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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풍경.
▲ 북극곰(?) 한겨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풍경.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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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멸하는 밤별 아래 오렌지 빛으로 온통 물들여진 조그만 광장. 성당의 미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은 바람을 타고 와서는 귀를 간질이며 도망가고 고즈넉한 운치를 더해 마음까지 살근살근 떨리게 만든다.

밖에서는 노래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시 세레나데가 젊은이들의 입에서 불려진다. 청춘이란 이렇게 맘껏 소리 질러가며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음을. 부러웠다. 내 언제 저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을 노래한 적이 있었던가. 그저 꼭꼭 마음에 감춰두고 숨기는 그것이 내 서툰 사랑의 방식이었는데.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우리는 너무 많은 불필요한 것들로 사랑을 고갈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합니다!" 마음에 터앝으로부터 터지는 벅차게 외치고 싶은 그 한 마디가 입술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막막한 머뭇거림, 공대수학보다 더 어렵다는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비밀공식, 그것이 알고 싶다.

마을 중심에 만들어 놓은 크리스마스 장식. 예수님의 탄생을 모티브로 했다.
▲ 아기자기 마을 중심에 만들어 놓은 크리스마스 장식. 예수님의 탄생을 모티브로 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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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성당에서 결혼을 하는 커플. 아마 멕시칸들에게는 이 날이 길일이리라.
▲ 결혼식 크리스마스에 성당에서 결혼을 하는 커플. 아마 멕시칸들에게는 이 날이 길일이리라.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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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예수님의 생일인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나에게도 이렇게 좋은 날 혹시 떡고물 정도는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해질녘에 그리스식 이름이 연상되는 아카포네타(Acaponeta)란 마을에 도착했다.

특별한 날 치고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동네다. 거기에 스물 일곱 번째 혼자 지내는 외롭고도 화려한 크리스마스라니 이보다 더 우울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유난히 먹구름이 낀 건조한 영국식 표정을 보게 된다면 99% 나일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마스 장식의 화룡점정.
▲ 트리 크리스마스 장식의 화룡점정.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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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라고 성당에 갔는데 때마침 결혼식 중이었다. 그렇다면 최고의 날에 최고의 경사를 누리는 커플임에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그것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자리.

성당을 가득 메운 하객들은 하늘 아래 수많은 인연들 중 또 하나의 기적적인 만남으로 한 몸을 이루는 새 가정의 탄생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에 살짝 끼여 하객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누군가를 축복할 수 있음이 또 하나의 축복이라는 것, 내 삶이 그마만큼 풍성해지는 여유로 다가온다는 것이 마냥 좋을 뿐이다.

크리스마스의 만찬은 햄 샌드위치로 대신했다. 선택할 메뉴가 많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간이식당에서 음식 먹는 표정을 살피다 내린 결론이었다. 먹을 때 표정은 거짓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반찬이었는지 샌드위치 4개가 홀라당 뱃속으로 슬라이딩해 들어간다. 따뜻한 팥죽 한 그릇이 그리운 야심한 밤이다.

서서히 차가움이 녹아드는 늦은 밤, 이 작은 도시에 젊은이란 젊은이들이 다 광장에 나온 듯 시끌벅적하다. 그 열기에 슬쩍 동화되어 자전거를 잠시 멈춰 세워 카메라를 끄집어 내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헤이 맨!"

그 중 한 남자무리들이 뒤에서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어리뜩해진 난 짐짓 못들은 걸로 했다. 그리고는 그 말을 애써 뒤로 넘기며 얼른 사진기를 가방에 집어넣고서는 그대로 뒤도 안 보고 태연하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겁이 난 건 아니었다. 다만 분위기에 취해 조금 상기된 친구들과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돌출 사건을 미리 예방하자는 차원이었다. 가끔 신경을 박박 긁는 매너 꽝인 이들 때문에 기분이 상한 적이 있었더랬다. 그 생각에 더해 크리스마스이고 하니 혼자 감상주의에 푹 빠지기 위해선 가능하면 누군가와의 접촉점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뒤돌아서서 간 지 오래지 않아 더 이상 갈만한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 길은 있었으되 불빛은 없는 깜깜한 공간 속에 무리해서 나를 내던질 필요는 없었다. 빠른 체념을 통해 다음 행동에 대한 결정을 신속히 내렸다. 다시 광장으로 나가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그네들과 썩 내키지 않는 만남으로 얽혀야 한다면 얼마든지 웃으며 무관심으로 꼭 안아줄 용의가 있었다.

