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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말]
 서울신문 80년 5월 24일자 사진. 시민군이 폭도로 묘사돼 있다.
서울신문 80년 5월 24일자 사진. 시민군이 폭도로 묘사돼 있다. ⓒ 서울신문

영암군청에서의 하룻밤... 친구를 만나다

영암읍에 다시 도착했다. 아직도 주민들이 집에 가지 않고 모여 있었다. 우리는 영암읍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니까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임시숙박 장소인 영암군청으로 갔다.

시위대원들은 리더 격인 사람의 지시로 차에서 내린 뒤 군청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주의사항도 당부했다.

"영산포에 군인들이 주둔해 있어 광주로 올라갈 수 없어서 불가피하게 오늘밤은 영암군청에서 1박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들은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하여 내려온 만큼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시고, 절대로 청사 내 기물을 함부로 손대거나 파손하지 말고 조용하게 지내주십시오. 취침하기 전까지 경계근무를 설 근무조를 편성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날이 밝으면 곧바로 광주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가능하면 일찍 일어나셔서 출발 준비를 해주십시오."

우리는 군청 정문과 취침하는 방 부근에 교대로 경계근무를 서기로 하고 근무조를 짰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근무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잠자리는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편하게 잤다. 군청 내 사무실과 숙직실로 보이는 방, 수위실 방, 군청 마당에 세워둔 시위대 차 등에서 되는대로 잤다.

어떤 대원들은 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드러눕기가 비좁아 칼잠을 자고 새우잠을 잤다. 어떤 대원들은 군청 광장에 세워둔 버스에서 의자를 뒤로 비스듬하게 젖혀놓고 쌓인 피로 때문인지 깊은 잠에 빠져 객지에서의 하룻밤을 보냈다.

따라서 경계근무 조 편성도 쉽게 짤 수 있었다. 경계근무는 첫 번째 근무조가 자신들이 근무를 다 마친 후 차례대로 옆방을 정하여 시위대원들을 깨워 근무를 서게 하면 됐다. 물론 경계근무조가 순서대로 제 시간만큼 근무를 서고 난 후 아침을 맞이했는지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취침 전까지는 이미 편성된 경계근무조가 방 입구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을 보았었다.

"준수야!"
"어, 영상아!"
"야,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구나."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냐?"
"하숙집에서 농성동 로터리 광장으로 시위 구경하러 갔다가 시위대 버스에 올라타게 됐다. 생각도 안했는데 영암까지 와버렸다."

잠자기 전, 숙직실로 보이는 방 옆에 붙어있던 세면장에서 대강 씻고 나오다 뜻밖에도 학교동창을 만났다. 나주가 고향이고 같은 반(3학년 2반)이었던 이준수라는 친구였다. 이 친구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낯선 시위대원들 틈새에서 동창을 만나니까 무척 반가웠다. 준수도 나처럼 학교 근처인 농성동 로터리에서 시위대 차에 탑승한 뒤 영암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준수에게 우리 방으로 와서 잠을 자도록 했다. 우리는 피곤함도 잊은 채 방안의 다른 대원들이 잠든 뒤에도 한참동안 더 얘기를 나누다 뒤늦게 잠을 잤다.

이 친구는 이때부터 나와함께 목포 무안 함평 영광 나주 등지를 다니면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고 다녔다. 며칠간이나마 생사고락을 함께 한 친구였다.

광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요?

 80년 당시 계엄군에 봉쇄된 광주-송정리 간 도로.
80년 당시 계엄군에 봉쇄된 광주-송정리 간 도로.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5월 22일. 잠자리가 비좁아 새우잠을 잤지만, 그런대로 피로는 풀렸다. 아침에 일어나자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군청은 직원들이 근무를 하지 않는지 출근자가 없었다. 당직자는 있었겠지만 누가 군청직원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위대원들은 군청 곳곳에 모여서 아침식사를 했다. 어디에서 해 온 밥인지 몰랐지만, 꿀맛이었다. 기약이 없는 식사에 대비해 배부르게 먹어뒀다.

다시 광주로 가기 위해 차들이 이동했다. 어느새 나주군 남평면에 있는 넓은 도로(임시 활주로, 지금은 운행 금지하고 있음)에 접어들었다. 폭이 50m쯤 되고 길이가 2㎞ 가량 되는 이 도로는, 전시엔 임시비행장으로 사용되는 도로였다.

