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3월 26일 순례 44일째, 설레는 아침이다. 낙동강 칠백 리 비경의 으뜸인 개비지를 순례하는 날이다. 그 길에 운문사 비구니 스님 150여분이 함께 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작을 어둡게 하는, 낙동강가에서 채취한 모래를 싣고 가던 덤프트럭이 점복되었다는 소식이다.

 

스님들을 기다리는 동안 낙동강변의 모래를 채취하기 위해 덤프트럭이 시계추처럼 들랑거렸다. 모래를 싣기 위해 덤프트럭이 200미터 이상 줄지어 서 있다. 지자체가 서두르고 있는 대운하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대운하가 시작되면 강변의 모래는 컨소시엄 회사들의 것이 된다.

 

8시 50분, 맑은 하늘의 구름처럼 청아한 비구니 스님(운문사 승가대학 학인) 150여명이 참여한 순례는 영덕 스님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오늘 낙동강을 모시며 부처님의 마음과 생명의 눈으로 우리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며 걷겠습니다. 경부운하 백지화의 물결이 큰 흐름이 되어 생명의 근원인 강이 강답게, 강의 의지대로 흐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국토와 자연환경을 우리는 잠시 빌려 쓰고 가는 나그네일 뿐 후손들이 살아갈 소중한 삶의 터전입니다. 큰 사안인 국토문제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손실을 터럭만큼도 양보할 수 없는 백년지 대계, 아니 천년지 대계여야 합니다.”

 

고요한 산사의 정기가 스민 가사장삼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가 우러나왔다. 타원형으로 제방에 둘러선 은광스님이 참회문을 낭송했다. 자연에 대한 탐욕과 무지를 씻어내는 생명수였다.           

 

“한 방울의 물일지라도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 속에는 팔만사천의 생명이 깃들어 산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날마다 읊조리고서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생명의 강과 그 속에 깃든 무한한 생명체와 그 모든 것을 품에 않은 국토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물신의 폭력' 앞에서 만생명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돈'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시대의 미망에 지혜의 장군죽비를 내리시어 폭력적 개발과 성장의 허장성세가 기승을 부릴수록 가난한 이들의 한숨이 깊어가고 산과 강이 파헤쳐져 결국은 모두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의 기도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온전히 생명의 근원으로 귀명하게 하는 수행과 성찰의 첫걸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남지읍 ‘아지리’에서 ‘용산리’까지 낙동강 벼랑에 나 있는 작은 오솔길 2.5km의 ‘개비리’. 옛날 아지리 주민들이 남지장에 가기 위해서 이용하였던 ‘개비리’에는 자생 ‘마삭’과 ‘부처손’이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걷고 있었다. 한 사람만이 걸을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은 자연스레 침묵의 기도가 되었다.

 

낙동강에서 깍아지르는 다도해의 섬을 연상케 하는 낭떠러지 구간을 통과하니 대나무 숲과 배밭이 펼쳐졌다. 숲이 깊숙이 품고 있는 배밭 위 길에서 잠시 쉬었다. 출발에 앞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잠시 명상기도를 했다. 낙동강을 섬기는 마음과 대운하 백지화를 위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 큰 절을 올렸다.

 

강가 배밭에서 전지를 하고 있는 주민(이두희, 46세)을 만났다. 쓸모없는 가지를 자르는 것처럼 단호한 입장을 들었다.

 

“대운하가 지역주민들에게 무슨 혜택이 돌아오겠습니까? 저 강물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꽉 찰 텐데. 누구를 위한 대운하입니까? 물류기지 생길 주변의 땅이 대부분 외지 사람들 것입니다. 대운하는 땅 부자들을 위한 잔치 아닌가요?”

