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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대학교 엔터테인먼트과 학과장인 엄근(56)씨의 전화기는 쉬지 않고 울린다. 학과장이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만도 한데 주중에는 퇴근 시간을 넘기기가 일쑤이고 토, 일요일을 반납하는 것도 익숙하다.

 

교수의 특권인 방학과 안식년에는 '쉬어' 본 적이 언제인지 아득하다. 장안대학 주최의 제 2회 전국 신인 오디션, 국고지원 페이퍼, 연차평가서 준비, 장안대학의 해외 거점 개발까지 그가 맡고 있는 사업이 끝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 요새 매우 바쁜 것으로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맡고 있는지?

"정신없다. 작년에 처음으로 개최했던 전국 신인 오디션이 올해로 2회째를 맞는다. 1회 합격자 2명은 지금 소속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작품을 준비하는 중이다. 2회째를 맞는 만큼 그 감회도 새롭다.

 

국고를 지원받아 기업체에서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실제로 취업률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취업률이 중요 지표가 되는 전문대학에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중요한 프로젝트다. 그리고 한 과의 학과장을 맡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체적인 교수의 움직임을 체크해야 하고 학생들의 반응에 따라 적절히 수업 내용을 피드백해야 한다."

 

- 1979년 경영학과로 신설된 학과가 2005년 경영학과에 엔터테인먼트학과로 분리되었다. 학자로서 생소한 학문이었을텐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나?

"공부를 많이 했다. 지금 맡고 있는 강의는 엔터테인먼트산업이라 기존 전공분야인 경영과 크게 차이가 있는 학문은 아니다. 물론 학교 측에서 처음 엔터테인먼트과의 신설을 결정하고 학과 개발을 맡겼을 때는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기획사로부터 커리큘럼 구성에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새로운 학과를 기획하고 강사진을 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교 측에서 적임자로 선택해 일을 맡긴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설립 4년 만에 인기학과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매우 뿌듯하다."

 

- 엔터테인먼트과는 어떤 과인가?

"말 그대로다. 방송, 전시, 대중공연, 영화 등 다양한 분야를 기초적인 실무 위주로 교육시킨다. 설립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기초 지식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엔터테인먼트 기획과 같은 이론을 가르치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경영학원론이나 마케팅 등 수용하기 어려운 학문들을 접하다 보니 학생들도 자연히 공부에 흥미를 잃어갔다.

 

사실 우리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다. 당장 사회에 나가 실무에 사용할 수 있는 실용기술이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커리큘럼의 변화를 시도했다. 지금은 보다시피 입학경쟁률이 타과에 비해 월등히 높다. 학과의 사이즈도 혁신적으로 줄였다. 원래 배정된 인원은 120명이지만 소수의 실무 위주의 교육을 하기에는 많은 숫자다. 정원을 80명으로 줄이고 심화 교육을 추진한 결과 학생들도 이전에 비해 반응이 좋다."

 

- 경력이 상당히 독특하다. 어린 시절은 어땠나?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4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른 집 같으면 장남이라고 사랑받고 귀하게 자랐을 테지만 장남 하나를 교육 시키기에도 빠듯한 집안이 우리 집이었다. 장남이었는데도 학교를 제대로 다니는 것이 힘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곧 죽어도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우겼지만 결국 집안 사정으로 인해 실업계 고등학교인 선린상고에 가게 됐다. 너무 억울하고, 공부가 하고 싶어서 죽어라고 공부만 했다. 그 때 한 학년이 480명 정도였는데 시험을 한 번 치르고 나면 1등부터 480등까지 성적표가 그대로 게시판에 붙었다. 거기 첫 번째로 이름이 오르는 게 좋아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중학교 때 산 교복을 6년 내내 입었다. 엉덩이 부분이 반질반질하게 닳고 목 부분은 몇 번이고 다시 덧대어 입었다. 팔이며 다리가 쑥쑥 자랐지만 교복을 딱 맞게 입으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굶기도 참 많이 굶고, 차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통학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대학만은 꼭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결국 포기하고 담임 선생님이 추천으로 한국은행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 성화에 못이겨 시험을 치렀지만 필기시험을 합격하고 면접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 때에는 한국은행이 참 좋은 직장이었는데, 굴러 들어온 복을 발로 찼다며 그 때는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 그 이후로의 행보가 독특하다. 어떻게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나?

"공부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결국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는 못하고 현대양행(현 한라그룹)에 취직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했다지만 상고 출신으로서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들을 가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다. 취직해서 안양으로 출퇴근하면서 기차에서 짬짬이 공부했다. 당시에는 '예비고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다. 코피를 쏟고 기차에서 토끼잠을 자며 시험공부를 했고, 그 결과 시험에 한 번에 통과하고 명지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퇴근후 등교하기에는 시간이 매우 빠듯했는데 바쁜 와중에 공부하려는 내가 기특해 보였던지 직장 상사가 퇴근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주었다. 다섯 시에 퇴근하고 안양에서 서울역으로 향해 연희동으로 통학하는 생활을 4년 동안 했다.

 

그러고 나서는 증권예탁원에 취직했다. 지루하더라. 일은 훨씬 편해지고 월급도 많이 받았지만 출근하고 퇴근하고 술 먹고 하는 무의미한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러고 나니까 회의가 생기더라. 기업이라는 곳이 그렇다. 지금은 훨씬 덜하지만 당시만 해도 빽 있고, 덩치 좋고, 머리 좋은 사람들만이 기업 임원이 될 수 있었다. 머리 좋은 것만으로 빽과 체력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해야 부장 되자고 석사까지 마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학문과 연관된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마침 덕성여대 법인사무국에서 연락이 와서 직장을 옮기게 되었고 그러던 중 장안대학에서 강사 제의가 들어왔다. 나름 안정된 생활이었지만 사표를 제출하고 장안대학 강사로 출강했다. 3월에 처음 강의를 시작하고 동시에 학교 직원으로도 일했다. 그리고 이사장에게 인정을 받아 4개월 만인 7월에 정식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때부터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 지금도 그렇고, 잠시도 멈추지 않고 살아왔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어렸을 때는 무작정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머리가 굵어서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장남으로 태어났는데도 공부를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처음에는 원망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가족이 큰 힘이 되었다. 내가 겪어온 가난의 그림자를 내 아이들에게 드리워 주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다.

 

특히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는 정말 몇 번이고 그만 두려고 했었다. 그렇게 힘들었을 때 더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내와 방안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 딸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4년 반 만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다. 매우 빠른 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의 원동력은 가족이다. 직장을 옮기고 공부를 해 나가면서 스스로 있어야 할 곳을 비교적 잘 찾아온 편이다. 물론 배경이 좋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스스로는 운이 좋았다고, 돌이켜보면 행운이 가득하진 못했더라도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기사 공모 <가족을 인터뷰하다> 응모글입니다.


태그:#가족,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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