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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가슴을 꿈꾸다.
▲ 해변에서 소년의 가슴을 꿈꾸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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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룩끼룩 목청껏 울어 젖히며 머리 위를 스치는 갈매기들의 뒤넘스런 날갯짓에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실려온다. 얼마만의 제대로 된 바다구경인지.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백사장을 두고 마음이 싱숭생숭 해 온다. 아이처럼 뛰어가 온 몸으로 파도를 부셔버리고 싶어도 애마 로페카와 함께하는 이상 만사 제쳐두고 함부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다. 그저 너누룩하게 가라앉은 바람을 마주한 채 서서히 대양에 잠몰하는 붉은 태양의 기운에 감겨 시큰한 추억을 되살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래도 이게 뭐야? 기대 잔뜩 하고 왔더니만."
피곤하게 내뱉은 혼잣말에 이곳의 정취가 대변되었다. 멕시코에서 내로라하는 국제관광휴양지인 마사뜰란(Mazatlan). 가이드북에 의하면 깐꾼, 아까불꼬와 함께 멕시코 3대 해변도시로 태평양을 바라보는 이곳의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니 달달 꿀 바른 듯 써 있던 글귀들을 낼름 핥아가며 온 길이 헛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바다냄새를 맡고 숨이 끊어지도록 힘차게 달려왔건만 4년 전 자전거 전국일주 때 마주해 보던 부산 앞바다의 경치에도 한참 못 미쳤다.

"차라리 부산 앞바다가 낫군."

날숨에 기대는 연기처럼 날아가고 들숨에 실망은 밀물처럼 흘러들어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우울해질 것 같았다. 백사장과 해변을 따라 늘어 세워진 호텔만이 전부일 정도로 무미건조한 조악한 광경은 보는 즉시 싫증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 접어두고 조금 더 어두워지기 전에 가볍게 해변산책이나 한 번 하기로 했다. 이것으로 멕시코가 자랑하는 마사뜰란을 방문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기 위하여.

쌓여있는 굴껍질들
▲ 구죽 쌓여있는 굴껍질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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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 굴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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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면 동선도 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저들만의 방법대로 바다를 즐기는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하나 사 가. 싱싱해서 맛이 좋거든."
파도가 철썩 부딪히는 바위 틈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두 남자는 연신 굴 껍질을 까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고, 그들의 발 밑으로는 질서없이 널부러진 구죽만이 그들의 작업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쩝, 저걸 고추장에 각종 야채들과 함께 무침해서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냐, 튀김으로 해서 먹으면 그 맛이 죽이지. 아, 굴국으로 해서 먹어도 끝내줄 텐데.'

보고만 있어도 허기진 장면에 정신이 멍해질 것 같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굴 음식들을 한 번씩 목넘김 시키려면 꿀꺽 군침 한 번 삼켜야 했다. 굵고 탐스러운 굴 딱 하나만 생으로 먹으면 좋으련만 하릴없이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어본다.

"잠깐만, 보여줄게 있어."
일을 하다 말고 갑자기 남자는 나와 옆 커플에게 신기한 것을 보여주려고 한 발짝 자리를 옮겼다.
"여길 봐."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바위 사이에 아주 작은 고인 물이 있을 뿐이었다. 구경하는 나와 옆 커플은 눈만 꿈벅인 채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난 구경을 보여주려는 듯 남자가 손을 넣어 물속을 이리저리 뒤집자 갑자가 물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달려 나오는 흐물흐물한 정체를 보자 우리는 일제히 신기함에 탄성을 질렀다.

손에 들려나와 흐물흐물 거리는 낙지를 보자니 머릿 속에 오만 음식 생각이 가득하다.
▲ 낙지 손에 들려나와 흐물흐물 거리는 낙지를 보자니 머릿 속에 오만 음식 생각이 가득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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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군요!"
"하하, 이것 좀 보라구.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녀석이야. 그래서 냅다 잡았지."
구경하던 여자는 신기하면서도 징그럽다는 듯 이 때다 싶어 남자친구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경멸할 여우 짓의 행태를 보였지만 내 눈은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낙지회, 낙지찜, 낙지볶음, 낙지매운탕, 젠장….'

상상만으로도 끔찍이 고통 받는 내 옆에서 또 누군가가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전문 사진기자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는 여인을 바다를 배경으로 이리저리 찍어가며 시선을 잡아당겼다. 해변에 웬 드레스인가 싶었는데 결혼사진 찍는단다.

