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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 대웅전과 그 뒤에 우뚝 솟은 백암산.
백양사 대웅전과 그 뒤에 우뚝 솟은 백암산. ⓒ 안병기

백양사·백양사역에 얽힌 옛추억

1982년, 그때 나는 꽤 오랫동안 무전여행을 할 계획으로 집을 떠났다. 여행의 첫 밤을 내장사에서 보냈다. 점심 공양을 한 뒤, 서둘러 내장사를 빠져나왔다. 추령을 넘어 순창 새재를 지나 백양사로 이어지는 30리 길은 호젓했다. 5시간쯤이나 걸었을까. 백양사에 도착해보니, 오후 5시 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 일찍 도착해 버린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절에서 숙박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아마도 밤 10시쯤 절에 도착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절집이 아무리 인심이 좋다 하더라도 낯선 사람은 잘 재워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권력이 시국사범 수색을 목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사찰에 난입한 이른바 10·27 법난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밤늦게 도착한 사람이 잠자리를 청할 때 거절하게 되면 심적으로 부담이 따를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좀 이르긴 했지만, 원주 스님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을 것을 간청해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스물이 넘을까 말까 하게 보이는 젊은 원주는 나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렇게 내뱉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자학을 하십니까?"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열이 받쳤다.
"뭐, 자학을 한다고? 야, 임마. 네가 인생을 알아? 경전을 알아? 아무것도 아닌 놈이. 재워주기 싫으면 그만 둬."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이 광경을 보더니 원주에게 가만히 말했다.
"어이, 그러지 말고 방 하나 내어드리지."

때로는 욕이 가장 확실하게 사물의 핵심을 설파하는 법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간신히 요사채의 방 한 칸을 꿰차고 앉으려니, 여러 망상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섰다. 예순 살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까만 손가방에서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꺼냈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한 잔 할까?"
나도 괴팍하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몸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나를 능가하지 않는가.
"좋긴 합니다만, 법당이 멀지 않는데…. 우리가 마시면 부처님도 한 잔 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것네."
노인은 소주를 다시 손가방 안에다 원위치시켰다.

밤이 이슥해지자, 스님 한 분이 노인을 모시러 왔다. 노인이 함께 가기를 청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따라나섰다. 구석에 자리 잡은 한 요사로 안내되었다. 방안엔 촛불이 그윽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두 사람이 좌정하고 있었다. 한 분은 스님이었고, 다른 한 분은 마흔이 약간 넘어 보이는 처사였다. 첫눈에도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느끼게 해주는 풍모였다.

귀골선풍(貴骨仙風). 이전까지 내게 이 말은 한갓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을 바라보니, 그 말이 비로소 실감났다. 우선 두 눈이 반짝반짝했다. 머리는 검었는데, 기이하게도 귓바퀴 근처만 하얬다. 김수찬(가명)이라는 분이었는데, 요양차 내려와서 벌써 여러 달째 머무르고 있다 한다. 처사가 각자의 앞으로 대나무 대롱으로 된 찻잔을 건넨다. 그리고 작설차를 번갈아 따라준다. 또르륵, 또르륵. 깊은 밤엔 차 따르는 소리도 매우 운치가 있다.

이윽고 노인과 김수찬, 두 분 사이에 '복수혈전'이 벌어졌다. 처음엔 '하늘의 본래 색깔이 무엇이냐?'로 날카롭게 초식을 주고 받더니, 어느새 '물의 본시 빛깔이 무엇이냐'로 장풍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몇 식경이나 흘렀을까? 그제야 두 사람은 운기행공이라도 하는 것인지 퍼렇던 서슬을 죽인 채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나눈다.

백양사 대웅전이 일주문에서 바라봤을 때 정면에 있지 않고 한 쪽으로 비켜서서 지어진 것은 사나운 음기(陰氣)를 누르기 위해서라는 둥, 그 때문에 백양사에 요양온 사람들은 오히려 병을 얻어 돌아가기 쉽다는 둥 그런 잡다한 얘기다. '무림에는 고수가 많다'라는 말이 결코 허랑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런 밤이었다.

다음 날 김수찬 선생과 감천스님(어제 밤의 스님. 가명)과 나는 절 뒷산인 백암산으로 올라갔다. 산 중턱에 자리를 정하고 나서 가지고 간 코펠과 버너에다 쇠고기 죽을 끓였다. 위가 좋지 않은 김수찬 선생이 밥을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 삼아 감천 스님에게 한 마디 던졌다.

"스님, 그 죽에 든 쇠고기 건져드릴까요?"
"그걸 언제 일일이 골라내나 이 사람아, 쇠고기야 눈 밝은 내 위장이 알아서 골라낼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시게나."

3일째 되던 날에는 노인(김 옹)과 함께 다시 백암산에 올라갔다. 김 옹께서 산꼭대기에 있는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큰 아버지 묘소를 보러 함께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김 옹께선 이름난 지관이셨다.