 

낙동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유일한 오솔길에 붉은 깃발이 간간히 꽂혀 있었다. 아지리에서 남지읍까지 1022번 지방도로의 확장공사를 알리는 깃발이었다. ‘개비리’ 오솔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벼랑 밑으로 추진된다는 대운하도 잊게 했던 그 길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개비리’는 순례단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그 많은 길 중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이었다. 옛 선인들이 걸었고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미래 세대에게까지 영원하길 발걸음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달래 개나리가 손을 흔들어 주던 오솔길을 뒤로 하고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제방에서 잠시 쉬었다. 낙동강의 대표적인 상습 홍수피해 지역이었다. 아스팔트 제방을 따라 남지읍으로 향했다. 간간히 피어난 강변 유채밭을 이르렀다. 푸른 생명의 길을 맑은 정신으로 걷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멀리 서울에서 '마중물' 회원들이 준비해온 팥 칼국수와 곰탕 국물에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 40분, 오후 순례가 시작되었다. 청아한 목탁소리에 독경을 들으며 순례단은 원을 그리는 안행기도를 바쳤다. 그 기도의 마음을 모아 정안 스님이 국민께 드리는 호소문을 낭독했다.  

 

“한반도 대운하는 생명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마치 신권을 부여 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다. 국론 자체가 없는데 ‘국론의 분열’을 부추겨 대운하 계획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불순한 정치권 의도에 휘말리고 있다. 국민의 마음을 둘로 나누며 생명을 담보로 한 미망의 정치놀음놀이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대운하 반대’를 외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연에 빚지지 않고는 살 수 없으면서도 자연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오히려 탐욕만 키워가는 몰염치한 우리네 삶이 뒤돌아보기 위해서다.

 

몇몇 정치인의 권력 의지를 ‘애국’으로 착각하지 말기를 바라며, 대운하로 인한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를 있는 그대로 밝히시기를 바란다.

 

언론은 정치적 입장과 자사 이기주의 차원을 벗어나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보도를 주길 요청한다. 불교 종단의 어른 스님과 원로 스님들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의 관점에서 대운하 문제의 해법과 대안을 제시해 주십시오. 더 이상의 침묵은 묵시적 동의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정 대승의 차원에서, ‘불교의 관점’으로 대운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불자들은 ‘나’의 이익이 아니라 불제자의 입장에서 대운하 문제를 바라보길 간곡히 바랍니다. ‘지혜’를 모아 주십시오.” 

 

간곡하고 단호한 호소문은 오후 순례의 길을 힘차게 시작하게 해 주었다. 모타 사이클 경기장 관중석에서 잠시 쉬는 동안 장기자랑이 이어졌다. 먼저 천주교 최종수 신부의 춤과 재롱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대운하가 취소되었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대운하 말도 안 돼 억지 쓰지마!  대운하가 취소되었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원불교 김현길 교무, 불교에 이어 금산의 간디학교 학생들의 장기자랑이 이어졌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산다는 것 배운다는 것 가르친다는 것”

 

김정식(간디학교) 교사로부터 학생들과 2박 3일 순례에 참여한 동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정밀한 진단 없는 경제성 공약이 부담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생태학교의 교사로서 환경훼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대운하는 실체도 없을뿐더러 대운하는 미래세대의 재앙을 초래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5년의 임기를 위해 우리 아이들에게 재앙을 물려줄 순 없습니다. 저희 간디학교에서는 청소년 캠프를 열어 운하관련 프로그램, 토론회 등을 펼치며 운하 저지를 위한 활동을 펼쳐 나갈 계획입니다.”

 

순례단은 홍수 범람이 잦아 이주정책으로 폐허가 된 동네를 지났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언덕위의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아래 매화꽃 향기를 맡으며 찜질방이 된 폐교에 잔디밭에 도착했다. 44일의 순례 중 첫 발언을 하신 수경스님의 말씀으로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오늘 아름다운 길을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어 마음이 포근했습니다. 대운하 문제 때문에 항상 어깨가 무거웠지만 오늘은 기쁘게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내 삶을 돌아보며 성찰하였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국토도 청정합니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비로화장세계이며 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 운하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우리도 정진을 열심히 하여 마음과 국토가 청정해 져서 모든 중생들이 조화로운 삶으로 회향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순례#이명박 #대운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최종수 기자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일꾼으로,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으로 2000년 6월 20일 폭격중인 매향리 농섬에 태극기를 휘날린 투사 신부, 현재 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첫눈 같은 당신'(빛두레) 시사 수필집을 출간했고, 최근 첫 시집 '지독한 갈증'(문학과경계사)을 출간했습니다. 홈피 http://www.sarangsu.ne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