도로 중간쯤 이르렀을 때였다. 광주 방면에서 두 대의 차가 비상라이트를 켜고 달려오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군 트럭과 버스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전남 남부지역에서 광주로 들어가는 초입인 백운동 외곽에 계엄군들이 지키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들도 광주 진입을 시도했으나 들어갈 수가 없어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주 노안면을 거쳐 송정리 쪽으로 우회해서 광주 진입을 시도해보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니, 어젯밤 영암 신북 주민들이 영산포에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다며 가지 말라고 했던 거짓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는 설마 그들이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리라 믿었다. 신북에서는 밤이었지만, 지금은 낮이어서 그들의 말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또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위대원들이었다.

우리 시위대 차들은 속은 셈 치고 송정리로 가기로 했다. 백운동 방향이나 송정리 방향이나 거리 차이도 크지 않았다. 곧바로 나주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시위대 차들은 경쟁하듯 전 속력으로 질주했다.

나주대교를 지나 나주읍에서 송정리 쪽으로 가는 2차선 비포장 도로(현재는 4차선으로 포장되었음)를 탔다. 비포장도로는 군용트럭을 선두로 뒤따르는 다섯 대의 버스가 일으키는 먼지로 하얀 연막을 쳤다. 중간에 달리던 우리들은, 차 유리창이 박살난 관계로 흙먼지를 실컷 마셨다.

 80년 당시 계엄군과 대치했던 광주공항 진입로 입구의 현재 모습.
80년 당시 계엄군과 대치했던 광주공항 진입로 입구의 현재 모습. ⓒ 임영상

다리 아래에 쳐박힌 시민군 트럭

나주읍에서 송정리 방향으로 20여분 정도 달리다가 송정리 진입 직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멈추었다. 차에서 내려 서로를 쳐다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굴이 온통 먼지로 하얗게 분칠을 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남의 얼굴을 보면서 내 얼굴도 저 사람과 똑같겠지 생각하고 낄낄대면서 참았던 용무도 시원하게 마쳤다. 도로의 먼지가 가라앉자 옷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가벼운 운동도 하면서 잠시 휴식을 즐겼다.

우리는 휴식을 마친 후 다시 출발했다. 우리 차에 타고 왔던 두 사람이 군 트럭으로 옮겨 탔다. 군 트럭은 우리 차보다 과속으로 달리던 차였다. 나주를 지나면서 탑승 인원이 늘어나는 바람에, 빈 좌석이 없어 차안 통로에 앉아서 이동했다. 때문에 다른 차로 옮겨 타는 것을 환영했다. 반면 군 트럭 화물칸에 타고 왔던 사람들은, 군 트럭 운전자가 워낙 과속을 하고, 제멋대로 운전을 해 불안하다면서 다른 차들로 분산, 탑승했다.

과속하던 군 트럭이 기어이 사고를 내고 말았다. 군 트럭을 계속 타고 오다가 방금 다른 차로 옮겨 탄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 사고를 면했기 때문이다.

나주에서 송정리간 비포장 도로 중간쯤인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면 침산리에 하산교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황룡강 지류인 평동천에 있다. 다리와 연결된 도로가 에스(S)자처럼 급커브 길이었다(지금은 구교 옆에 새로 직선 다리가 놓여있음). 또 다리도 겨우 소형차가 다닐 정도의 넓이였다. 더구나 오래된 다리인지 곳곳이 움푹 패어 있었다.

비포장도로이기 때문에 먼지가 운전자의 시야를 흐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심스럽게 서행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트럭은 여전히 과속을 했다.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안전운전'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결과는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서가던 군 트럭이 "쾅"하는 굉음과 함께 다리난간을 부수고 아래로 떨어졌다. 다리 난간은 낡고 부실했다. 차들이 다리에서 추락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조심해서 운전하라'고 주의만 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강폭은 둔치까지 합해 20m 정도 되었고, 강물에서 다리 상판까지의 높이도 5m 밖에 되지 않았다. 강물의 깊이도 성인의 허벅지 정도로 그리 깊지 않았다. 군 트럭 운전자는 다리로 진입하는 도로가 급커브인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난폭하게 운전을 하다 미처 핸들을 돌리지 못한 것 같았다.

뒤따르던 다른 시위대원들도 일제히 차를 멈추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군 트럭은 강물 속에 거꾸로 뒤집혀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있는 뒷바퀴는 아직도 허공에서 공회전을 하고 있었다. 무게 때문인지 엔진이 있는 트럭 앞쪽이 더 깊게 박혀 있었다.

뒤집혀진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마침내 흙으로 범벅이 된 채 차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천변 둑과 다리에서 내려다보던 시위대원 중 몇 사람이 강물로 뛰어 들어가 이들을 부축해 어렵게 구출했다.