그랬다. 왼쪽으로는 결혼한다고 해맑은 미소로 사진 찍고, 오른쪽으로는 자석처럼 꼭 붙어 다니는 커플이 있고, 난…. 잠시 기분을 환기시키려 게슴츠레한 눈으로 수평선 끝까지 바라봤다. 아마도 오늘 밤엔 굴과 낙지로 그 남자를 무던히도 축복해 주려는 것 같은 하늘 아래 가장 초라한 사람은 단연 나인 듯 보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껏 포즈를 잡는 모습과 미래를 향한 설렘으로 미소짓는 표정이 아름답다.
▲ 예비신부 바다를 배경으로 한껏 포즈를 잡는 모습과 미래를 향한 설렘으로 미소짓는 표정이 아름답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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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들에 대해 철저하고 초연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할 필요가 있었다. 집착할수록 나만 손해라는 걸 모를 리가. 해넘이가 가까워오자 조도가 낮은 오렌지 빛 조명들이 길을 따라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해변을 산책하려던 계획을 돌렸다. 동시에 핸들도 돌렸다. 그리고 해변 대신 호텔 뒤편 바닷가로 향했다. 조용히 떨어져가는 해를 보며 사색을 빙자한 궁상이나 떨어볼 참이었다.

모래밭은 자전거를 굴리기엔 적합지 않았지만 낭만어린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장식하는 데는 가장 안성맞춤인 배경이 된다. 하늘은 잠시 어두워진가 싶더니 오늘과 안녕을 고하는 해가 남긴 하루살이 여운에 이내 새빨갛게 익어 보는 감흥을 더해주었다. 이 순간 대지 위에 말발굽 소리처럼 심장은 세차게 요동치고 별안간 청년은 소년의 가슴을 갖게 된다.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노을을 힘껏 끌어안고 마지막 햇살을 잡으러 바다를 향해 달려 들어갔다. 이 장면을 얼마 전부터 바라보던 캐나다인 할아버지의 걸쭉한 한 마디,
"이봐! 저 수평선 태양이 지는 곳까지 전진하라구. 어서!"

태양이 지는 수평선 끝까지!" 캐네디언 할아버지의 조크 어린 응원을 듣고 노을을 끌어안다.
▲ "달려가! 태양이 지는 수평선 끝까지!" 캐네디언 할아버지의 조크 어린 응원을 듣고 노을을 끌어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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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양용 자전거도 아니고 그래도 살아야겠거니 파도가 발목까지 차는 선에서 나의 도발은 끝이 났다.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아 하니 아마도 혈기 넘치는 젊은 청년이 장렬하게 파도에 빠지는 것을 목격하고 싶었나 보다.

펜이나 잡아볼까 조용히 사색하는 대신 한참을 오두방정을 떨었더니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그렇게 대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노곤한 몸에 달콤한 휴식이 필요했기에 그 쇼윈도에 난 문을 밀치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가 보니 하루 숙박료가 6만원. 나올 때는 살금살금 조신조신 여기저기 인사하듯 고개 숙이며 나와서는 급하게 밤공기를 집어삼켰다.

버거킹에서.
▲ 밤 샘 버거킹에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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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쭉해진 채로 우선은 매번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늘 까탈대는 가증스러운 배를 채우기 위해 버거킹에 들어갔다. 멕시코에서 버거킹은 다른 패스트푸드의 조건보다 훨씬 탁월하다. 그것은 바로 24시간 운영한다는 것과 거기에 무선 인터넷이 무료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예 세트 메뉴를 시켜놓고 밤을 새기로. 직원들도 내 상황을 이해했는지 호의적으로 대해주었고 분위기도 좋았다(셀프서비스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햄버거 세트메뉴를 주문하니 서빙을 해 주었다). 더욱이 어느 곳보다 깨끗한 화장실이 있으니 씻을 수도 있어서 추운 거 말고는 그런 대로 버티기엔 괜찮다.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해도 앉아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 자체가 고역을 넘어 마치 오체투지와 같은 고도의 수행에 가깝다. 인터넷도 서너 시간이다. 가 볼 사이트는 다 가보고 유투브 동영상을 통해 쇼프로그램도 다 보고 나면 더 이상 할 게 없어진다. 그러면 점점 눈은 충혈되고 몸은 찌뿌둥해지며 목과 허리는 극심하게 결린다. 어쩔 수 없이 체력적 한계에 다다르면 그 때서야 탁자에 엎드려 잠을 청하지만 자세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밀려드는 추위를 조금이라도 밀어내기 위해 가방에서 꺼낸 점퍼에 머리를 깊숙이 숨긴 채 어렵사리 잠을 청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중간에 인기척에 깨어났다. 갑자기 버거킹 직원이 내게로 다가와 무엇인가를 내민 것이다. 뜻밖에도 김치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곳에서 김치가. 정말 한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것처럼 새빨간 배추김치는 보기만 해도 침샘을 자극하여 군침이 돌았다. 나는 흠칫 놀라며 직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거니 먹고 힘내세요."

