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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혼자 자유를 외치고 싶어 떠나온 길인데 좋은 것에 혼자일 때는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니 말이다. 마지막 시간을 잡으러 나온 연말 과달라하라 풍경은 그 어느 곳보다 생기가 넘친다. 사람들의 표정에선 빈부를 읽어낼 수 없고, 거리의 분위기로는 사회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 '연말', 그리고 '함께'가 만들어 내는 장면들이다.

 
해질녘 카떼드랄 뒤편을 산책해 보기로 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햇살이 미치는 구석구석까지 땅을 밟아보자. 탐스럽게 감춰진 에스프레소의 텁텁한 맛이 혀에서 까탈대면 걸음을 잠시 멈춰 세워 자판기 커피를 그리워하는 감정의 사치도 녹여 내리는 곳, 과달라하라. 홀로 위풍당당한 대성당을 시선의 뒤로 돌리고 걷다보면 감춰졌던 과달라하라의 넉넉한 속살들이 보인다.
 
구라파 풍의 건축물들이 도열해 있는 따빠띠아 광장(Plaza Tapatia) 거리엔 너의 풍요로운 미소와 나의 빈곤한 웃음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물방울들 사이를 요란하게 메우고 있다. 한없이 늘어진 게으름으로 공간을 헤매는 순간은 서든데스의 마지막 한 점처럼 지독하게 갈급하지 않아 좋다. 근대 역사가 담겨진 호스피시오 카바나스(Hospicio Cabañas)도 무관심으로 훑고 지나가면 너른 광장에 주체 못할 자유가 펼쳐진다. 어떻게든 누리지 않으면 안 될 기세로 일탈본능을 세차게 깨워낸다.
 
 
"사진 좀 찍어줄까?"
 
호스피시오 카바나스 광장 앞 독특한 모양의 청동의자에서 앳된 10대 커플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 행복에 잠시 잠겨보려 했었나. 눈치도 없이 사진기를 들어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그들에게서 10년 전 아련한 내 기억을 깨울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 일. 서툰 포즈로 렌즈를 바라보는 그들에게서 풋풋한 청춘의 향기가 느껴진다. 서글서글한 눈으로 서로를 담아두고, 아직 보드라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고, 또 안아주고 입맞춤하는 지금 여기가 달달한 추억을 만들어 주리라. 부.럽.다.
 
광장의 여유로움이 모든 신경들을 무던하게 만들어 버리고 시간을 잊은 몽상은 살금살금 찾아온 어둠 속에 스며들어 간다. 더 어두워져 눈 앞에 자유가 방해받을까 조급해진 난 맞은 편 청동의자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또 너희들이야?"
 
거기에는 아까 그 십대커플이 자리만 옮긴 채 여전히 살가운 애정표현으로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지금만큼이나 아름다운 세상이 또 있을까. 청동의자에 앉아 시샘이 빠르게 번져가는 감정을 들춰낸 표정으로 셀카를 찍어보니 건조한 우울함이 얼굴에 그득 담겨있다. 
 
다시 따빠띠아 광장으로 들어오니 올 때 땅에 쳐 박아 둔 시선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가게들이 조명 아래 먼 미래의 들키고 싶지 않은 욕심을 유발시킨다. 화려한 디자인이 열을 지어 전시되어 있는 드레스 숍들이었다. 유니크 하면서도 고풍스러움으로 멋을 낸 드레스는 여성들의 마음을 홀라당 뺏어간다. 한 번쯤은 고운사랑 떠올려 쇼윈도 안에 전시된 드레스를 입혀보는 것도 기분 좋은 상상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드레스들, 욕심난다.
 

 

"저기요! 안녕하세요?"

"뭐야? 또 너희들이야?"
"또 만났네요. 우리 분수 배경으로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요?"
"물론."
 
세상에, 또 그 커플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먼저 아는 체를 한다. 그리고 남자애의 이름이 안토니오, 여자애의 이름이 카르멘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둘 다 열 여섯이라니 상큼함 앞에 감히 마주한 내 나이가 어쩐지 고리타분해 보인다. 그래, 젊음이 좋다. 맘껏 자유해라. 그리고 맘껏 방황해라. 단,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사진만 얼른 찍고 혹시 내 홀로 외로운 시선을 눈치채지 않을까 헤어짐의 인사는 가급적 짧게 한다.
 
과달라하라의 감미로운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다음 날은 뜰라께빠게(Tlaquepague)를 찾았다. 낭만과 서정이 넘치는 세레나데를 경쾌한 연주로 재해석하는 마리아치 공연을 통해 멕시코의 향수를 느껴보고 싶었다. 검정 벨벳으로 차려입은 근엄한 옷차림에 솜브레로의 널찍한 챙 속에 진한 콧수염과 강한 눈빛이 남성다운 매력을 발산하고 마음을 주물럭거리는 선 굵은 화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마리아치.
 
하지만 이제는 레스토랑이나 거리를 돌며 한 푼 벌이도 쉽지 않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그들에게서 복잡다단한 마리아치의 유래를 알아채는 눈썰미를 갖긴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흐트러짐 없는 자유분방함으로 기타줄을 튕기고 트럼펫을 불고 그들의 음악을 존중하는 이들을 위해 흥을 돋우며 최선의 연주를 다하는 모습은 자연히 주머니를 뒤지게 만든다.
 
때론 격정적으로 때론 부드럽게 사랑과 인생을 노래하는 그들의 음악은 달빛 창가에서도 전장에서도 그리고 광장에서도 조금씩 그 궤를 달리하며 불려졌을 것이다. 'Salud!' 맑고 청아하게 술잔을 부딪히며 데낄라 한 잔에 골 깊은 삶의 애환을 털어내 버리는 옵티미즘의 궁극적 해탈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여유를 가지게 되는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지.
 
 
연주가 끝나고 간헐적인 박수 몇 차례와 팁을 얹은 수고료가 손에 쥐어지면 마리아치들의
얼굴엔 연주할 때와는 또다른 만족한 미소가 얼굴에 퍼진다. 하지만 주말인데도 레스토랑은 여느 주말보다 한산하고 자신들의 음악을 신나게 연주할 기회가 없는 그들의 눈빛은 길 잃은 어린 양처럼 측은하게 보인다.
 
시간이 늦어 뒤돌아 가는 길, 그림자를 길게 던진 악기가 유난히 무거워 보이지만 마리아치들의 어깨 위로 아직 희망이 걸터앉아 있음을 본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데킬라 한 잔에 껄껄거리며 하루를 털어낼 그들의 삶은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는 나보다 어쩌면 더 행복할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아쉬워도 기뻐도 어깨를 토닥여 줄 함께하는 친구가 바로 옆에 있잖은가. 내 시선은 달빛 아래 그들을 향한 부러움으로 잠시 동안 멈춰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자전거, #문종성, #비전노마드,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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