그러나 화물칸에 탄 두 사람은 구출할 수가 없었다. 하천바닥은 진흙이었고, 차가 떨어지면서 박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더 이상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구출한 두 사람은 다행히 조금 다쳤을 뿐 보행에 지장이 없었다.

인근의 마을주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마을에서 다른 주민들도 구경하느라 모여 들었다. 주민 가운데 누군가가 군부대에 연락하여 군 트럭을 건져내자고 했다. 군 트럭을 끄집어낼 수 있는 대형 크레인이 가까운 군부대에 있고, 군 트럭이기 때문에 구조요청을 하면 바로 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위대원들과 주민들간에, 그리고 시위대원들간에 논란을 벌였다. 자칫 하다가는 교통사고 처리가 아니라 군인들에게 붙잡혀 가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죄없는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군인들인데,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시위대가 일으킨 교통사고를 과연 처리해주겠는가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들은 군부대에 연락하기로 했다. 교통사고를 면한 시위대원들보다도, 화물칸에 짓눌려있는 시위대원 두 명의 생사확인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시위대원들의 동의 하에 주민들이 군부대에 연락하기 위해 마을로 갔다.

동아줄만으로 트럭을 세우다

얼마 후 연락하러 간 주민들이 왔다. 군부대에 전화를 했더니 위치를 물으면서 곧 온다고 했단다. 우리는 군부대 견인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다리 주위에서 뒤집힌 트럭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구경하던 마을 노인들은, 화물칸에 탑승한 두 사람이 혹시 죽지 않았을까 걱정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애타게 기다리던 군 크레인은 차치하고 군 견인차도 오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냥 기다릴 수만 없었다. 주민들과 함께 동네에서 차를 뒤집는데 필요한 줄이란 줄은 죄다 가져왔다.

10여명의 시위대원들이 강물로 들어갔다. 몇 사람이 거꾸로 박혀있는 군 트럭을 밀어도 움직이질 않았다. 하늘을 향해 있는 뒷바퀴에 동아줄을 단단하게 동여맸다. 나머지 시위대원들과 구경나온 주민들은 모두 강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줄다리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뒷바퀴에 묶여진 동아줄을 여러 겹으로 붙잡고 "영차! 영차!"를 외치면서 군 트럭 뒤집기를 시도했다.

백여 명이 달라붙어 하나가 된 힘은 대단했다. 깊숙이 박혀있던 군트럭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군 트럭이 힘겹게 줄을 잡아당기던 시위대원들과 주민들에게 진흙탕 물벼락을 '선물'하며 뒤집혔다.

"만세!" "저기, 두 명 다 살아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화물칸에 갇혀 있던 시위대원 두 사람도 위장한 듯 얼굴에 온통 진흙을 바른 채 군 트럭이 똑바로 세워지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죽지 않았던 것은, 뒤집혀진 군 트럭의 화물칸 적재함과 강물 사이에 마련된 좁은 공간으로 숨을 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물이 깊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구조된 두 사람은 다소 지쳐 있었지만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어 보였다.

우리들은 뒤집혀진 군 트럭을 강바닥에 바로 세워놓았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이동해야 했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군부대에서 구조차량이 오면 사고 위치를 말해주라고 여러 번 부탁한 뒤 출발했다.

시위대 차들이 출발하기 전에 리더 격인 한 청년이 우리 차에 올라와서 주의를 주었다. 운전할 때는 철저하게 안전운행을 할 것과 운전경력이 짧은 사람은 절대로 운전대를 잡지 말고 경력이 많은 사람이 운전할 것을 요구했다.

 80년 당시 교통사고가 났던 하산교.
80년 당시 교통사고가 났던 하산교. ⓒ 임영상

우리는 과속을 하지 않고 서서히 달렸다. 송정읍 시가지와 인근 마을을 갈라놓고 있는 황룡강에 도착했다. 강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겨우 2차선이 될까 말까 한 좁고 기나긴 다리(현재는 4차선 새 다리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음)를 건너 송정읍(현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도착했다.

송정리역을 지나 송정읍 중앙을 관통하는 간선도로를 타고서 광주 쪽을 향해 달렸다. 8차선이나 되는 넓은 도로에는 벌써부터 다른 시위 차들이 오가며 노래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이 동지라고 판단했는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며 구호로 화답했다. 광주시내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연도에는 송정리 주민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손을 흔들었다.

계엄군과 대치 "돌아가십시오!"

광주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광주비행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차의 속력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멈추었다. 앞을 보니 탱크가 도로 중앙을 가로막고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개선장군과도 같았던 우리들은 아연 초긴장을 했다.