우와, 기분 최고다! 김치 맛을 본 지가 언제였는지. 그렇지 않아도 체력적으로 상당히 부쳤던 나에게 김치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나는 눈으로 감탄할 겨를도 없이 잠이 확 깬 채로 허둥지둥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음식도 없었다. 오직 김치뿐이었다. 그런 김치를 씹지도 않았는데 이미 목구멍으로 그냥 넘어갔다. 꿀맛도 이런 꿀맛이 없었다. 김치에 환장한 사람처럼 먹고 또 먹었다. 너무너무 행복했다. 한창 그렇게 그릇에 얼굴을 파묻을 정도로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직원이 다시 내게로 와 말을 건넸다.

밤새 오들오들 떨어야했던 추운 기억. 피곤해서인지 초췌해진 눈이 푹 들어갔다.
▲ 아무리 젊다지만 밤새 오들오들 떨어야했던 추운 기억. 피곤해서인지 초췌해진 눈이 푹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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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잘 거예요?"
"……?"
"영업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거냐고요?"
순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분명 내가 여기 있어서 부담된다는 뉘앙스였다. 그럼 김치는 뭐야?

"……무슨 소리야 대체. 친절하게 김치 갖다줄 때는 언제고."

갑작스런 직원의 말에 둔전거리던 난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뒤 지금 내가 무엇보다 심한 착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굴은 탁자 표면에 문드러져 주름이 생겼고 눈은 실성한 사람처럼 반만 뜨고 있었다. 거기에 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으며, 찬바람을 맞은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정신을 못차린 채 자울자울 거리며 직원을 바라보던 나는 한 가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곤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도리질하자 울음을 터트리고 싶을 정도의 허무함이 밀려왔다.

"뭐야, 다 꿈이었군."

그랬다. 모든 게 꿈이었다. 정말 억울하게도 김치는 내가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었다. 아니 내 영혼이 갈망하는 한 줌 환상에 지나지 않은 거였다. 꿈에서 본 친절한 직원은 어디 가고 지금 현실은 어서 자리를 뜨기를 바라는 직원이 내 앞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게 다 꿈이었다니 정녕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또렷하게 맛보았었는데…. 직원이 잠을 깬 것보다 김치가 현실을 망각한 신기루였다는 사실이 더 착잡해져왔다. 얼마나 김치가 그리웠으면 꿈에 다 나왔을까. 농도 짙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진한 한숨에는 마른 갈증만 목을 자극할 뿐이었다.

"10분 안에 정리해서 나갈게요."
체념이 담긴 한 마디를 두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나는 경직된 근육을 급히 사용하려다 보니 극심한 근육통증에 이맛살을 찌푸려야 했다. 조금만 무리해도 마치 풍이 올 것처럼. 역시 의자에서 밤을 새는 건 젊음이라 해도 무리임에 분명했다. 정말 얼어 죽는 줄 알았다. 매장 안에 세워둔 자전거를 힘없이 끌고 밖으로 나와 보니 돋을볕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멕시코 3대 해변도시. 아침이라 한가하다.
▲ 마사뜰란 해변 멕시코 3대 해변도시. 아침이라 한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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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궁상.
▲ 사색 혹은 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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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너의 고마움을 모르고 있었다니. 덥다고 싫어했는데 오늘만큼은 니가 참 좋구나.'
상쾌한 햇살을 온 몸으로 가득 받으며 다짐했다.
'다시는 버거킹 따위에서 밤새지 않을 거야. 다시는!'

정말 사서 고생도 좋지만 이런 무모한 짓은 앞으로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바닷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던 이 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틀 남겨두고 혼자였던 내가 얼마나 끔찍하게도 우울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아, 김치! 오, 굴! 으아, 낙지! 그저 눈물만 앞을 가린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에 대한 절절한 탐닉에 사로잡힌 아침 속을 또 어떻게 달래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하다. 이럴 땐 식탁의 요술램프, 그리운 그 이름을 애타게 불러본다.

"어무이~!"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마사뜰란, #문종성, #멕시코, #자전거,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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