산중턱에서 집을 지었다 부순 흔적을 만났다.  김 옹은 높은 곳까지 단번에 비석이나 상석을 나를 수 없으므로 쉬어가려고 집을 지었던 자리라고 설명하신다. 묘지는 백암산 한 봉우리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인석 등 석물들이 화려했다. 게다가 경관마저 일망무제다. 그 일족이 누린 영화가 거침없듯이….

"이렇게 명당이니 그 자손들이 번성하지 않겠나?"라고 김 옹께선 연신 감탄이시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일장기 말살 사건 때 보여준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의 행적과 고창 염전을 둘러싼 그 일가의 수탈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산 길에도 김 옹께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풍수쟁이가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눈을 갖지 않고 헛욕심을 가지고 명당을 찾다보면 흉지가 길지로 둔갑해 보인다고도 했다. <도선비기>에는 그렇게 허욕에 가득찬 인간을 경계하려고 함정을 파 두었다는 것이다. 김 옹께서 갑자기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란 시를 흥얼거리셨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라고 시작되는 시다. "어떻게 이 시를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박용철과 동문 수학했노라"고 말씀하셨다. 일제강점기 배재고보는 명문학교에 속했다.

노래 부르듯 아주 크게 낭송하시면서 산길을 내려가신다. 나도 저 나이까지 저렇게 마음속에 시를 간직하고 살 수 있을까. 김옹께서 나를 백양사 입구에 있는 한 음식점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도토리묵을 시켜놓고 막걸리를 마셨다. 소싯적부터 명당을 찾아 산천을 떠돌아 다니셨다는 김 옹은 내게 전화번호를 적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천에 한번 놀러 와라. 내가 하도 집을 비우고 떠돌아다녀서 마누라가 날 안 좋아해. 우리 집으로 와야 손님 대접 못 받어. 그러니까 전화해서 밖에서 살째기 만나, 응."

다음날 백양사를 떠났다. 한참을 걸어나오다가 멀리 허연 암봉을 바라보았다. 흰 양 한 마리가 내려와서 환양 선사의 금강경 설법을 듣고 갔다는 백학봉. 나는 이 백양사에 머무르는 동안 어떤 경전을 들었는가. 마음을 붙들어 맬 경전 하나 없이 막막하게 세상을 걸어가는 자에겐 허무만이 유일한 경전일 뿐이런가.

서울에서의 해후 그리고 에필로그

1년 후, 볼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던 차에 문득 생각 나서 김수찬 선생께 전화를 걸었다.

"거기 어디야?"
"제기동 천변공원 근첩니다."
"거기서 얼른 택시 타고 양재동으로 와서 '이봉(以逢)'이란 숯불 갈비집을 찾아. 한자로 써 以 맞이할 逢이야. 이 근방에 한자 간판 단 집은 우리 밖에 없어서 기사들도 잘 알아. 내가 집 앞에서 기다리지."

"아니, 선생님. 웬일로 숯불갈비집을 차리셨습니까?"
"음, 이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

시뻘건 대낮이었지만, 김수찬 선생은 아가씨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이른다. 박정희가 먹다 죽었다는 시버스리갈이란 양주를 마셨다. 잠시 후 김수찬 선생 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 선생은 나를 바꿔준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라고 인사를 던진다. 전화로지만, 인간성이 느껴질 만큼 목소리에 온기가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선생은 두 분의 연애담을 들려주셨다. 김수찬 선생은 속칭 일류대를 나왔다. 하루는 친구를 만나러 종로에 있는 다방을 갔는데 건너편에 앉은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얼른 다가가서 수작을 걸었다.

"아가씨, 전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공돌인데 한 번 사귀어 봅시다."
"그래요? 전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공순이랍니다. 서로 처지가 비슷하니,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하루는 김수찬 선생이 한 세미나에 갔는데 놀랍게도 거기 아가씨가 왕림하셨것다. 이 뜻밖의 상봉 앞에 둘은 동시에 "어어?" 하며 놀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외국인 교수들이 자기에겐 본체만체하되, 아가씨에겐 굽실거리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아가씨는 영문과 출신으로 영어회화에 능통했던 것이다. 외국인들이야 통역 잘하는 사람한테 의존할 게 뻔하지 않겠는가.

시버스리갈이 바닥이 나자, 소주로 돌렸다. 선생의 이야기는 대하장강을 굽이쳤다. 때로는 하늘 천자 하나를 가지고도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갈 정도였다. 낮 2시쯤 시작한 술자리가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선생이 "차비나 하라"면서 봉투를 건네준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화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받아두었다.

시골로 내려가려고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그러나 기차는 끊긴 지 오래였다. 터덕터덕 걸어서 퇴계로 방향으로 갔다. 마침 오늘 개업한 책방이 눈에 띄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책방 안은 적요로웠다. 책방 주인은 내게 하염없이 개업주를 따라주었다.

