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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절차적 민주주의(procedural democracy)가 회복된 이후 다섯번째 선거인 제17대 총선을 통해 한국 정치는 민주화 2기에 진입하였다. 지난 2002년의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시작된 3김 정치식의 민주화 1기 마무리가 이번 총선을 통해 완결된 것이다. 이번 총선은 정치권의 세대교체와 세력교체를 가져왔고, 이는 정치 리더십의 변동 그리고 리더십 유형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러한 결과는 그 동안 우리 정치를 지배해 온 지역주의 균열 구조의 근본적 재편과 대체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정치는 17대 국회의 구성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17대 총선 리포트>, 21쪽)

 

사상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며 마감된 이번 총선을 바라보면서 문득 지난 17대 총선을 떠올렸다. 당시 17대 총선은 매우 중요한 시기, 민감한 사안을 안고 시작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부터 2004년 17대 총선까지, 한국 정치는 3김 시대 막바지이던 민주화 1기 시대를 넘어서서 민주화 2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는 바로, 87년체제가 가져다 준 절차적 민주화 기반에 꽃을 피울 민주화 2기 시대의 굳건한 정착을 열망하던 때였다. 그런 와중에 치르게 된 총선이 17대 총선이었다. 그런데, 17대 총선은 그런 근본적인 문제 말도고 아주 '쇼킹'한 충격적 사안을 안고 시작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 우리는 그때 '노무현 돌풍'을 경험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민주화 2기를 바라는 건 꿈에 가깝다 할 정도로 여전히 보수정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른바 기득권층을 다시 한 번 넘기에는 현실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17대 총선을 얼마 앞두고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한국 정치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민주화 2기 시대를 구체적으로 다지기 위한 모든 시도가 한 순간에 무너져버릴 상황이었다.

 

탄핵 열풍으로 순식간에 달아오른 지난 17대 총선거는 결국 탄핵 후폭풍으로 마무리되었다. 노무현 정부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하던 열린우리당은 미처 생각지 못한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정치 판도는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그간 쌓아 온 정치적 명성을 가까스로 유지한 한나라당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17대 총선은 우리나라 정치사를 정말 새롭게 쓸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였다. 총선 승리 후 탄핵소추마저 넘어선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그만큼 국민에게서 더 많은 기대를 받게 되었다. 당장 모든 면에서 변화를 일으키긴 어렵더라도, '이제부터는 정말 해야 했던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정말 그 기대감은 실제 충족되었을까? 17대 대선과 18대 총선 결과를 놓고 볼 때, 결과적으로 그 기대감은 지금 어디선가 길을 잃었다.

 

18대 총선, 17대 총선 뒤뜰에 무엇을 남겼나

 

이번 18대 총선은 지난 17대 총선과 매우 다른 상황에서 치러졌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볼 때, 17대 총선이 당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이 강했던 반면, 이번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의 허술한 정권 이양 과정에 대한 심판론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17대 총선에서 기대했던 노무현 정부 중간 평가 문제는 탄핵 열풍에 먹혀버렸고, 이번 18대 총선은 17대 대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 허술한 이명박 정부 정권 운영 방식에 대한 심판론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다.

 

그렇게 18대 총선이 끝난 후, 우리는 너도나도 강력한 보수정치 회귀를 우려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가 지난 17대 총선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없을까? 한국 정치 발전의 위기에 몰린 상황을 반전 시킨 그 어떤 숨은 능력을 지금 우리에게 비춰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말이다. 적어도 그 때 그 열정이라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싶다. 안 되는 일일까?

 

18대 총선 후,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지역주의 회귀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성숙한 선거문화 정착도 오히려 퇴보한 듯하다. 17대 총선을 탄핵 이슈가 뜨겁게 달군 것과 달리,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의 연이은 정책 혼란에도 불구하고 변화는커녕 오히려 보수화를 공고히 하는 결과만을 남겼다.

 

지금 우리는 그래서 더욱 17대 총선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의미있는 변화를 이루고도 '미완의 완성'처럼 사라진 17대 총선이 당혹스러운 결과만 남긴 18대 총선에 무언가 '메시지'를 던져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18대 총선을 잠시 접어두고, 도리어 17대 총선을 잠시 돌아본다.

