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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의 가장자리> 한 장면.
<천국의 가장자리> 한 장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휑한 벽면의 현대적인 스틸 사진. <천국의 가장자리>는 제목만큼이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일 거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실제 영화는, 예감과 180도 달랐다. 한적한 가게에서 체르노빌 후유증에 관한 대화가 오간 뒤, 독일의 성매매 지역에서 '리얼하게' 출발한 영화.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완성도를 갖췄으며, 감히 '천국'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만한 간격의 화해가 있었다.

터키와 독일이 주고받는 두 여성의 죽음

영화는 세 쌍의 인물들을 세 장에 나누어 배치한다. 한부모 가정의 독일인 모녀, 터키에서 건너와 독일에 정착한 부자, 독일로 건너와 몸을 파는 엄마와 지하조직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독일로 불법입국한 딸로 이루어진 터키 모녀. 이들이 성매수 남성-성매매 (피해) 여성, 레즈비언 파트너 등의 관계로 엮인다.

EU(유럽연합)가입을 앞두고 있는 터키는 가난한 데다가 반정부시위로 시끄럽다. "터키에서는 가진 자들만 교육을 받"고, "터키에서는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성(姓)이 다르면 죄수 면회도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터키의 법이니까".

이런 터키의 상황이 터키의 이십대 여성을 무장 투쟁, 테러범으로 몰고 간다. 미국 브랜드 티셔츠는 입지 않으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 급기야 독일로 불법입국해 '혁명에 반대한다'는 괴테의 시를 읽는 대학 강의실에서 잠자리를 찾게 만들고, 학생 식당에서 밥을 사먹게 만든다. '회개'(정치범의 신념포기)를 거부하게 만들기도 하고, '회개'한 동지에게는 배신자라며 침을 뱉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 독일에선 터키 출신 노년 남성이 터키 출신 성매매 여성에게 폭력을 휘둘러 죽게 만들고, 감옥으로 끌려간 자신의 여자친구를 찾아 터키로 건너온 독일 이십대 여성은 열 살도 채 되지 않을 법한 남자 아이들의 총놀이에 죽음을 맞는다. 첫 번째 죽음이 분노를 부추기고, 독일에서 터키로 관을 보냈다면, 두 번째 죽음은 모든 곪은 분노를 터뜨리고, 터키에서 독일로 관을 보낸다.

여성이 여성을 돕도록 한 발짝 물러나는 <천국의 가장자리>

 <천국의 가장자리> 한 장면.
<천국의 가장자리> 한 장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나비효과'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영화도 있었지만, 한 쪽에 쌓이고 쌓여 곪아왔던 빈곤, 분노, 증오 같은 것들은 종종 어처구니 없이 증폭되어 어처구니 없는 상대에게 향하곤 한다. 죽음과 가장 상관없을 것처럼 보였던, 이른바 '중립'인 독일인 여자친구의 죽음. 부자 나라에서 어린아이처럼 곱게 자란 희생양은 어느 순간, 꼬인 매듭을 툭하고 푼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절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내가 널 도울게. 내 딸이 원하던 거였으니까. 이젠 내가 원해."

독일에 건너가 성매매를 하며 구두를 보내오던 자신의 어머니가, 터키 출신 한 남자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EU와 식민국을 증오하던 한 여자. 무언가를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던 한 여자가, 방향이 엇나간 분노를 어느 순간 툭 하고 내려놓는다. 딸을 잃은 어머니와, 어머니에 이어 자신의 여자친구도 잃은 딸이 국적과 종교, 인종을 건너뛰어 서로를 안는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미덕은 국적과 나이, 계급을 떠나 물리적 폭력의 성별을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지와 가난과 여기에 맞선 무장투쟁조차도, 폭력이 가장 먼저 죽이는 것은, 목적을 떠나 언제나 여성 혹은 약자들이다.

이 영화가 가진 두 번째 미덕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주인공을 개입시키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배경에 비켜서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용서와 화해, 종교와 같은 주제는, 감동적이지만 종종 순서가 뒤섞이고, 누군가를 빠뜨리기 일쑤였다. <천국의 가장자리>는 전면에 영웅으로 개입해 목소리를 키우지 않고, 여성이 여성을 구하는 역할을 하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가만히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은, <천국의 가장자리>를 지키는 파수꾼의 자리에 앉아있다. 서울 국제여성영화제의 축적된 10회 역사가, 조심스레 남성 감독에게 연대의 가능성을 여는 길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적어도 이 영화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범위에서, 그 역할을 최대치로 수행하고 있다.

 <천국의 가장자리> 한 장면.
<천국의 가장자리> 한 장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아, 프로그래머에게 오픈 시네마를 묻다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앞으로도 타자와의 공감능력과 윤리적 감각이 높은 남성(감독들의 영화)을 지속적으로 발굴 상영하여 여성영화를 확장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성영화제 개막을 앞둔 3월 중순, 김선아 수석 프로그래머에게 오픈 시네마의 취지를 물었다.

- 10회째 여성영화의 범주가 다양해지고 넓어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남성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그 범주에 포함된 건가.
"10년 전에 여성영화제가 바라봤던 사회문화적인 경계가 많이 바뀌었다. 이성애, 동성애나 남녀의 구분이 딱 나뉘는 것보다는 서로 많이 스며들어갔다. 10년 동안 여성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영화제를 끌어왔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랜스젠더 등으로 경계가 확장되면서 시험적으로 남성 감독의 여성 영화를 바라보게 되었다."

- 10년간 여성영화의 역량이 축적된 만큼 남성 감독의 영화도 포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작용한 건가.
"그렇다. 생물학적 이분법을 떠나 전세계 영화 흐름에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주체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도 많고, 남성 관객들도 관심을 기울인다. 여성주의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불식시키는 흐름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작년에 퀴어 레인보우 섹션을 특별전으로 도입한 뒤 올해부터 상설전으로 개편했듯이, 반응을 지켜보고자 한다."

- 제도나 정책 차원에서 '여성'자를 빼고 '성평등'이나 '성인지'라는 용어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눈에 많이 띈다. 이런 고민과도 맞닿아 있나.
"한번도 집행위 차원에서 그런 이야기는 논의된 바 없다. 여전히 '여성'은 유효하며 중요한 담론이다. 다만 누구와 함께 손을 잡을 것인가 연대의 문제다.

여성영화제 기간 '오픈 시네마' 섹션에서는 총 6편의 장편 영화가 상영된다. 과테말라 성매매 여성 축구단을 다룬 <레일로드 올스타즈>, 유태인과 이슬람 여성 간 연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유태인 레즈비언 공동체 <비밀>, 스웨덴판 델마와 루이스 <하트브레이크 호텔>, <라다크의 아이스하키 소녀들>이다. <천국의 가장자리> 파티 아킨은 <미치고 싶을 때>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감독이며, 본 영화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천국의 가장자리#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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