그 시절은 모든 게 은유였다. 새벽_ 이 말이야말로 모든 은유의 첫 머리를 차지했다. 서점 주인은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은 그 미상(未祥)의 시각에 대해 말했고 난 어둠도 익숙해지면 그 스스로 길이 되는 생의 이치를 말했다. 이윽고 직유의 새벽이 가까워졌을 때, 10권의 책을 사고 나서 책방을 나왔다. 그 밤에 샀던 10권의 책은 아직도 내 마음의 서가에 꽂혀 있다.

간이역 - 여행의 여운을 오래 음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백양사역 풍경.
백양사역 풍경. ⓒ 안병기

내게 백양사 혹은 백양사역은 그렇게 아련한 추억으로 핀 한 송이 꽃이다. '언젠가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십 몇 년이란 세월이 후다닥 흘러가 버렸다. 그런 나의 우유부단함을 끝장낸 것은 이진명의 시 '백양사역'이었다. 한꺼번에 구입한 시집들 속에서 찾은 그 시가 나를 백양사로 이끌었던 것이다. 마침내 작년 7월 말, 기차를 타고서 백양사에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백양사역에서 상행선 기차를 기다렸다. 이진명의 시 '백양사역'을 떠올리면서. 이 시는 아주 짧은 한 순간 자신의 망막에 잡힌 백양사의 인상을 시로 스케치한 것이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열림원

백양사역은 새마을호는 안 간다
백양사역은 새마을호는 안 온다
빠르고 비싼 것은 백양사역 못 선다 못 밟는다

백양사역은 내리는 사람 나를 포함해 두셋 또는 셋넷
백양사역은 타는 사람 나를 포함해 둘 또는 셋

그런 몇번째 날
초봄 찬 눈발 옅게 흩는 날
잔광도 구름에 다 가린 늦은 오후
상행길 홈
백양사역은 휘, 휘
허, 허롭게 허, 허하게
오직 나 혼자를 세웠다
오직 나 혼자를 손님으로 받았다
여행가방을 늘여들고
아직 길다란 옷을 벗지 못한 나를

그때 나는
열차가 들어오려는 2, 3분의 짧은 사이를 기다린 것이겠지만
더욱 기다리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귀기울이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마음 깊이 보고 싶었던 것은
넓디넓고 조용한 백양사역의 모든 것
특히 사람의 그림자를 지운 백양사역의 본래 얼굴
낮고 흐린 채색으로 무한히 정지한 듯 열린

건너 커단 산봉우리 멀고
서울도 멀고
장성호 지나지나 다녀온 古佛의 백양사도 이젠 멀고

간섭은 없다
백양사역은 그처럼 조용하고 넓은 채, 무슨 놀라는 일도 다 그친 채
강산의 무량한 적막이 되어

나는 서서 밟는다 짧은 2, 3분 사이
느리고 헐한 이 모든 노래를
길에서 벗어난 길의 사이 백양사역을
- 이진명 시 '백양사역' 전문  

이진명 시인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0년 계간 <작가세계>에 '저녁을 위하여'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가 있다. 시 '백양사역'은 2004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단 한 사람>에 실려 있다.

이진명의 시에는 배경처럼 이야기가 깔려 있다. 시인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삶에 가려진 속내를 차근차근 짚어 간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단 한 사람'이란 시는 그의 시가 가진 특징을 잘 드러내준다. 시인은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국물을 자기 일처럼 깨끗이 닦아줄 사람은/ 언제나처럼 단 한 사람/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시 '단 한 사람' 일부)"라고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이진명 시인이 백양사에 갔던 때는 '찬 눈발 옅게 흩는' 초봄이다. 아마도 3월 초 쯤이 아니었나 싶다. 긴 겨울옷을 입고 백양사에 다녀온 시인은 기차를 타려고 상행길 홈에 서 있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시인이 기다렸던 것은 "사람의 그림자를 지"운 "낮고 흐린 채색으로 무한히 정지한 듯 열"려 있으며, "강산의 무량한 적막이 되어" 있는 백양사역이 가진 진면목이다. 시인은 이 모든 풍경을  "느리고 헐한 노래"라고 규정 짓는다. 왜 하필 느리고 헐한 노래인가. 백양사역은 "빠르고 비싼 것"은 못 서고 못 밟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숙취 현상과 매우 비슷하다. 일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어떤 취기를 느끼고자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면 취기에서, 그 여운에서 쉽사리 깨어나지 못할수록 좋은 여행일 것이다. 시인은 작은 역 홈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면서 금방 다녀온 여행의 여운을 음미하고 있다. 느리고 헐한 노래가 흐르는 곳이니 아마 그 여운도 오래갈 것이다.

백양사역, 그 느리고 헐한 노래가 흐르는 곳에 다시 가고 싶다. 지금쯤, 백양사 종무소 앞 뜨락에도 상사화 싹이 파랗게 돋아났으리라.


#이진명 #백양사역#명당#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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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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