 

17대는 탄핵 역풍, 18대는 대선 재탕

 

누군가는 18대 총선이 17대 대선 재탕이라고 했다. 지난 17대 대선처럼 (상대적) 압승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수화 회귀 현상이라는 문제가 재차 불거졌기 때문이다. (집단) 우경화라는 표현까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지레 짐작으로 지나친 걱정을 한다고 보기엔 보수화로 기우는 현 상황이 너무 안타까울 정도로 심각하긴 하다. 정권 탈환에 성공한 보수층에 이번 총선은 작게나마 푸드득 흉내라도 내 볼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쓸만한 '날개'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믿을 만한 '날개'인지 알 수 없고 장담할 수도 없는 마당에, 그것을 의지하는 유권자들이 많았다는 건 참 씁쓸한 일이다.

 

강력한 보수성향 정부 스스로 만들어낸 많은 장애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대 대선에 이어 쭉쭉 이어져 온 보수화 흐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점을 생각해야 하나.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을망정, 17대 총선이 일으킨 바람은 지금 다시 불 필요가 없는 '지나간 버스'에 불과한 것인가. 딱 들어맞거나 딱 입맛에 맞을 정도는 아니어도, 17대 총선이 지금 이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있지 않을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17대 총선 현장 리포트>에 담긴 17대 총선 몇 장면을 잠시 살펴본다.

 

"17대 총선은 탄핵과 지역주의, 그리고 감성을 자극한 이미지 캠페인이 주도한 선거였고 공약의 영향력과 인물요인이 약화된 선거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중략) … 이번 총선이 갖는 의의는 상당히 크다. 우선 '정치 물갈이'로 표현되는 세대교체의 열망이 이번 총선 결과에 반영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번 총선 결과 국회에 입성한 정치 신인의 비율은 15대와 16대에 비해 약 20%가량 높은 63%로, 현역 의원의 기득권을 타파하고(윤종빈 2001; 2002)의회엘리트의 교체를 가져온 커다란 변화라고 평가된다. 이번 총선이 갖는 또 다른 중요한 의의는 정치관계법의 획기적인 개정으로 선거운동 양상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학계와 시민단체가 지속적으로 개선을 요구했던 공정성과 공명성을 침해하는 요소들이 방지되어 정치인들 스스로도 놀라는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밖에도 전체 의원의 13%에 달하는 39명의 여성 의원의 탄생, 1인 2투표제를 통한 민주노동당의 10석 확보 등은 17대 총선이 중요한 정치사적 의의를 갖게 하는 선거결과이다."

(같은 책, 219~220쪽)

 

"제17대 총선의 결과 국회의 모습이 과거와 많은 변화를 갖게 되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의석인 152석을 차지함으로써 1988년 13대 총선 이래 16년 만에 처음으로 여대야소 국회가 탄생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차지하여 44년만에 처음으로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하는 기록을 낳았다. 정치 신인의 진출과 세대교체도 과거보다 훨씬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299명 가운데 188명(63%)이 초선으로 16대의 40%보다 크게 늘었다. 또한 전체 당선자 가운데 40대 이하가 43.1%(129명)로 16대의 28.5%보다 15%가량 늘어난 반면 60대 이상은 16.4%로 16대(32.6%)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전체 당선자 299명 가운데 50대 이하가 83.6%(250명)를 차지하여 세대교체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같은 책, 265쪽)

 

17대 총선은 1인2표제 첫 시행이라는 겉으로 보이는 변화 뿐 아니라 세대교체를 통한 기존 기득권층에 휩싸인 정치권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기대가 넘쳤다. 그 기대감을 더욱 들썩이게 한 건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에 성공한 일이었다. 진보정당 자체 역량으로만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진보정당이 원내입성에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탄핵사태 때문에 발생한 급격한 투표율 상승은 내용면에서 이와 같은 의미있는 변화들을 남겼다.

 

그로부터 4년 후, 우리는 18대 선에서 4년 전 보았던 많은 변화와 가능성들을 다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다. 기득권에 깃댄 거만한 정치 문화를 바꾸려던 시도는 지금 옛 추억만 남긴 채 방황하고 있다. 진보정당 원내 진출만으로도 감격스러워했던 많은 진보정당 지지자들과 우호적 유권자들은, 실질적인 역량 쌓기에 약했던 진보정당(들)을 놓고 이번 18대 총선에서 심한 저울질을 했다. 결과는 물론 '제자리걸음'도 아닌 '뒷걸음질'이었다.

