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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 무렵이면 차(茶)가 나오는 남녘 지역은 햇차 빚기로 수선스러워진다. 때맞춰 '우전'이니 '특 우전'이니, 또는 '명전'이니 하여 '특별한 차'를 외쳐대는 소리들이 매스컴을 채운다. 이와 더불어 "야생차…"니, "천년 묵은 차나무에서 나는 '천년차'(한 통에 1천만원 한다)니…" 하는 선전 문구와 언사들이 난무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4월 중 차 만드는 시기에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 차에 관한 미사여구들은 차업자들과 그들이 주는 선동 문구를 베껴 적기에 급급한 매스컴의 합작 광고 성격이 강하다.

 '남도야생차지기'의 산절로야생다원. 야산 잡목숲 속에서 자연의 힘만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차나무들이 순수 야생차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남도야생차지기'의 산절로야생다원. 야산 잡목숲 속에서 자연의 힘만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차나무들이 순수 야생차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 최성민


몇 해 전부터 이른바 '웰빙' 바람을 타고 차가 장수 건강식품으로 호황을 누려왔다. 그러다가 최근엔 소비가 줄어 차 산지에 재고가 쌓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더니 지난해 KBS <소비자고발> 프로그램이 티백녹차에서 농약성분이 검출됐다고 하자 차농가들 사이에 "이제 망했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이후 일부 차산지에서는 유기농을 표방하며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 차의 위기는 한국의 일부 제다인과 차업자들, 그리고 차산업을 관장하는 농림부와 지자체 등 행정기관의 불성실과 부주의가 가져온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차 수요가 늘자 품질개선에 큰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돈벌이에만 몰두해온 까닭이다. 문제가 터지니 일부 차 산지에서 뒤늦게 '유기농'으로 차의 품질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수십년 비료와 일부 농약(저농약)으로 생명을 부지하던 차나무들이 어느날 갑자기 퇴비와 '무농약(혹은 저농약)'에 적응하여 완전히 다른 차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퇴비도 요즘엔 예전의 풀과 짚에 거름을 얹어 썩힌 재래식 토종 퇴비가 아니라 톱밥이나 다른 원료를 써서 공장에서 비료처럼 대량생산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유기농'도 퇴비의 질이 좌우할 것이다.

 순수 야생찻잎. 재배차밭이나 유기농차밭에서는 이처럼 윤기나고 토실토실한 찻잎을 구경하기 어렵다.
순수 야생찻잎. 재배차밭이나 유기농차밭에서는 이처럼 윤기나고 토실토실한 찻잎을 구경하기 어렵다. ⓒ 최성민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요즘 한편에서는 '야생차'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야생차'와 '유기농 차'가 이제 한국 차가 지향하는 목표이자 차 업계의 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기농 차'라는 이념 속에도 '야생차'를 좇는 꿈이 담겨있다. 그러나 기존의 비료와 일부 (저)농약에 의한 재배차를 야생차로 바꾸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순수 야생차를 생산하자니 수지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야생차밭을 구하기도 어렵다.

그런 탓에 '비료-(저)농약' 의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돌파구로서 당연히 '친 환경' 표방의 '유기농'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연유를 더듬어보며 한국 차의 발전과 차에 대한 소비자들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진정한 야생차란 어떤 것이며 재배차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 땅에 진정한 야생차와 야생차 이념을 좇는 차인들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차가 본격적으로 산업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한 기업체가 차사업에 뛰어들면서부터이다. 당시에는 남녘 일부지방에 일제시대때 조성된 재배차밭과 조금씩 방치돼 산재해 있던 '야생차'밭이 있을 뿐이었다. 차농가들로부터 찻잎을 수거해 차를 대량 생산해야 했는데, 찻잎 양이 달리니 찻잎을 따러갈 때 비료푸대를 짊어지고 가서 찻잎을 따고 동시에 비료를 뿌리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 탓에 기존의 야생차 나무가 비료기운을 받아먹기 좋도록 옆뿌리를 내고 이제 비료없이는 많은 찻잎을 낼 수 없는 '재배차'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대규모 차 산지에 순수하게 남아있는 야생차는 매우 드물다. 해마다 제다작업이 끝나는 5월말~6월초에 각 차 산지에서 차 관련 축제가 열리고 그때 '야생차'임을 주장하는 제품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현지 체험으로는 일부 야생차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은 비료를 주거나 비료 시비와 가까운(밤나무 과수원을 가까이 두고 간접적으로 비료기운을 흡수하는) 재배차밭에서 이른 봄 비료나 농약을 본격적으로 뿌리기 전 나온 첫 찻잎이거나 퇴비를 주는 '유기농 차'밭에서 나온 찻잎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야생찻잎. 표면에 윤기가 흐르고 무척 건강해 보인다.
야생찻잎. 표면에 윤기가 흐르고 무척 건강해 보인다. ⓒ 최성민

야생차와 재배차(또는 유기농 차)는 찻잎의 형태(색깔, 모양)와 차 맛, 차 향에서 현저히 차이가 난다. 우전차나 4월에 난 차를 두고 비교해 보면, 물에 우려진 야생찻잎은 색깔이 선연한 녹색이고 표면이 고르다. 찻잎 모양도 영양상태가 좋아 두툼하고 토실토실해 보이며 크기가 균일하다. 그리고 대여섯번 이상 우려내도 차 향과 맛이 풍겨나올 정도로 찻잎의 함량 밀도가 좋다.

