야야. 오데 받을 끼 없어서/스트레스를 받아오노./일을 했으모 돈을 받아 와야지."//"어머이. 돈은/월급날이 돼야 받아오지요."//"야야. 스트레스는 만날 받아오면서/돈은 와 만날 못 받아 오고."//"아이고오 어머이, 말도 안되는 소리 마이소. 아하하하 아하하하…."//말도 안되는 할머니 말씀에/우리 고모 스트레스는/온데간데없습니다."(동시 "스트레스" 전문).


닳지 않는 손 - 서정홍 동시집

서정홍 지음, 윤봉선 그림, 우리교육(2008)


#서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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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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