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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세이를 사랑한다는 갈리나

김태수는 바이칼 호수의 보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마주 앉아서 노를 젓고 있는 갈리나에게 이윽히 눈길을 주었다. 물안개가 소리 없이 보트 아래로 깔리고 있었다. 그는 멀리 호수와 황혼이 맞닿아 있는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갈리나!"

갈리나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 본 적이 있나?"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볼 뿐 말이 없었다.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느냐고."

갈리나는 눈을 작게 뜨고 오랫동안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혹시 김태수란 사람 아닌가?"

그녀는 환히 웃더니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럼 어떤 놈이지?"

그녀는 짤막하게 말했다.

"예니세이!"

김태수는 웃었다. 그는 예니세이가 강 이름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바이칼은 300개나 되는 강과 시내로부터 물을 받으면서도 그 물을 단 한 군데로만 흘려보낸다고 했다. 그 강이 예니세이고, 다시 예니세이는 5000킬로를 더 흘러 북극해와 잇닿는다고 했다.

동시에 예니세이는 전설에 나오는 주인공이기도 했다. 바이칼 추장의 딸이 사랑했던 청년 이름이 예니세이였다. 갈리나는 지금 그 청년이 자기의 연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정색을 한 갈리나는, 흔히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왜 타인이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를 자기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갖고 있어요. 하지만 나와는 다른 영혼을 가진 사람이겠지요."

가서 그녀를 만나자

김태수는 또 백주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작정 돌아가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뭔지 모를 그의 이성은 그를 바이칼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멀리 있는 것이 그녀를 위해 옳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있으면 필경 그녀를 번민하게 만들 터이었다. 그는 그런 삶은 오히려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며칠 동안 그녀 곁으로 가고 싶은 욕망과 치열하게 싸우며 버텼다. 결국 그는 가지 않아야 된다고 최종적으로 마음먹었다.

갈리나는 호텔에 올 때 직장에 있는 중국 신문을 가져오고는 했다. 무료한 김태수에게 읽을거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어제 김태수는 신문에서 신규식의 죽음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상해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현듯이 하게 되었다. 그는 백주원에게 돌아갈 수 있는 스스로의 명분을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고서라도 그는 백주원에게 한사코 다가가고 싶었다. 그러자 그녀가 떠날 때 한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오시면 쑥대머리를 들려 드릴게요.’

그는 백주원이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그는 작은 모멸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내심으로 자기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거죠?"

갈리나의 물음에 김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가고 싶어."

갈리나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석양이 그녀의 얼굴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며칠 전 적색군 혁명대는 이르쿠츠크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고 했다. 그들은 일본인과 한국인을 무조건 체포해서 투옥한다고 했다. 이르쿠츠크에서 기차를 타지 못하면 중국에 갈 방법이 달리 없었다. 갈리나에게 역에 나가 살펴보라고 했다. 갈리나는 기차를 안전하게 타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곳곳마다 무장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리나 역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머지않아 적색군은 이곳까지 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백색군 장교의 가족을 죽이기도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게다가 갈리나는 공무원이기도 했다.

김태수와 갈리나는 호텔에서 며칠을 더 묵었다. 그들은 이제 곧 놓아야 할 연인을 서로 불태워 버리는 듯한 밤을 보냈다. 갈리나도 냉연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이국 남자를 빨리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호수 너머 작은 어촌에 삼촌 가족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거길 가려면 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밤에 소리 내지 않고 천천히 가더라도 아침 무렵이면 닿을 수 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말을 구할 수 있나?"

"잘 모르겠는데요."

김태수는 갈리나에게 조각배 하나를 구입하라며 돈을 주었다.

"이건 너무 많아요."

"갈리나도 피신 다니려면 필요할 거야."

김태수도 이미 마음을 굳혀 놓고 있었다. 평원과 사막을 가로질러 몽고의 울란바트로로 가면 중국 장춘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가 있었다.

그들은 달빛을 받으며 조각배에 올랐다. 조각배는 호수의 물살을 소리 없이 갈랐다. 두 사람은 숲에서 나오는 이름 모를 맹수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도 뱃전에 부딪히는 물소리를 턱없이 한가롭게 듣기도 했다. 그들은 이따금씩 달을 올려다보며 300리의 물길을 건넜다. 짙은 물안개에 여명이 배고 동녘이 희부옇게 트여질 무렵 그들은 조각배에서 내렸다. 그들은 얼른 부둥켜안고 싶어서 서둘러 배를 버렸다.

갈리나의 삼촌은 김태수를 극구 말렸다. 혼자 가다가는 길을 잃기가 십상이라고 했다. 김태수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 순진해 보이는 러시아 어부는 맹수가 아주 많다며 눈을 부라려 보였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지금 연재 중인 제1편 '상해의 영혼들'은 다음 회로 끝나고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가 바로 이어집니다.



태그:#바이칼, #예니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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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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