이에 비해 재배차는 찻 잎 색깔이 누르스름하거나 희멀겋고 표면이 꺼칠한 잎이 많다. 찻잎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두께는 얇은 편이다. 그리고 야생차에 비해 우려낼 수 있는 횟수가 적다.

야생차와 재배차의 이런 차이는 생육환경의 차이에서 생긴다. 순수 야생차는 말 그대로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산에서 자연의 힘만으로 사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밭과 달리 산에는 시시때때로 기름기를 빼어가는 작물이 없으니 늘 비옥하다. 나무들이 흙 속에 늘 습기를 유지해 주며 반음반양식물인 차나무에 가장 필요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또 낙엽이 떨어져서 자연 퇴비가 되고 나무들이 겨울 바람을 막아주어 동해를 입지 않는다. 이에 비해 재배차는 콩나물처럼 밀식돼 있어서 비료나 퇴비 없이는 영양실조에 걸린다. 또 땡볕에 노출돼 있어서 쓰고 떫은 맛이 강하고 겨울이면 찬바람을 맞아 쉽게 동해를 입는다. 겨울이 지나 대규모 차산지에 가보면 파랗던 차밭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다. 동해로 찻잎이 얼어 죽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죽은 찻잎이 일제히 떨어지고 위기를 느낀 차나무가 더욱 많은 찻잎을 바글바글 내기 때문에 찻잎 하나 하나는 영양이 부족해 얇은 바탕에 연한 녹색이거나 누르스름하고 희멀건 색을 띠는 것이 많다. 그런 찻잎에서 야생차처럼 깊은 맛과 향이 나오기는 어려운 일이다.

 가마솥에서 야생찻잎을 덖는 전통수제덖음차 제다.
가마솥에서 야생찻잎을 덖는 전통수제덖음차 제다. ⓒ 최성민


남도 일대에 순수 야생차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전북 정읍의 '차만드는 사람들'이 4~5년 전부터 야산에서 채취한 야생찻잎으로 차를 내고 있다. 전남 함평에서도 신광면 등 몇 곳에서 야생차가 난다. 나주 금성산과 남평 죽림사에 개방된 야생차밭이 있어서 광주 일대의 차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찻잎을 딸 수 있다.

가장 본격적으로 순수 야생차를 내고 있는 곳은 전남 곡성을 근거지로 한 '남도야생차지기'와 완도의 청해진다원이다. 남도야생차지기는 '차 대안운동'으로 전통제다법을 연구하며 순수 야생차를 보급한다. 곡성 섬진강변 산 속에 5만 여 평의 순수 야생차밭을 일구고, 함평 장성 등지의 산에서 야생찻잎을 따서 <산절로>라는 녹차와 반발효차를 내고 있다.(061-721-3752)

청해진다원은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야생차밭이다. 비료나 퇴비를 일절 주지 않는 야생차밭에서 녹차와 오룡발효차(원광차)를 내고 있다(061-554-7073).

