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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전철

 

하루 내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전철은 책을 느긋하게 읽을 수 있는 곳입니다. 쇠바퀴와 쇳길이 부딪히며 내는 치치 소리 시끄럽고, 간첩신고 하라는 방송이 아직도 끊이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손전화 받는 사람 많은 가운데, 옆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밟고 치고 미는 사람 많은 전철입니다만, 마음을 그러모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서서 가며 책을 읽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버릇을 들이면 괜찮아집니다. 버스는 너무 덜컹거릴 뿐더러, 운전기사가 지나치게 마구 몰아서 책을 읽기 아주 나쁩니다. 자가용을 몰면 책은 못 읽습니다. 집이나 일터에서는 수많은 일거리가 끊이지 않으니 책에 마음을 쏟기 어렵습니다.

 

일거리가 줄거나 고된 일을 마친 뒤에는,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화면을 들여다보거나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는 일이 한결 낫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전철은 책을 가까이하는 소중한 곳이 되기도 합니다. 가방에 책 한 권 언제나 챙겨 놓고 있다면. 가방 없는 빈 손이라 해도 한 손에 책 하나 들고 움직일 만큼 매무새를 추스를 수 있다면.

 

ㄴ. 서울

 

서울 헌책방에는 책이 참 많습니다. 낯익은 책도 많고 낯선 책도 많습니다. 볼 만한 책도 많고 손길이 가는 책도 많으며 골라들게 되는 책도 많습니다. 인천에도 헌책방이 몇 군데 있고, 쏠쏠히 책 구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에 있는 헌책방을 찾아간 다음에 헤아려 보면, 인천에는 ‘책이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구나 싶습니다.

 

부산에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있고, 서울 아닌 곳에도 제법 큼직하게 꾸려 나가는 헌책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 골목길 안쪽에 조그맣게 꾸리는 곳에 드나드는 책 가짓수가 한결 많거나 넓거나 깊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서울로 몰려들까요.

 

책 하나를 놓고도 이렇다면, 책 아닌 대목에서 서울은 얼마나 많이많이 껴안고 있는 셈일까요. 서울에서 누리는 문화는 얼마나 너르고 많고 깊을까요. 이리하여 서울 아닌 곳에서는 얼마나 조금만 껴안고 있는 셈이며, 서울 바깥쪽 사람들은 얼마나 조금만 얕게만 몇 가지만 어줍잖게 누리고 있는 셈인가요.

 

ㄷ. 술

 

서울로 책방 나들이를 온 뒤, 출판사에서 일하는 선배 세 사람을 만난다. 두 사람만 볼 생각이었는데, 술집에서 다른 선배 한 사람을 만난다. 그 술집이 책마을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지만, 마침 그때 그곳에서 마주치다니. 시계를 본다. 열 시가 넘어간다. 안 되겠군. 오늘은 인천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군. 옆지기한테 너무 미안하네. 홀몸도 아닌데. 짧게 마치려고 했던 맥주집 자리가 조금 길어지고, 홍제동으로 택시를 타고 가서 하루밤 신세지기로.

 

택시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페트맥주 하나. 그러나 이 맥주는 입도 못 대는 몸. 선배가 중국 나들이를 할 때 사 왔다는 52도짜리 술 한 잔. 크. 쓰다. 그리고 이 술 덕분에 해롱거리던 몸이 확 풀어지며 넋을 잃는다. 아침에 일어나니 입에서 술냄새 몰씬몰씬. 속은 더부룩. 괴롭다. 마실 때 좋았던 느낌이 죄 사라진다.

 

오늘하고 내일은 술을 멀리멀리 떨어뜨리고 싶다. 아니, 저녁에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한 병 마시던 보리술도 이틀에 한 번이나 사흘에 한 번으로 줄이고 싶기도 하다.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면서 마시는 술이라면 이렇게 안 마셨을 텐데, 남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면서 마시는 술자리에서는 꼭 술잔 든 손을 멈추지 못한다. 바보짓.

 

ㄹ. 책 만드는 생각

 

백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엮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천 해 동안 사랑받을 만한 책을 묶겠다고 생각하는 책마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니 천 해나 백 해는 꿈꾸지 말고, 쉰 해쯤이라도, 아니 서른 해쯤이라도, 아니 스무 해, 아니 열 해쯤이라도 사랑받을 만한 책을 펴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쩌면 한 해가 채 지나지도 않았으나 고침판을 내야 할 만큼 책을 엮지는 않는지.

 

어쩌면 새로 펴낸 그때에만 반짝 팔아치운 뒤 또다른 책을 새로 펴내며 그때그때 반짝반짝 팔아치울 마음은 아닐는지. 출판사 도서목록에는 수많은 책이 얼굴을 내밀고 있지만, 이리하여 출판사 햇수가 길어지면서 도서목록은 두꺼워지고, 알음알이하는 작가가 늘어나지만, 자기 출판사 일꾼조차도 자기 출판사에서 낸 책을 찬찬히 읽고 아끼면서 둘레사람한테 두루 소개하고 나누는 일은 못하고 있지 않을는지.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책이 있는 삶#책읽기#서울#전철#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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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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