 

17대 총선처럼 여대야소 국회를 만들어 낸 게 유일한 공통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번 18대 총선은 어느 것 하나 발전한 게 있다고 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선거였다. 국민들이 17대 총선을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면서 바랐던 건 아마도,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이 오기까지 그 빈 속을 채워가는 일이었을 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었다. 진보와 보수는 옷을 바꿔 입은 듯했다. 변화를 존재가치로 삼는 진보정당들이 도리어 변화하지 못하는 당으로 인식되고 국민적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중심의 보수층 결집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일단 경제부터'라는 식으로 진행된 17대 대선의 보수 흐름은 결국 18대 총선에서도 사실상 큰 변동 없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속을 보면, 반드시 이번 총선 결과가 한나라당에 유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수층 결집을 위한 범여권 형성 가능성은 만들어졌다.

 

18대 총선에서는 17대 총선에서 보여 준 탈기득권, 반기득권에 관한 기본적 사회 쟁점이 사라졌다. 이미 두 번이나 권력을 쥐어주었던 '개혁'세력이 (자의든 타의든) '개판'세력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진보도 아닌 것이 보수도 아닌 것이 개혁세력이라며 '개판'을 쳐놨으니, 17대 대선부터 18대 총선은 이미 예정된 결과를 받아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보수 회귀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17대 대선 때부터 이미 자리잡은 '오래된 미래'였다는 말이다.

 

미숙했던 '세대교체', 꾸준한 '시대교체'로

 

18대 총선은 끝났지만 우리는 17대 총선이 남겨 준 몇 가지를 지금 우리 상황에 대한 조언으로 삼아보고 싶다. 우선, 17대 총선이 남겨 준 '세대교체' 가치를 각 정당(들), 특히 진보정당(들)이 '시대교체'라는 말로 바꾸어 적용하길 바란다. 21세기에 맞는 (진보)정당체질, 사회구조 변화 이후에 필요한 (진보)정당체질로 바꾸어가는 '시대교체' 작업을 더욱 진지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각 당마다 보수인지 진보인지 (개혁)중도인지를 분명하게 재설정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찾아 온 보수층 중심의 여대야소 상황이라면, 진보성향 당들은 더더욱 자기 당이 추구하는 목표를 감당할 만한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찾아내 사회공론화 해야 한다. 꼭 보수성향은 아니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일단 경제부터'라는 도식에 너무 매몰된 것처럼 보이는 많은 유권자들에게 이제부터라도 '그래도 사람부터'라는 또 다른 가치를 온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보수는 늘 제자리에 있다. 그들 특유의 '안정'과 '결집'은 수없이 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기회만 있으면 일사천리로 모인다. 그러나, 진보는 다르다. 진보는 그들 특유의 '변화'와 '이동'을 밥 먹듯이 한다. 이건 그들이 새로운 사회 현안에 대한 다양한 관심 때문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태생적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 조정역할을 하려 하는 이른바 개혁, 중도세력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자리잡기 힘들다. 이념대결, 계급대결이 우리나라처럼 강력한 데가 또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시대교체'가 필요하다. 지난 17대 총선에서 기득권 정치 문화를 깨기 위한 '세대교체'를 시도했다면 이제는 '시대교체'를 할 때가 되었다. 보수든 진보든 또는 개혁, 중도든 간에 '보수 회귀'라는 새 시대(?)에 맞는 정책을 다시 짤 때가 되었다.

 

'불판을 갈 때가 되었다'던 익숙한 구호는 이제 '인물'이 아닌 '정책'이라는 의미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17대 총선에서 기존 인물을 바꾸는 단기적 수준의 변화를 시도했다면 진보세력 퇴보와 개혁세력 실종을 겪은 18대 총선 이후에는 오히려 기존 정책을 재검토하는 수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바뀌어야 한다는 17대 총선의 장밋빛 꿈은 이미 오래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희미한 꼬리만 남긴 채. 물론, 18대 총선도 17대 총선과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보다 못한 모습을 하고서 이미 역사 속 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그건 바로, 이제야말로 정말 '불판을 갈 때'라는 사실이다.

 

'미완의 완성'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진 17대 총선은, 18대 총선을 이미 치르고 난 후 속앓이하는 우리 정치권과 한국사회에 그렇게 또 다른 의미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17대 총선 현장 리포트> 한국정당학회. 푸른길, 2004.


#17대 총선#18대 총선#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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