광주-송정리간 넓은 도로에는 탱크 두 대가 버티고 서서 포구를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로 옆 논둑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금방이라도 쏠 듯한 사격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탱크 옆에는 지휘차로 보이는 지프가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 전부터 광주 진입을 시도했던 다른 시위대 차들이 탱크와 대치하고 있었다.

우리들도 군인들과의 대치전선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먼저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원들은 백만 원군을 만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계엄군과 불과 50여m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원들은 종이로 핸드마이크를 만들어서 계엄군에게 외쳤다.

"여보시오. 군인 양반들, 우리는 그냥 광주로 들어가려는 것이오. 그러니 길을 터주시오!"

도로변 좌우 논둑에 엎드려 있는 계엄군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로를 막고 있는 두 대의 탱크만이 전진과 후진을 번갈아 가며 무력시위를 했다. 계엄군 탱크의 무력시위는 우리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시위대원들의 불만도 점차 고조돼 가고 있었다. 시위대원들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아직 기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차체를 두드리는 소리도 더욱 커졌다.

먼저 와서 계엄군과 대치 중이던 시위대원들이 우리 시위대 차에 몇 정의 칼빈 소총을 지급했다. 언제부터 시위대원들이 소총을 소지하고 있었는지, 출처는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젠 시위대 차마다 몇 정씩 가지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계엄군과 싸울 참이었다. 어떤 시위대 차는 벌써 탄창이 꽂아진 총을 차창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중구난방으로 도로에 서있던 시위대 차들도 2열로 간격을 맞추어 전열을 정비했다.

시위대 차들이 서서히 조심스럽게 탱크 쪽으로 다가갔다. 길을 막고 있는 계엄군들이 끝내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일전도 불사할 태세였다. 시위대 차들과 계엄군 탱크와의 거리가 불과 20m 정도로 좁혀졌다. 장교가 지프에서 내려 핸드마이크로 경고했다.

"시민 여러분,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는 며칠 전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진압했던 부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31사단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결코 적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또한…."

장교가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시위대원들로부터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야, 웃기지 마라. 너희들이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의 군대냐?"
"양민학살 자행하는 계엄군은 물러가라!"
"너희들은 국군이 아니라 소련군이나 북괴군이다."
"여러분,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탱크를 박살냅시다!"

시위대 차가 계엄군을 향해 2, 3m 가량 전진했다. 장교의 핸드마이크 소리에 다시 멈추었다.

"시민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22일 12시부로 발포명령이 내렸습니다. 즉시 돌아가십시오. 광주에 집이 있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죽고 사는 군인입니다. 제발 돌아가십시오!"

다시 광주에 가지 못하고...

 전남 도청앞에서 시민군과 공수부대가 대치하고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
전남 도청앞에서 시민군과 공수부대가 대치하고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 ⓒ ㈜기획시대

계엄군의 경고발언이 끝나자 차안에 있던 시위대원들은 잠시 쥐죽은 듯 조용했다. 발포명령이 내린 상황에서 싸워 봐야 뻔한 승부였기 때문이었다. 칼빈 소총으로 계엄군의 탱크와 자동소총인 M16 소총에 맞선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꼴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있는 탱크를 박살낼 것 같았던 시위대원들의 기세등등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옆 차에서 차창을 통해 전달사항이 전해졌다. 리더격인 사람 두 명만 옆 차로 오라고 했다. 긴급회의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차에서는 영암에서부터 두둑한 배짱 때문에 시위대원들을 장악했던 30대 후반의 아저씨와 수다쟁이처럼 재잘거리며 분위기를 이끌었던 또 다른 30대 후반의 아저씨가 대표로 선발되어 옆 차에 갔다.

차창너머로 바라보니 대표들간에 삿대질과 고성이 오가며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 차 대표들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들은 광주진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무리하게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 대신 조를 짜서 전남도내 전 지역을 돌면서 광주상황을 알리기로 결정했다고 회의결과를 전했다.

우리 시위대 차들은 긴급회의에서 결정한대로 광주의 진실과 참상을 알리기 위해 3개조로 나눠 홍보 코스도 정했다. 홍보 코스는 각 시위대 차들이 임의대로 방향을 잡아 출발하면 됐다.

1코스는 송정리-나주-영암-강진-해남이었고, 2코스는 송정리-나주-무안-목포, 3코스는 송정리-영광-함평-무안-목포였다. 우리들은 광주의 북쪽인 담양, 장성과 보성, 순천이 있는 전남의 동부는 가지 않았다. 광주의 서쪽인 송정리에 있었던 관계로 전남 동부는 갈 수 없었다.

 '고고생 시민군' 임영상의 5·18 항쟁도.
'고고생 시민군' 임영상의 5·18 항쟁도. ⓒ 임영상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5.18#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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