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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기억하기로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거의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어떤 집에선 한 달도 채 못 살고 이삿짐을 꾸리기도 했다. 남들은 달랑 한 장인 주민등록등본이 우리 집은 두 장, 세 장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한 마디로 우리 집은 가난하다는 증거였다.

그러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함께 살았던 집은 네 가구가 한 마당에서 같이 사는 집이었는데 그 집엔 다락방이 있었다. 엄마는 아마도 처치곤란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마구 집어넣어 놓을 심산으로 그 집으로 이사한 것 같다. 말하자면 창고 용도로 쓰던 곳이 다락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끔 쥐도 들락날락거리는 그런 곳. 그래서인지 엄마는 다락방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어느 날, 엄마가 외출한 틈을 타서 나는 다락방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다락방은 불도 들어오지 않아서 어두웠고 눅눅하고 그야말로 '음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락방은 나의 '아지트'가 되었다.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지만 셋이나 되는 동생과 늘 같이 한 방을 써야 했던 나에게 다락방은 어디선가 내게 뚝 떨어진 바로 나만의 비밀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미 엄마가 '쥐'라는 놈이 있다는 것을 동생들에게 알림으로써 동생들은 다락방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터다.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나는 다락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락방에는 엄마가 생각하는 처치곤란한 물건들만 쌓여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굴레'나 '카네기 처세술' 같이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책들도 수북하였고 백과사전류의 책들도 있었다.

낡은 찻상을 앉은뱅이 책상으로 하고 어두운 다락방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켰다. 그 책상에서 박목월과 박두진 시인의 시도 베껴 쓰고 동화를 쓴답시고 원고지에 끄적거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사놓으신 그 어려운 책들도 몇 번씩 뒤적거려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다락방이 좋았던 것은 작은 창문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고 따스한 한줄기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빨간 머리 앤'이 살던 초록색 지붕의 집처럼! 파란 하늘은 나의 상상의 도화지가 되었고 한줄기 햇살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그러나 나의 아지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다락방에서 살풋 잠이 든 나는 엄마의 고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얘가, 얘가… 너 여기서 뭐하냐?"
내 앞에는 방 빗자루를 든 엄마가 떡하니 버티고 서계셨다.
"어, 엄마…. 어, 저기…."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뭐하냐! 여기 쥐들 놀이턴데 여기서 뭐해? 이놈의 가시나, 쥐벼룩 옮는다, 빨리 안 내려가나!" 엄마의 호통소리에 나는 다락방을 거의 미끄러지다시피 내려왔다. 그날 나는 엄마한테 온갖 잔소리를 다 듣고 느즈막에 목욕까지 해야했다. 물론 다락방은 출입금지였다.

그 후 얼마 안 가 우리 집은 또 이사를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사한 집엔 다락방이 없었다. 나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무산되었다. 그 후로 나는 다락방을 만나지 못했다.

스무 번 이상이나 이사를 다니면서 그 집 역시 내 가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집이었는데 왜 유독 그 다락방이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그렇게 남은 것일까. 유년 시절 가난이 주었던 차가운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아주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으로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다락방에서 내가 꿈을 꾸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다락방에서 가난때문에 떨어야 했던 추운 기억을 녹였고 얼어붙어 있었던 희망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던 나의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태그:#마음, #다락방, #꿈,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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