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운전면허시험을 보는 1인당 비용이 학원을 다니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만원이 넘고 시간적, 경제적으로 불필요한 손실이 크다."

 

27일 법제처 업무보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 대통령은 "미국처럼 간편하게 시험을 보고 합격할 수 있도록 수험자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관계부처와 협의해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또 택시·버스기사 친절교육과 분식점 업주 위생교육에 대해 "교육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서울시장 시절 가봤더니 서로 시간만 뺏고 효율적이지 않더라, 시장경제원리에 맡겨놓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사실상 교육 폐지를 주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업무 지시가 지나칠 정도로 세세해서 '과장인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정을 멀리 보고 큰 틀에서 방향을 제시해야 할 대통령이 실무자가 해야 할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세세한 현안까지 직접 언급하는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 때문에 공무원들의 비명소리가 커지고 있다. 상명하달 문화에 익숙한 공무원들에게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곧바로 '지침'이 된다.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공무원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이유다.

 

급조된 '220대 통과' 톨게이트... 제2의 전봇대?

 

26일 밤 9시 국토해양부가 '긴급' 보도자료를 냈다. 국토부 도로정책과가 도로공사 전국 톨게이트 261곳의 통행량을 일일이 분석한 결과, 무안~광주 고속도로 구간의 문평 톨게이트가 하루 평균 282대가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과연 신문사 마감시간이 대부분 지난 시간에 '긴급'하게 내보낼 사안이었을까?

 

국토부의 한밤 중 보도자료 해프닝도 이명박 대통령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0일과 24일 부처별 업무보고에서 "하루 220대만 통과하는 도로 톨게이트에 12~14명이 근무하고 있다"며 예산 낭비를 지적했다. 인수위 시절 이명박 대통령이 탁상행정 사례로 언급한 '전봇대 사건'의 재판이었다.

 

당시 한국도로공사는 "그런 톨게이트는 없다"며 "가장 적은 톨게이트의 하루 평균 통행량이 1500여대"라고 설명하면서도 '220대 톨게이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사실 도로공사는 전국의 고속도로 차량 통행량을 실시간으로 체크해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차량 통행량이 가장 적은 곳은 중부고속도로의 지곡 톨게이트로 하루 평균 1400~1500대를 넘는다.

 

청와대만 이를 모르고 있었다. 지난 19일 "도로공사에서는 '220대 톨게이트'를 못 찾았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못 찾았다'는 것은 아직까지 못 찾았다는 것"이라며 "대통령이 현장에 가서 본 것이기 때문에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새로 톨게이트를 하나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그럼 국토부가 26일 밤 발표한 282대 톨게이트는 뭘까? 무안~광주 고속도로는 지난해 11월 개통돼 아직 이용 차량이 적은 편이다. 게다가 220대는 아니지만 가장 근접한 수치를 끌어내기 위해 최근 한 달간 이용량만 평균을 냈다는 의혹을 샀다. 지난해 연말과 올 초 차량 통행량은 이 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국토부는 동함평(588대), 장성물류(835대), 일로(852대) 등 일평균 통행량이 1000대 미만인 톨게이트 11곳을 더 찾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인수위 시절 뽑혀나간 전봇대는 결국 이 대통령이 '차량 통행을 방해했다'고 지적했던 그 전봇대가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220대 톨게이트' 사건 역시 예산 절감이라는 당초 취지는 온데간데 없고, '탁상 행정'이라는 악순환만 재현됐다.

 

대통령 말 한마디의 '힘!'

 

지난 17일 지식경제부 업무보고를 받던 이 대통령이 느닷없이 생활필수품 50개 품목의 가격을 집중 관리하라고 지시한 것도 '제 2의 전봇대' 사례로 꼽힌다. 이 대통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계기관은 소비자물가지수 품목 489개에서 부랴부랴 50개를 추려내느라 난리통을 치렀다.

 

생필품 물가지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말한 '50개 품목'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또 50개를 선정한다고 해도 개별 가격을 관리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기획재정부가 '52개 생필품'의 물가지수를 만들어 발표했지만 '실효성 없는 정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대통령 말 한마디의 '힘'은 강했다. 행정안전부 업무보고 당시 이 대통령은 안양 어린이 실종 살해 사건과 관련, "인구 50만에 경찰서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냐"고 질책했고, 다음 주에 바로 화성경찰서가 생겼다.

 

이 대통령은 또 새 정부 들어 각 부처에 잇따라 신설됐던 각종 테스크포스(TF)에 대해 "잉여 인력들에게 자리를 주기 위한 온정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질책 한마디에 이들 TF는 모조리 공중분해되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일부 부처 TF는 잉여인력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과장이 팀장을 맡은 실무형 조직이거나 중장기 과제 등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무작정 해체하는 것이 맞느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대통령은 과거 경험담을 늘어놓거나 구체적 수치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의중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예전 자료거나 실제와는 거리가 멀어 관계 부처 공무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농림수산식품부 업무보고 당시 이 대통령은 "배추 한 포기가 (농민들이) 팔 땐 900원인데, 가락시장에서 사려면 3000원, 5000원 한다. 묵은쌀 보관료만 6000억 원"이라며 유통구조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가락시장에서 배추 한 포기는 1800~1900원 정도에 거래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이동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에 그랬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CEO 출신' 이 대통령의 시시콜콜 업무지시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탁상행정을 질타하기 위해 언급하고 있는 이 대통령의 '과거 기억'이 현실과 동떨어지다보니, 공무원들은 다시 탁상행정으로 일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검증되지 않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전 부처가 질질 끌려 다니고 있다"며 "바람직하지 않은 일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새로운 관치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이동관 대변인은 "대통령이 세세하고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은 공직자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기 위해서 체감할 수 있는 실례를 든 것"이라며 "대통령의 창조적 실용주의라는 것은 교조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의 무리하거나 지나치게 세부적인 지시 스타일은 'CEO 출신'이라는 경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스타일이 기업에서는 이익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국정 운영은 다르다.

 

이 대통령의 시시콜콜한 업무 지시가 '무조건 해야한다'는 지침이 돼서 공무원들에게 받아들여질 경우, 국가 이익 창출 보다는 '무리수'로 또 다른 비효율과 낭비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염려는 벌써 상당 부분 현실화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제2의 전봇대#220개 톨게이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