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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누대숲 사이로 난 고왕암 아래 길.
시누대숲 사이로 난 고왕암 아래 길. ⓒ 안병기

연천봉에 올라서자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한다. 사람을 아주 멀리 날려버릴 듯 사나운 바람이다. 온몸으로 바람을 견디면서 문필봉과 저 멀리 천황봉을 건너다본다. 봉우리마다 비구름이 잔뜩 몰려 있다.

서둘러 연천봉을 채 내려서기도 전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배낭 속에 든 비옷을 꺼낼까?'하다가 그만둔다.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신원사 쪽으로 난 산길을 내려간다. 비를 맞으면서 이제야 올라오는 사람도 있고 그만 산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비 맞는 게 좋은지 길가에 선 생강나무의 노란 꽃도, 보라색 현호색도 희희낙락한 얼굴빛이다. 비를 맞으며 산에서 내려가는 사람들까지도 생기가 돈다. 식물은 그렇다 쳐도 왜 비가 내리면 사람도 생기가 도는 것인지.

산길을 2km쯤이나 내려왔을까. 고왕암 아래 시누대숲 길에 이른다. 내가 계룡산 산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시누대숲이 끝날 즈음, 고왕암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짠~' 하고 모습을 나타낸다.

오랫동안 불사를 거듭했던 고왕암

 고왕암으로 오르는 길.
고왕암으로 오르는 길. ⓒ 안병기

고왕암은 마곡사의 말사 중 하나인 신원사의 부속 암자이다.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의자왕의 명에 의해 창건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해 바로 백제가 망해 버려 의자왕은 정작 이 암자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당나라 소정과 신라 김유신이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백제의 왕자 융이 이곳으로 피난했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한 후, 7년 동안 이 암자의 동굴에서 머물다가 결국 붙잡혀 갔다고 하는 비운의 전설이 전해진다.

그렇게 해서 고왕암(古王庵)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까지의 역사는 전하는 것이 없다. 다른 암자들이 그랬듯이 아마도 폐사의 길을 걸었던 게 아닌가 싶다. 1928년에 청운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왕암은 아주 오랫동안 불사 중이었다. 그런 번거로움 때문에 신원사 가는 길에도 들르지 않았다. 거의 7,8년 만에 들르는 것 같다. 올라가는 계단이 말짱하게 정리된 것을 보니, 이젠 불사가 대충 마무리된 모양이다.

 지붕 기와를 가는 공사 중인 법당.
지붕 기와를 가는 공사 중인 법당. ⓒ 안병기

 법당 안.
법당 안. ⓒ 안병기

그러나 웬걸. 경내로 들어서자, 암자 곳곳에 공사 자재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이번엔 지붕 기와를 교체하는 공사라 한다. 법당에는 사람이 출입하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이리저리 비계가 매어져 있다.

법당 안은 약간 어두컴컴하다. 눈이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지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사시가 넘었으니, 마지공양을 드실 시간이 지났건만 불단 앞에는 아무 음식도 차려져 있지 않다.

아직 공양도 못 드셨구려. 다음 세상에 태어날 적엔 부처님들께서도 저 아래 큰 절에 태어나시구랴. 쯧쯧쯧….

눈으로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는 마음속에 있건만

 '백제의 왕들이 머무는 전각'이라는 뜻을 가진 백왕전.
'백제의 왕들이 머무는 전각'이라는 뜻을 가진 백왕전. ⓒ 안병기

 백왕전 우측 바위에 부조한 약사여래상.
백왕전 우측 바위에 부조한 약사여래상. ⓒ 안병기

법당 건너편엔 백왕전이라는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전각이 있다. 예전엔 못 보던 전각이다. 아, 너로구나. 법당 부처님 공양 그릇을 텅텅 비게 만든 게.

백왕전은 백제의 모든 임금이 머무르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백제 31대 의자왕을 필두로 그 뒤편에는 풍태자·융태자 충마(忠馬)· 백제유민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전각을 지은 뜻을 알기란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까닭을 아는 것 만큼이나 난해한 일이다.

백왕전 오른쪽 바위엔 약사여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건 또 언제 새긴 것일까. 약사여래상이 쓸쓸하게 비에 젖고 있다. 인간이란 보지 않으면 쉽게 믿지 못한다. 기독교 성경에 이르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11장)"라 했다.

눈으로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는 언제나 제 마음속에 있건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마음 바깥만 두리번거리며 제 부족한 믿음의 증거를 구하려 한다. 기독교나 불교나 모두 마찬가지다.

욕망이 위험한 것은 눈덩이처럼 커지기 때문

 법당 뒤편에 있는 바위굴.
법당 뒤편에 있는 바위굴. ⓒ 안병기

법당 뒤편엔 굴이 있다. 이곳이 백자 왕자 융이 피신해 있었다는 융피굴인가? 굴 속엔 두 개의 진열장이 있고, 그 속엔 이름이 새겨진 초롱과 작은 부처가 진열돼 있다. 아마도 명부전의 역할을 하는 곳인가 보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피해 조금 앉았다가 가고 싶건만 공간이 없다.

다시 법당 앞으로 내려온다. 마당 가에는 아주 큰 모과나무가 있다. 크기가 구례 화엄사 구층암 법당 앞 모과나무만 하다. 늙은 모과나무 가지에 새움이 트고 있다. 나무에 움트는 새 잎이 꽃보다 아름답다.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하는 조붓한 잎에는 화려한 꽃에는 없는 아련함과 애틋함이 묻어 있다. 난 그 물리지 않는 사랑스러움이 좋다.

시선을 거두어 마당 아래 길가를 굽어본다. 시누대 푸른 숲이 비에 젖고 있다. 후두둑씨, 오늘 우린 여기에 때맞춰 아주 잘 온 거야. 저것 봐. 나무고 풀이고 꽃이고 온통 당신의 방문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잖아.

후두둑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씨에게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 이용한 시 '안녕, 후두둑씨' 전문

지금 이 순간 내 희망은 소박하다. 후두둑씨와 더불어 커피 한 잔 마시는 것. 그러나 난 이 작은 욕망의 발화가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걸 안다. 모든 욕망은 눈덩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라는 속담이 생겨났겠는가.

자, 후두둑씨. 커피 생각일랑 싹 지우시고 다시 길을 나서시지요. 이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신원사랍니다. 후루룩씨가 입맛을 다시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후두둑씨가 삐쳤는지 비가 더욱 세차게 퍼붓는다.

 법당 마당가에 선 모과나무.
법당 마당가에 선 모과나무. ⓒ 안병기

 위에서 내려다본 시누대 숲.
위에서 내려다본 시누대 숲. ⓒ 안병기


#계룡산 #신원사 #고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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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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