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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는 워싱턴 정계라는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오면서 선배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과 도덕을 억눌러 버렸다. 피츠제럴드에게 성실, 근면, 책임, 개인의 자유, 미국 헌법 같은 것은 거의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만 권력을 움켜쥐는 것을 뜻할 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에 매달리는 것. - 본문에서

 

빈스 플린의 <임기종료>는 정치스릴러다. 그것도 652쪽짜리로 아주 두껍다. 단순한 제목과 두께를 보면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작가는 무슨 할 말이 많길래 이렇게 두꺼운 정치소설을 썼을까, 궁금해지긴 하지만.

 

그런데, 예상 외로 이 책은 아주 흥미롭다. 별다른 기대 없이 책을 펼쳤는데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사건의 빠른 전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한다. 한 장만, 한 장만 더 읽고… 하다가 밤을 새게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묘사한 정치인들을 보면 저절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을 떠올리면서 비교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 더 심하게 썩었나….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의 계절 한복판에 서 있지 않은가. 4·9총선의 공천을 둘러싼 요란한 파열음이 정치권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지 않나. 정치인들이란 어느 나라고 같은 행태를 보이나 보다. 덕분에 어느 나라든 정치인들의 유전자를 검사하면 동일한 유전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미국의 정치스릴러를 소설로만 읽지 않고 그 속에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대입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지만, 돌아가는 정치판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드는 걸 어떡하나.

 

양심이나 도덕 같은 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추악한 정치인'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 미국.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재선 외에는 관심이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선을 해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다.

 

피츠제럴드 상원의원은 양심이나 도덕과는 상관없이 정치적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다. 미국의 정계에는 이런 정치인들이 흘러넘쳐 악취가 진동을 한다. 이 대목에서 문득 이게 소설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누구라도 마찬가지 일 듯.

 

그런데 때마침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썩어빠진 중진 정치인들이 차례로 살해당한다. 전문가의 솜씨다. 범인은 정치인들만 살해대상으로 삼았고, 살해과정에서 목표한 정치인 이외에는 개 한 마리도 죽이지 않았다. 단서, 당연히 없다. 이들 정치인의 죽음은 정치인들에게는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그들의 행태를 잘 아는 다수 국민들은 오히려 범인에게 호감을 나타내기까지 한다.

 

오늘 <뉴욕타임스>에 실린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의 37퍼센트가 배섯, 코슬로우스키, 피츠제럴드, 다운스의 죽음이 나라에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답니다. 아무래도 일반 국민들이 암살자들에게 공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은 언제나 똑같은 꼴인 정치인에 신물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이 암살자들을 오히려 용사로 둔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 본문에서

 

하원의장이 총 맞아 죽었는데 여론조사를 해보니 국가에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37퍼센트라고? 이 대목에서 저절로 실소가 나왔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

 

범인은 '추악한 정치인'의 범주 안에 미합중국 대통령을 집어넣었고, 대통령도 암살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한다.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던 대통령은 두려움에 떤다. 기막힌 솜씨다. 대통령은 FBI와 CIA를 비롯한 특수부대를 동원해 범인 찾기에 나선다. 그런다고 범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 여기 있소" 하고 나타날 리는 없을 터.

 

그래도 범인이 전직 특공대원이었다는 사실은 밝혀진다. 정치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직업관을 가진 네이비실, 그린베레, 레인저, 해병정찰대들은 정치인들을 혐오한다. 미국정부가 멍청이들 손에 놀아나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정치인들 때문에 작전 중에 부하의 절반을 잃은 전직 네이비실 간부라면 기회가 닿는다면 그런 정치인들을 해치우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추악한 정치인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 소설이 끝나지는 않는다.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 새로운 반전이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물론 그 안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누가 죽든 상관없이 나만 최고 권력을 쥐고 있으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 이것이 바로 정치판의 '영원한 게임의 법칙' 아니겠는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다. 당연히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다. 그 유효기간이 얼마나 지속될 지는 누구도 모르겠지만.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정치판의 이야기를 작가는 혐오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풀어냈다. 그래서 더 재미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인들에 대한 작가의 생각에 맞장구를 치게 되니까. 그 놈들 말이야 그렇게 당해도 싸, 지가 한 짓이 있는데 말이야, 이러면서.

 

<임기종료>는 작가가 1993년에 탈고했지만, 60여 곳의 출판사로부터 출판거절을 당한 뒤 자비로 출판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단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2월 28일 발행, 랜덤하우스


임기종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1

빈스 플린 지음, 김승욱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08)


태그:#임기종료, #추리소설, #빈스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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