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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7일 촛불문화제가 열리던 시청 광장에 설치된 진보신당 칼라TV 뉴스본부
지난 6월 7일 촛불문화제가 열리던 시청 광장에 설치된 진보신당 칼라TV 뉴스본부 ⓒ 진보신당 제공

간혹 신문에는 영화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 사건들이 기사로 실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런 기사를 볼 때면 그냥 피식 웃고 넘겨버린다. 그런데 만약 이런 기사들이 하루에도 여러 건 지속적으로 계속 올라온다면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요즘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종이 신문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방송 등을 통해 연일 보도되고 있는 뉴스를 접하면서, 필자는 묘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미디어의 가상 세계와 현실이 헷갈리는 일시적 착란현상을 겪곤 한다.

반면에 분기탱천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며 그 현실의 잔혹함에 수도 없이 상처입기도 했다. 또다른 시민들은 진보신당의 <칼라 TV>를 통해 촛불집회 생중계를 보면서 리포터와 함께 플레이어로서 이른바 '토탈게임'에 참여함으로써 광장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6월말 <오마이뉴스>에 <칼라TV> 진행자(리포터 혹은 캐릭터)인 진중권 교수가 칼라TV의 인기비결을 분석한 글을 올렸다(클릭). 진 교수의 글은 어떻게 보면 제작자의 입장에서 '웹2.0세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끼면서 '뉴미디어의 속성'에 집중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플레이어나 제작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수용자' 입장에서 바라본 <칼라TV>에 대한 글이다. 다시 말해, 극장처럼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시체처럼 앉아서 <칼라TV>에 몰입되어 체험했던 다양한 감정들과 생각들에 관한 사적인 보고서이다. 

"내가 마치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느껴"

처음에는 인터넷 신문을 통해 거짓말 같은 현실을 관람했다. 이때까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정치권과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나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게시판에 내 의견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고, 당장이라도 광장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웹 페이지는 내 코 앞에 있으면서도 너무나 멀게 느껴졌고, 디지털화 된 문자로서 활자매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화질의 영상으로 실시간 생중계되는 <칼라TV>는 마치 내가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에 땀이 배었다. 그것은 단지 매체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된 영상을 봤다면, 리포터의 생생한 현장 상황 설명과 플레이어들의 참여로 발생하는 일종의 내러티브가 없었더라면 나의 몸은 마치 내가 반만 그 곳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현장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진 교수가 언급했듯이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했다. 인간의 확장이란 쉽게 말해 미디어가 인간의 눈과 귀, 팔과 다리가 되어준다는 의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미디어와 교류할 때 오감을 통해 얻게 될 상호작용의 역동성을 의미한다.

나는 <칼라TV>를 통해서 (졸렬하고 비겁하게도) 방에 가만히 앉아서 전경과 대치해 있는 최전선의 극한 상황과 저 후방의 축제와 같은 분위기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떨어진 광장의 기쁨과 비통함, 환희와 절망을 단순한 '접속'만으로도 즐겁게 유희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인식의 확장인가.

도대체 누구냐 넌?

<칼라TV>는 장르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뉴스인가 다큐멘터리인가 아니면 영화인가? 사실을 보도한다는 측면에서 뉴스이고 사건현장을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이고 시청자들에게 만족감을 주고 인기를 얻었다는 측면에서 영화다.

사실 이런 형식을 가진 미디어를 장르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에서 뭔가 그럴듯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칼라TV>가 얼마나 많은 형식들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

<칼라TV>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시간으로 두 달 이상동안 연속 상영(종영은 시청자 마음대로). 상영관은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곳이면 어디든지. 영화 장르로 치자면 (미친 쇠고기에 의한) 재난영화에 가깝지만, 가끔은 감동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하고, 코미디도 있고, 뮤지컬도 있다. 간혹 사람의 손가락을 물어뜯는 변종인간도 등장하니 SF영화이기도 하고, 역사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으니 역사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라TV>의 이러한 무한한 잡종성 속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역사에 대한 기록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80년 5월 광주의 기록필름을 보았듯이, 87년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둥켜 안은 한 친구의 사진을 보았듯이, 훗날 우리의 후손들도 <칼라TV>가 담은 영상을 볼 것이다.

그 때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지독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우리가 얼마나 슬기롭게 대처하고 우리의 권리를 수호했는지 그 어떤 기록들보다 생생하고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칼라TV>의 예술성

만약 벤야민이 <칼라TV>를 실시간 생중계로 직접 봤다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아마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는(요즘은 디지털 시대의 예술작품. 오히려 복제가 더 용이해졌다)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아우라'를 <칼라TV>가 구현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예술작품이 생산된 시간과 공간의 일회적 존재성에 기반하고 있는 아우라는 영화와 같은 기술복제품에서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칼라TV>는 실시간 생중계를 통해 이 아우라를 다시 소환했다. 내가 느꼈던 것은 분명 아우라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확장된 내가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들에게 쫓기던 그 상황과 그 때 느꼈던 위기감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다시 느낄 수 없는 유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시간이 흘러 그 당시 기록된 영상을 다시 본다면 그 영상은 적어도 나에게는 아우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칼라TV>가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진중권 교수도 언급한 바 있는 몰입효과를 유발하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촉각성'과 앞에서 내가 말한 '인간 확장'의 본질적 개념 때문이다. '촉각성'과 '인간의 확장'은 수용자를 보다 현실과 가까운 위치에 서 있도록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수잔 손탁은 "예술작품은 현실 세계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지식, 경험, 가치관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예술작품 고유의 특징은 (… ) 작품 자체에 완전히 사로잡히거나 매혹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흥분, 참여, 판단에 연루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스타일상의 요소는 바로 '표현성'이다"라고 말했다.

<칼라TV>의 표현상 특징은 핸드헬드 카메라와 실시간 생중계, 그리고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리포터와 플레이어가 함께 만들어가는 내러티브에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라TV>를 보고 마치 실제로 자신이 방패와 곤봉에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고, 일부는 이에 흥분하고 고무되어 그 악몽 같은 현실에 저항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또한 <칼라TV>의 인터뷰를 통해 촛불문화제의 축제 같은 분위기와 참가자들의 순수한 열정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칼라TV>는 국민에게 현실에 대해 최소한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직접 참여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미술관에 전시되어 현실과 유리된 예술작품들과는 달리 <칼라TV>는 거리의 정치를 거리의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개인적인 <칼라TV> 예찬론이 근거 없는 '괴담'으로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촛불이 꺼지지 않는 한 <칼라TV> 뿐만 아니라 <오마이뉴스>, <시사IN>, <프레시안>, <민중의 소리> 그리고 1인 미디어들과 같은 뉴미디어들이 촛불 곁을 항상 지킬 것이라는 것과 그들이 있어서 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광장에 모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보신당#칼라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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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과 머묾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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