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무너져가고...다음날 아침, 벼르고 별렀던 호스텔의 15파운드짜리 일일투어조차 인버네스로 돌아가는 기차시간과 맞지 않아 포기해야만 했다.
자꾸만 틀어지는 계획에 억장이 무너지지만 징징댄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어쨌건 오늘은 월요일이다. 평일이다. 버스가 다니는 날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심호흡을 한번 해주고는, 버스에 올라 섬 안쪽으로 뛰어든다.
하일랜드에 빠지다.어제 호스텔에서 만난 글라스고 출신 대머리 아저씨는 “스카이섬이 처음인데도 맑은 날씨를 만난 너는 대단한 행운아야”라던데, 여기에 구름 좀 끼고 황혼이 지면 그야말로 천국이겠다. 살아서는 돌아보지 못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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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카이섬 어디를 가나 풀을 뜯고 있는 양과 말들을 볼 수 있다. 풀 밖에 나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초원에서의 해답은 낙농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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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여자만 보면 말 걸고 사진 찍으려 안달이다. “우와 저 산에 올라갔다 왔다고요? 길도 없잖아요. 못 믿겠는데?”라니 늘씬한 금발 미녀들이 단체로 까르르 웃는다. 일정이 빵꾸가 나든, 한 번 타는데 6000원 이라는 터무니 없는 버스 요금에 환장하든, 물 사 마실 돈도 아까워서 헐떡이든, 무슨 꼴을 당하건 간에 영어만 쓰면 기분이 좋다. 남들 보기에 한심해도 어쩔 수 없다. 영어 쓴 상대방이 예쁜 여자이고, 거기다 사진까지 한방 박으면 더위, 허기, 갈증, 피로, 짜증. 한방에 다 날아간다. 나름대로 터득한 여행중의 스트레스관리방법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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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남자 배낭족들이여, 고난을 잠시 잊기 위해 금발들에게 들이대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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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리 와봐!!”하고 부르니 진짜로 코 앞까지 아장아장 걸어와서 포즈를 잡아준다. 한국말이 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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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소 하일랜드 카슬(Highland cattle) 사진을 찍기 위해, 진흙 산 위의 소 울타리를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넘어간 용기까지는 가상했다. 카메라를 들고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나를 바라보는 소들의 시큰둥한 시선이 점점 더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상북도 문경의 어느 시골자락이다. 그러니까 나는, 동네 형들 쫓아다니며 냇가에서 개구리, 메뚜기 잡아 구워 먹고, 산만한 황소 등에 올라 타서는 똥 냄새 많이 난다며 나무작대기로 쇳등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놀던 추억을 가진 하드코어 촌놈이다.
하지만 하일랜드 카쓸의 앞머리와 뿔은 나도 좀 무섭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무섭다. 결국은 제대로 다가가보지도 못하고 “음메~”하는 소 울음 소리에 질겁하고 거의 엉덩방아를 찧다시피 하며 도망쳐버린다.
나중에, 카일오브로할슈에서 파는 엽서로, 하일랜드카쓸의 앞머리에 감춰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배짱 좋게도 소 바로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큼직하고 새까만 눈망울이 이거 뭐, 앞머리만 빼고는 우리 동네 뒷집 원석이형아네 아부지가 키우시던 그 소, 내가 타고 놀던 그 황소랑 똑같이 순하게 생겼다. 사실 소는 다 순한데, 순하니까 사람이 잡아서 키울 수가 있었던 건데 나는 멍청하게도 생긴거에 쫄아서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 했던거다. 사람이든 소든 첫인상만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돌아갈 버스편이 없네?이번엔 꽤 큰 문제가 생겼다. 양 구경 말 구경 소 구경 한답시고 섬 북쪽의 윅(Uig)으로 가는 버스 시간을 놓친건 그냥 그렇다 치자. 카일오브로할슈로 돌아가는 버스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놈의 버스는 오지 않는다.
버스시간표 책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내가 SCH, 즉 School Holiday인 토요일, 일요일의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는걸 깨닫는다. 정상적인 월요일의 버스 스케줄대로라면 나는 인버네스로 돌아가는 기차도 놓치고, 인버네스에서 에딘버러로, 에딘버러에서 글라스고로 가는 버스도, 글라스고에서 빠리로 날아가는 라이언에어도 놓치게 될 기가 막힌 운명에 처해질 터이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바로 어제도 실패한 경험이 있지만, 히치하이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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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만 안 흘리고 있다 뿐이지 표정은 곧 죽을상이다. 이 와중에 평소에는 좀처럼 찍지도 않는 셀카 찍을 생각은 어떻게 한 것일까.. |
ⓒ 이중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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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만 말하자면, 수백 대의 차들이 줄줄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중에서 마지막 차에, 아직은 여기 올 시간이 아니라고, 이제 그만 천국에서 나가 달라는 천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카일오브로할쉬와 인버네스를 연결하는 기차구간은, 론리플레닛에서도 최고의 풍광으로 손꼽힌다. 거친 남성을 연상시키는 광활한 불모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사진만으로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형제의 나라 스코틀랜드인버네스와 스카이섬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한국사람이 스코틀랜드 사람이면 누구와도 순식간에 친해지는 방법을 터득해냈다. Gent 부부에게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써 먹을 수 있다.
어떤 파랑눈에 노랑머리가 내게 와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도 보고 소설 칼의 노래도 봤어요. 이순신은 참 훌륭해요. 하여튼 일본은 나쁘더군요’라고 한다면, 그 친구 참 대견해 보이고, 뭐라도 한 숟갈 더 떠먹이고 싶어하는게 인지상정이다.
“나 여기 오기 전에 윌리암 왈라스와, 롭로이에 대한 영화도 봤고 책도 읽었다. 그 친구들 진정한 사나이더라. 하여튼 잉글랜드 같은 애들이랑 같이 살아서 기분이 안 좋겠다”라니 화들짝 좋아한다.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강제로 통합한 거랑은 정 반대로, 남한과 북한도 원래는 한 나라인데 소련과 미국이 억지로 갈라놔서 이지경이 되었다”라는 말에 젊은 부부는 "오호~"를 연발하며 이해하는 눈치다.
그러고 보니 한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는 비슷한 구석이 꽤 많다. 앞으로는 스코틀랜드를 내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련다.
영국에는 네 나라가 있는데 한국은 북한과 남한 말고 다른 나라가 또 있냐는 물음에는 "남이랑 북 밖에 없긴 한데 아주 오래전에는 일본이 한국 왕실에 세금 내는 동생나라였다. 그러다 잘 해주니까 한국 주변 섬들이 자기네 땅이라며 갑자기 배반하더라"라고 대답해버리고는 혼자 키득키득 웃는다.
뭐 상관 없다. 우린 형제의 나라니까 다 이해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lrclub,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