한꺼번에 부르길래 깜짝 놀랐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저 순간을 즐기는 것일뿐.
▲ 무리 한꺼번에 부르길래 깜짝 놀랐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저 순간을 즐기는 것일뿐.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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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맨! 유 야판(Japan)? 치나(China)?"
다시 한 번 마주친 그들의 격렬한 중저음 환호성이 내 귓전을 방망이질 해댔다.
"꼬레아."

짧고 간결한 베이스 톤의 대답에도 그들은 무슨 영문인지 박수까지 치며 흥분해 한다.
"아까 사진 찍던데 우리도 좀 찍어주면 안 될까?"

단순한 부탁이었다. 뭔가 불확실하고 무거운 주제를 던질 것만 같던 한 무리의 젊은이들의 말은 그리 어렵게 해석될 것이 아니었다. 나는 굳었던 인상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풀고 단숨에 카메라를 빼들어 그들을 찍어주었다. 그리고는 싱겁게 웃어버릴 일을 마주했다. 사진을 찍어달라던 그 친구들은 사진을 확인도 하지 않고 그저 찍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질러대며 가던 길을 그냥 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애마 로페카(Ropeca)가 자리잡다.
▲ 성당 앞 결혼식이 끝나고 애마 로페카(Ropeca)가 자리잡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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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취하지 않았다. 취했다면 그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지나치게 휩쓸렸다는 것 정도. 다른 느낌 말고 다만 순수했다. 순수라는 말 이외에 어떤 표현도 이 상황을 대신할 수가 없었다. 조금은 불량스러워 보이던 얼굴들이 이제야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들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인상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신경쓰며 만남을 회피했던 건 어쩐지 내가 누군가에게 나눠줘야 할 사랑의 크기가 아직도 작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성당 앞이라면 왠지 모르게 더 깊은 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 휴식 성당 앞이라면 왠지 모르게 더 깊은 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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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더욱 깊었다. 완연한 남청색의 하늘도 별들도 이젠 차갑게 보였다. 어젯밤 나를 비춰주던 달님도 하루 사이에 저 멀리 달아나 버려 모양은 그대로인데 더 작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 특별한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일이 없다는 게 어쩌면 특별한 일인지 모르겠다. 색소폰으로 급격하게 감정선을 떨어뜨려놓고 잔잔한 음색으로 울적한 기분 만드는데 일조한 데이브 코즈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선택해 들으며 잠자리를 찾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빙빙 돌며 방황한 지 30여 분 정도.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아 찬바람을 뚫고 공터에 텐트치려고 하니 그 앞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사람이 난데없이 관리비로 50페소를 내란다. 너무도 당연한 태도에 도리어 당황한 내가 슬쩍 자리를 피한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심보보다 더 고약한지고. 공터에서 텃세 부리는 밉상이란. 피곤함에 피곤한 사람을 대하는 건 정말 지치는 일이다. 할 수 없이 아카포네타 외곽에 위치한 작은 경찰서 뒤뜰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그런데 중간에 자전거 바퀴를 지탱해 주는 스포크 몇 개가 그만 부러졌다. 스포크보다 내 자존심이 부러져야 하는데. 내가 사랑할 수 있음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부러져야 하는데.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 Merry Christmas!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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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은 눈사람의 표정이 귀엽기만 하다.
▲ 눈사람 앙증맞은 눈사람의 표정이 귀엽기만 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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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은 바로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거창한 포부를 갖거나 목표를 성취하러 온 게 아닌 단지 사랑하기 위해서. 나도 당신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 주는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을. 더 이상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고 또 상처 받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며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매일이 크리스마스 같다면 얼마 좋을까. 오늘만큼은 아이 같은 눈으로 바라본 텐트 위 하늘에 매달린 별들이 모두 손에 잡힐 듯한 굉장한 선물꾸러미인 것만 같다.

코카콜라사에서 테픽 도시에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모형물들. 분위기를 잘 살려 가족단위로 구경 온다.
▲ 사실은 코카콜라사에서 테픽 도시에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모형물들. 분위기를 잘 살려 가족단위로 구경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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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모든 착한 소원들이 다 이뤄지는 크리스마스 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참, 그리고 별을 보며 사랑을 키워가는 전 세계 모든 짝사랑하는 분들 화이팅입니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멕시코, #아카포네타, #문종성, #자전거,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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