한국 차 발전의 도우미인가 장애물인가-'차 명인' 제도

한국 차의 제다법과 차 인구 저변 확대에 있어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차 명인' 제도가 있다. 이 제도의 공식명칭은 '전통식품 명인' 제도이다. "전통식품의 재현과 전승…"을 목적으로 농림부가 주관한다. 문화관광부가 '인간문화재' 제도를 운영하듯이 전통 식품으로서의 한국 차의 보존과 전승 발전을 위해 운영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 제도의 순수한 취지나 목적의 실현보다는 소수 특정인들의 상품광고에만 이용되는 측면이 있어서 차인들은 곱지 않게 보거나 아예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차 명인'의 선발 방식의 불투명성과 명인자격의 중간 점검 소홀 등 관리가 엉망이라는 것이다. 차 명인 선발은 공개 경쟁 심사에 의하지 않는다. 명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불시에 각종 서류를 만들어 소문나지 않게 개인적으로 신청하고, 경쟁이 될만한 다른 제다인들에게는 전혀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가운데 농림부 관계자와 일부 교수 등 차를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오랜 제다체험을 갖는 심사위원은 거의 없다)이 심사위원이 된다. 모든 심사절차를 비공개로 하니 심사위원들이 차를 만드는 시기에 제다 현장에 와서 신청인이 전통제다법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지를 실사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선정과정이 그렇다 보니 전통식품보다는 국적없는 신상품의 탄생과도 같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명인으로 지정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개발한 신 기술이 인정되어 명인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그 '신 기술' 때문인지 그 사람은 신지식인으로 지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전통 식품을 조상전래의 방법 그대로 재현한다"는 '전통식품명인' 제도의 취지가 무색하게 신기술로 전통식품(전통차) 명인이 되는 판이니 명인과 신지식인을 겸한 사람이 전통차(전통식품)가 아니라 신기술에 의한 신식 차, 신 식품 제조를 하는 셈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인간문화재의 경우와는 달리 같은 품목에 부지기수의 전통식품 명인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농림부는 이런 비판을 예상해서인지 같은 전통(덖음)차에 명인의 이름을 달리 붙이는 '편법'을 쓰고 있다. 예컨대 수제녹차 명인, 야생작설차 명인, 우전차 명인 등이다. 이는 똑같은 전통덖음차에 만드는 방식(수제), 원료(야생), 찻잎 모양(작설), 채엽시기(우전) 등에 붙는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그래서 수제 녹차(전통차는 모두 수제차이다) 명인도 야생 작설찻잎으로 우전차를 만들고, 야생 작설차 명인도 수제우전녹차를 만들고, 우전차 명인도 야생 작설찻잎으로 수제 녹차를 만든다. 말하자면 전통차인 '수제우전야생작설차' 명인이라 하여 한 사람을 지정하면 될 것을 각각 달리 차만드는 전통 '비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을 명인으로 지정하다 보니 한 가지인 전통차가 명인 수만큼 여러 가지가 되는 모순을 낳고 있다. 원칙과 기준없이 밀실에서 예산집행과 실적주의에 치중하다 보니 원칙없이 명인을 남발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차 명인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인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가. 전통식품의 재현과 전승을 위해 차농가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통 제다법을 알려주고 차농가들의 상생에 기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차 명인 누구나 자신의 제다법을 '비법'이라고 주장하며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말해준다.

사실 오늘날까지 한국 차에는 표준화되거나 정립된 전통 제다법이라는 게 없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제다법에 관해서는 초의선사의 <다신전> 등에 단편적으로 모습을 보일 뿐 완전하게 전래되는 기록이 없다. 확립된 정답이 없으니 수많은 제다인들이 자신의 제다법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군웅할거 상황에 있다. 따라서 좋은 차의 기준도 없다. 대부분의 차 관련 행사에서 차 품평 기준은 중국 것을 따르고 있다(그러나 중국은 수질이 나쁜 데서 차문화가 비롯되었기에 제다법과 좋은 차의 기준이 좋은 물을 두고 기호품으로 발전한 우리 차와는 다르다).

따라서 냉정하게 말하면 한국 차는 아무 기준없이 각자의 차가 최고라고 자부할 뿐이며, 좋은 차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매우 주관적인 기분으로 차를 즐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한국 차 문화는 뜬구름잡기와 폼잡기에 치중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탓에 한국 전통차는 중국 차나 일본 차처럼 독특한 맛과 향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 음료수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차 명인' 제도를 엉터리로 운영하고 있는 행정당국 탓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농림부나 명인 당사자들이 귀를 기울이거나 발전적인 토론을 벌이는 일이 없고 심지어 '명인' 지정을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여긴 듯 법에 의존해 문제 제기 자체를 봉쇄하려 하기도 한다.

나아가 '차 명인' 제도는 명인으로 지정된 특정인 몇 사람의 상품 홍보에만 이용돼 명인이 아닌 다른 제다인들에게 반사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고 있다. 어떤 차는 '명인'임을 내세워 호화포장과 함께 100그램 들이 한 통에 수십만원~백만원에 이르는 것도 있다.

농림부는 이러한 사실이 한국 차 소비의 저변확대를 막고 한국 차가 소비자들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제공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명인 차가 아니면서도 고품격인 많은 차들이 '명인 차'라는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풍문에 가려 상대적으로 외면당할 여지를 무시할 수 없다.

누구라도 같은 품질의 차를 평생 다시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같은 사람이라도 해마다 다른 차를 만든다는 것이 차인들의 정설이다. 따라서 명인도 해마다 명차 품평회에 나와서 공개 경쟁 심사를 받고 명인 명찰이 해마다 달라질 수 있어야 한국 차의 제다법과 품질이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차 명인' 치고 누구도 '올해의 차' 선정 행사에 나오는 일이 없다. 현행처럼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비교 검증이 없는 밀실 결정방식의 '차 명인' 제도는 차소비자를 오도하고 차계에 냉소를 더해갈 것이다.


#차#차명인#한국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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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창간발의인, 문화부 기자,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역임.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철학박사(서울대 교육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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