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꽉 막혀서 답답해하는 나를 보고 '내일(15일) 소래나 한번 가지'한다. 지난 연말부터 시작되었던 답답증은 몇 달 가서 약간 풀어지더니 또 다시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또 다시 나를 옥죄온다. 그러나 그렇게 쳇바퀴에서 벗어나 봐야 얼마 안 있어 한정된 공간에 길들여진 다람쥐는 또 다시 체념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또랑또랑해서 슬픈 눈으로 바퀴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힘들지 않아?'라고 묻는 말을 '애 뒤치다꺼리에 몸이 피곤하지 않느냐'는 말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토요일 저녁쯤 바람쐬러 나갈 생각을 하던 터에 기를 한번 죽여놓고 일요일 아침 '널너~얼한' 시간에 마지못해 나가게 되었으니 김빠진 맥주 마시는 기분이다. 소래에서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간단히 젓깔 몇 개 사고 나니 별로 갈 곳이 없다. 축제는 끝났다지만 파주 심학산 퇴물 꽃구경이나 하고 올까?
파주출판문화단지와 헤이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몇몇 문화인들과 건축가들이 주축이 되어 '친환경적인 문화공간'으로 태어난 곳이다. 몇 년 전에 몇 개의 건축물들이 완공되어 입주하게 된 후,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곳은 헤이리보다는 오히려 파주출판문화단지가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비좁은 국토에서 그들만의 오붓한 문화공간을 마련하려는 꿈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지 모르겠다. 심지어 아기엄마인 딸도 아는 '딸기가 좋아'는 바로 헤이리에 있었고,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주차하기 힘들 정도로 온 마을을 외지인들이 헤집고 다니고 있어서, 아기는 또래 꼬맹이들하고 즐거운 시간을 지냈을는지 몰라도 마을을 유모차를 끌며 한가히 산책하려던 그림은 아예 그려볼 수도 없었다.
풍경화는 뒤집어놓고 파주출판문화단지로 가니 초입부터 교통순경과 밀려든 차로 인산인해다. 꽃잔치를 한다는 심학산 일부에는 주차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이 들끓고 책잔치를 한다는 단지 내에는 출판사 직원도 축제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 아이들 책 위주로 팔고 있는 출판사 매점에서 아기가 좋아할 책을 몇 권 사들고 자리를 뜬다.
그렇게 헛물을 켰던 것이 지난주라 아무리 축제가 끝났어도 시든 꽃 몇 개는 볼 수 있겠지 하고 파주출판문화단지로 들어선다. 수년전 들러보았던 한길사와 정보센터 구실을 하는 전망대는 건물들이 많이 들어차서 그 곳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꽃잔치가 끝난 행사장 근방에 가니 무려 150만이 다녀갔다고는 하나 다행히 꽃들은 아직 퇴물이 아니었다. 큰길 곁에서부터 가느다란 꽃가지에 달린 개양귀비는 산들바람에도 붉은 치마폭을 하늘거리는 것처럼 선정적으로 꽃술을 보여준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보니 언덕 하나가 온통 꽃천지이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돌곶이 마을 전체가 꽃밭이다. 심학(尋鶴)산의 학들은 지척간에 이렇게 수많은 기화요초들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원효대사처럼 내공을 쌓지 못한 고고한 학들 또한 어지럼증에 소나무에서 추락하는 것 아닐까 걱정된다. 그 흔한 정상의 빨간 파고라마저도 그럴듯해 보이고 노소미추를 불문하고 여인네들 또한 꽃이 되어 버린다.
꽃에 취해 벌개졌는지 뙤약볕에 벌개졌는지 모를 나는 그예 아기에게 선물할 책 사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고, 그날 밤 법흥사 입구 무릉리와 도원리 사이 요선암에서 도닦고 있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